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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성산에 사는 자(구별화) (시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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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성산에 사는 자(구별화)  (시 15:1-5)


I. 차별화 구별화

KAIST 시험 문제입니다. 

50cm 2kg의 연어 한 마리가 80도의 각도를 시속 50km로 쏟아지는 폭포에 5m를 뛰어 오르려면 얼마만한 힘이 필요할까요? 한 학생이 간단히 답을 썼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뛴다!

죽을 힘을 다해서 뛰어도 참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죽을 힘을 다해서 전도하는데도 교회성장과 부흥이 만만치 않은 모양입니다. 

시편 15편의 말씀을 통해서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차별화, 그리스도인들은 구별화의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의 성산에 사는 자」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인도 캘키타에 있는 마더 테러사 본부벽에 작자 미상의 시 한편이 붙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류시화,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오래된 미래, 2005. 중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세상과는 다른 생각, 다른 가치관, 다른 언어, 다른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구별된 사람들”이란 뜻이지요.
"성도”를 한 마디로 말하면 “구별화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5편 1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5절까지 그 대답이 나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구별화”입니다. 
종교인 혹은 교인으로 살며 신앙인 흉내를 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구별화된 사람만이 “주의 장막에 머무를 수 있고 주의 성산에 살 수 있습니다.” 주의 심장에 머무를 수 있고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얼마전(2011.2.22)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서 싱가포를 국립대 경영학과 장세진 석좌교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기업이 모방하기 어려운 차별화된 제품, 차별화된 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세계적인 맛집 블로그 「더 레스토랑」에 소개된 유일한 한국 음식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호텔 레스토랑이 아니라 홍대앞에서 튀김집을 운영하는 정은아라는 분의 분식점입니다. 

얼마전(2011.2.19) SBS (스타킹)에 나와 튀김을 팔아 년 4억을 버는 비법을 

“주문이 들어온 동시에 튀기기 시작하여 바삭바삭 최고의 맛을 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홍대 4억 튀김녀 정은아씨는 떡볶이 하나를 만들어도 

“1. 센불로 정수된 물을 끓인다. 
 2. 물이 끓으면 떡을 한줌 정도 넣는다. 
 3. 떡이 통통하게 부풀어 떠오르면 자기만의 비법의 고추장을 적당히 넣는다. 
 4. 얇은 어묵을 넣어 조금만 더 끓여 어묵이 퍼지지 않게 한다. 
 5. 씹는 질감을 더해주는 파를 넣어 마무리한다.”고 

떡볶이 레시피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새우 한 마리를 튀겨 2000원을 받는 비법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차별화가 자산이더란 것이지요.

자유로를 달려 통일동산을 지나고 우측길로 들어서면 류광열 장로님이 경영하는 「갈길리 농원」이라는 장어집이 나옵니다. 언제가도 넓은 주차장에 자동차들이 빼곡이 채워져 있고 때론 일본 관광객들이 타고온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주말이면 두 세시간을 기다려야 장어 몇 마리를 먹을 수 있습니다. 

년간 5만명 정도가 이 장어를 먹고 간다고 합니다. 
갈릴리 농원 장어는 기름지지 않고 바삭한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각자 밥과 김치를 자신들이 준비하여 자신이 장어를 직접 구워 먹게 합니다. 
양어장에 장어를 직접 키워 생산해 내는데 
항생제를 전혀 쓰지 않고 미생물로 장어를 키웁니다. 
덴마크에서 이 비법을 배워 수차례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차별화된 장어 한 마리가 엄청난 부와 먹는 행복을 창출해 낸 것입니다. 

세상 기업에서는 차별화를 성고의 비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성도의 신앙생활 성공의 비법은 차별화가 아니라 구별화입니다. 


II. 성품의 구별화 : 정직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일컬어 포스트 모든 시대라는 합니다. 
절대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권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누구 인정하든 안하든 각자 개인 개인이 자유스럽게 판단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포스트 모든 사고가 우리 기독교엔 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절대진리 절대종교를 주장하는 기독교가 독선으로 받아 들여집니다. 

그래서 교회의 전도전략에도 이 시대에 먹혀 들어가는 
차별화된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오늘 교회의 위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차별화 자체가 통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도 종교의 하나로 이해될 뿐입니다.

얼마전 교계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번 석가 탄신일에 교회마다 “석가모니의 탄신을 축하 합니다”라는 프랭카드를 걸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를 두고 토론을 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놀라웁게도 선교정책의 차별화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삶의 구별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모던하든 포스트 모던하든 하나님 앞에서 성도는 구별되게 살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성경에서 복있는 사람이라고 할때 그것은 흔히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복받은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을 복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복있는 사람이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 하나님과 가까이서 교제하며 사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용어를 빌리면 그가 바로 주의 장막에 머무르는 자입니다. 
주의 성산에 사는 자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주의 장막이나 성소에 사는 것은 고사하고 그곳에 한번만이라도 들어가려면 흠있는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 양은 우선 속죄와 어린양으로 오신 흠없으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기에 흠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제목은 바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성품이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흠이 없어야 합니다. 
첫째, 2절 흠없는 삶을 「정직하게 행하는 자」라고 합니다. 

여기 “정직”이란 원어로 “타냄”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흠없는 제물로 제사를 드린 제사자가 흠없는 삶을 사는 
신행일치(信行一致)를 말합니다. 기도했으면 기도한대로 자신이 사는 것입니다. 

제사드렸으면 흠없는 제물을 자신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자신의 성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예배가 신실하지 않은 사람을 신앙인이라 할 수 없듯이 
예배만하고 정직이 없는 성도를 진실한 성도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있고 흩어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에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흩어지는 교회에서 정직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2절)

2절에서 정직을 행한다. 공의를 실천한다. 진실을 말한다. 고 할때 동사형들이 모두 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두번 해 보는 일시적 행동이 아니라 습관화되고 성품화되고 인격화된 태도를 말합니다. 
한두번 정직해 보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성품을 말합니다.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입니까?

첫째, 성품의 구별화입니다. 즉 정직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정직하기가 쉽든가요? 
죄악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무척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불공정한 게임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예수를 믿건 안믿건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지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있고 감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들만은 적어도 정직하고 진실하고 세상사람들과는 모든 면에서 달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쩌다 우리가 실수를 하고 정직하지 못한 허물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가혹한 비판을 받습니다. 

세상은 이중잣대를 가지고 우리에게 많은 요구를 합니다. 마치 자신들은 정직히 살아도 되고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정직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준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그만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기독교가 분명 구별된 종교라는 것입니다. 
구별된 종교의 신자들에게 세상이 구별화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만 구별화를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분명 구별화를 요구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

소금은 어디에 넣어도 소금입니다. 
국에 넣어도, 나물에 넣어도, 고기를 찍어 먹어도 소금은 소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생활에서만 정직해서는 안됩니다. 
가정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여러분은 일터선교사입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착한 태도와 성품으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에드가 프랭크가 (크리스챤 센추리)지에 「제단」이란 시를 발표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이는
공장 작업대를 늘 제단으로 생각하였고
어떤 이는 상점 계산대를
어떤 이는 사무보는 책상을
또는 부엌 조리대를 거룩한 장소로 삼았다.
평범한 환경이 길가의 성전이 되어야 하리라. 

이런 생각을 최근 신학에서는 Bussiness as Mission이라고 합니다. 

선교를 위한 삶, 선교를 위한 사람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 사업자체가 선교라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것이 신앙이요 선교요 전도가 될 때 한국교회는 살아납니다. 


III. 언어의 구별화

이름만 교인임네하는 사람말고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속에 사는 자,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시15:2-3)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그의 말 속에 축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입니다. 
언어생활이 구별된 사람입니다. 

구약학자 고 김정준 교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의 복을 즐기며 그 복을 나누는 사람은 말이 거듭난 사람이다. 
  그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그가 입을 열면 이웃의 마음이 밝아진다. 
  남의 허물이 눈에 보여도 그 혀로 남의 허물을 들어내지 않는다. 
  이웃에게 해가 되거나 아픔이 되는 말을 밷지 않는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자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비방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하신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이 말은 -

혀를 놀려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웃의 좋은 점은 말하지 아니하고 이웃의 허물을 드러내는 사람은 
진정한 예배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입으로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독이 담긴 말로 이웃을 아프게 하는 사람의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아니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터넷에 인신공격성 악플을 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의 장점을 찾아 격려합니다. 
입으로 사랑과 존경을 표시합니다. 
상대방의 비난거리를 찾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비난거리로 보입니다. 
만약 남의 비방거리만 내눈에 보인다면 이미 내 눈을 사단에게 맡겨버린 것입니다.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이 말을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서는 “자기 이웃에 대해 비판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웃에 대하는 악의적 판단을 받아들이지 아니할뿐더러 귀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공동체안에서 누군가를 비난하는 말을 할때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얘기를 듣지 않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나쁜 소문을 전해줄때 
“우리는 나의 잘못과 죄만 들어내지 남의 죄를 들어내지 않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영적 파수꾼이 공동체에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부정적인 말을 할때 “우리는 긍정적인 말만하도록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건 공동체속에 함께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의 성산에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언어생활이 건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언어생활을 보면 압니다. 
말은 곧 그 사람자신이요 그의 인격입니다. 
“말에 독이 들어 있다?” 그의 영혼에 독이 있다는 뜻입니다. 
“말에 격려와 행복이 있다?” 그의 마음에 행복이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오랜시간에 걸쳐 굳어 있는 태도나 성품을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나쁜 인격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인격은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말을 바꾸면 됩니다. 말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인격이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기분이 상해 있을 때 말을 좋게 하십시요. 인격이 바뀝니다. 

영어권에 있는 사람들이 복을 받아 선진국이 된 이유는 서로 축복의 말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나고 헤어질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길 - God bless you!”라는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십시요.
다른 사람을 축복하십시요.
다른 사람을 격려하십시요.
당신의 영혼이 성산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내 친구 명성훈 목사님의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비결」중에서)

「마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까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로 표현했을때 마귀는 이를 듣고 접근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도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평이 생길지라도 그것을 절대로 입밖으로 내놓지 않게 하십시요. 절대로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기로 결심하십시요. 부정적인 생각, 비난, 불평, 불만을 터뜨리고 싶은 생각과 전쟁을 선포하십시요. 당신 주변에 혹시 다른 사람이라도 쓰레기같은 말들을 흘리지 않도록 하십시요.」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구별된 언어생활로 주의 성산에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할 수 있습니다. 


IV. 자원의 구별된 사용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혀로 남을 허물하면 아니됩니다.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 공격하는 일은 마귀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받은 상처가 치료되지 않은 사람, 분노와 미움이 남아 있는 사람은 
마귀에게 쉽게 이용당합니다. 
교만이 있는 사람도 쉽게 남을 비판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그와 함께 거하실 수 없습니다. 
주의 성산에 살 수 없는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 죄를 분별해야 합니다. 
죄를 분별한다는 것은 자신이 죄에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 
비판의 영에 사로잡혀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산에 사는 자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불쌍히 여기고 감싸줍니다. 
노아의 두 아들처럼 벌거벗은 죄와 허물을 덮어줍니다. 
남의 약점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 하려는 사람, 교회생활에 열심내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시기하지 아니하고 기뻐해 줍니다. 
이것이 주의 성산에 사는 성품입니다.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4절에 의하면 사람보는 눈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이 쓰는 사람을 존귀히 여길 줄 압니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합니다.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합니다.」(4절)

여러분, 사람보는 눈이 인생을 보는 눈입니다. 
여러분, 사람보는 눈이 인생의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이 멸시하는 자를 동정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 보다 더 자비롭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내세우고 싶은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하나님께서 존귀히 여기는 자를 존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끝으로 5절입니다. 

주의 성산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자원을 구별되게 사용할 줄 압니다. 
언어를 구별되게 사용하듯이
마음을 구별되게 관리하듯이
눈으로 구별할 줄 알듯이
자원을 구별되게 사용할 줄 압니다. 

특별히 물질을 구별되게 사용합니다. 
그는 받은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며 삽니다. 
본문에서 “이자”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옛번역에 “변리”란 높은 이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 비유에서(마25:27) 적당한 이자는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은행은 좋은 곳입니다. 

얼마전 충주경찰서는 그 지역에서 186%의 높은 이자를 받고 있는 
업체를 적발하고 체벌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뇌물을 받지 않습니다. 
뇌물을 받으면 판단이 굽어지기 때문입니다. 
뇌물을 먹는 것은 시한폭탄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결론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런 일 - 열가지 내지 열 한가지 정도가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긍정적인 서술 5가지, 부정적인 서술 6가지입니다. 
이런 자는 세상이 변하고 정권이 바뀌고 지진과 화산으로 지축이 흔들려도 
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복을 누립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서 존귀한 존재로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이 주의 성산에 사는 것입니다. 

얼마전 최은희라는 학생이 하바드대학에 입학하며 “빌게이츠 밀레니엄 장학금” 10억원을 약속받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은희양의 언니와 오빠도 이미 명문 보스턴 대학을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을 한 터라 그의 부모가 누구일까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국제 사기단에 속아 전 재산을 날리고 가족을 버린채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세자녀를 키우며 막일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불같은 기도로!
차별화된 교육철학과 방법으로!
구별된 자식을 키워냈습니다. 

그가 바로 이번주 수요일밤 사세특밤 강사로 나서는 “백만불 장학생 엄마되기”의 저자 황경애 사모입니다. “사세특밤” 우리 모두 주의 성산에 서는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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