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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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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눅 19:28-40)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이기에, 미리 살펴보려고 한다.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 유월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셨다. 이때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했다(요12:13). 여기서 종려주일이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된 줄 아셨다. 그래서 자신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는 곳곳마다,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보았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도 들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해주실 것이라 기대했다. 

본문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런 행동을 말렸다(마12:14-15, 마16:20, 눅4:29-30). 그런데 여기서는, 그들의 행동을 전혀 말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유대인들과 불필요한 마찰을, 의도적으로 피하셨다. 

유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만큼은 피하려고 했다(막14:1-2).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언제나, 하나님이 정하신다. 이제 때가 되어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돌아가셔야 하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도록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1. 왕이신 예수님(28-35).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외쳤다. (38上)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이들의 외침과 같이, 예수님은 왕이다. 만왕의 왕으로,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며, 주관하는 분이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왕들과는 너무 달랐다. 이 세상의 왕들은, 머리에 값비싼 보석들로 꾸며진, 왕관을 쓰고, 화려한 왕복을 입는다. 또 멋지게 차려입은 수행원들이, 호위하는 마차를 탄다. 그러나 예수님은, 멋지게 생긴 백마를 타지 않았다. 나귀 새끼를 타셨다. 

또 예수님을 맞이한 자들은, 귀인들이 아니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가던, 서민들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진실로 만왕의 왕이시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위엄과 존귀함을 볼 수 있다. 이는 이 세상의 어떤 왕들도, 이 세상 왕들을 모두 다 합쳐도, 따라올 수 없는 위엄이 있다. 

(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에서 자신을, 왕으로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에 있는,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다. 이 두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2-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들이다. 감람원은 감람나무, 곧 올리브 나무들이 자라는 동산이다. 

벳바게(      )의 뜻은, '(첫 열매) 무화과의 집'이다. 베다니(        )의 뜻은 "슬픔, 비탄의 집 또는 (        ) (후에 열리는) 무화과의 집"이다. (요12장)에는,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고, 그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소중한 옥합을 깨뜨렸다. 본문은 바로 다음날 된 일이다. 

예수님은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냈다. (30-31)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계셨지만, 맞은편 마을 벳바게에 있는, 나귀새끼를 환히 보고 계셨다. 그 나귀새끼가 매여 있다는 사실도, 구체적으로 알고 계셨다. 아직 아무도 그 나귀새끼를, 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러니까 현재의 일, 과거의 일을 다 알고 계셨다. 

낯선 마을에 들어가, 나귀새끼를 풀어 끌고 오면, 도둑질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찌하여 푸느냐?"고 물을텐데 이때 앞으로 일어날 일도 아시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대답할 말을 가르쳐주셨다. 

(32-34)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하라고 하셨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고, 건너편 마을로 갔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곳에는 나귀 새끼가 있었다. 

그 나귀 새끼는 매여 있었다.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풀었다. 그때 그 임자들이, 그들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여기서 임자들은, 주인과 가족들을 말한다. 모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예수님은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모두 아신다. 

이 세상의 어떤 왕이, 과연 예수님같이 시공간을 모두 초월해서, 다 알 수 있는가? 이처럼 진실로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다. 대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은 예수님이니, 감히 누가 거절할 수 있는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그대로 순종하자. 예수님은 나병환자 시몬을, 베다니에서 고쳐주셨다. 또 나사로도 죽은 지 나흘이나 됐지만 베다니에서 살려주셨다. 그래서 그때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다. 

조그만 시골 동네, 벳바게 사람들은, 그때 맞은편 마을 베다니에 계신,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나귀새끼의 주인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나귀새끼를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귀새끼의 주인들은, 그 일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조금도 거부하지 않고, 나귀새끼를 내놓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나귀새끼를 끌고 왔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였다.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 

그 위에 안장이 없으니, 제자들은 겉옷을 그 위에 걸쳐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예수님을 태웠다. (왕상1:33)을 보면, 솔로몬은 왕위에 오를 때, 노새를 탔다. 그 노새가 다윗 왕의 것이니, 다윗 왕도 노새를 탔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나귀새끼를 타셨나? 왕의 전통을 따르기 위함이었나? No. 

똑같은 사건을 마태와 요한은, 구약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의 성취라고 한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는 스가랴선지자가 예수님보다, 이미 5백년 전에 예언한 말씀이다. 왕이신 메시아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가실 때,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맞이한다는 예언이다.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셨다. 전지전능하시기에, 이 예언을 아셨고, 이 예언을 성취하실 때와 방법도 아셨다. 

예언의 성취에 쓰일, 나귀새끼가 어디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끌고 올 것인지, 다 아셨다. 진실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왕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기를 대속물로 주어, 자기 백성들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셨다. 그러나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는, 영광가운데 심판의 주로 오신다. 그 때는 나귀새끼를 타지 않고, 백마 타고 오신다(계19:11-16).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오셨음을 생각하면서, 사랑의 예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자. 

2. 경배를 받으신 예수님(36-38).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가실 때,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기 시작했다. 

(행14장)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곳에서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일으켜서 걷게 했다. 그러자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에게 제사하면서, 그에게 경배하려고 했다. 

그 때 바울은 급히, 자기의 옷을 찢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을 말렸다. 사람은 결코 경배를 받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받으면, 우상이요, 이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경배를 조금도 금하지 않고, 그들의 경배를 그대로 받으셨다. 

왜 천주교가 잘못되었는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경배와 찬양을 받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훌륭한 분이지만, 사람이기에 경배와 찬양을 받아서는 안 된다. 천사도 경배와 찬양을 받을 수 없다(계22:8-9).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온 백성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이기에 받으셨다. 

그런데 (왕하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이처럼 왕이 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펴는 행위가, 오래된 관습이었다. 이는 왕에게 절대 복종하겠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였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그만큼 왕이신 예수님의 나라가, 그 곳에 임하게 되리라는, 큰 기대를 가졌다.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감람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벳바게와 베다니가 위치하고, 서쪽에는 예루살렘이 있다. 감람 산에 오르면, 예루살렘 쪽으로 내리막길이다. 

예루살렘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예수님을 호위하고 있는 자들의 마음은, 자연히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 동안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귀신들을 쫓아내고, 죽은 자들도 살리셨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는데도, 다시 살아났다. 

아마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 곳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동안 자기들이 본,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아마도 제자들이 먼저 선창하고, 그 곳에 따르는 자들이, 다 함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왕이시라는 뜻이다. 계속해서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찬양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은 땅에서의 평화를 노래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하늘에서의 평화를 노래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없다. 로마 군인들에게 짓밟혔기에, 예수님이 그들을 물리치고, 평화를 주시기를 기대했다. 

그들은 예루살렘 땅에 평화가 있을 때, 비로소 하늘에도,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그 결과, 하늘에 영광이 가득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경배하면서 찬송했다. 하늘의 평화와 영광을 노래했다. 예수님은 만 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러기에 세세토록,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모든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받으셔야 할 분이다(계5:13-14). 우리 모두 예수님께 경배하며, 모든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리자.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서도, 세세토록 경배하며,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리자! 

3.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39-40). 

이 세상의 왕들도,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을 심판한다. 하물며 만 왕의 왕이며, 만 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예수님은 온 천하만국과 백성을,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셨다. 

(요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처럼 예수님은,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셨다.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여겼다. 그렇다고 지금 열광하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예수님만이 열광하는 무리는,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예수님께 왔다.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속으로는 증오심을 불타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불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여겨, 그들을 책망하라고 했다. 

그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만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대신하여, 돌과 같은 자연도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찬양하며 경배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더 깊은 뜻이 있다. 지금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을 말씀하셨다. 먼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되었다. 그 뒤로 유대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이 침묵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의 침묵은, 급기야 다른 소리로 나왔다. (눅23:21) "그들은 소리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눅23: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와 같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그 뒤에 그들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도, 구원받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 침묵은 오늘날까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나라에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을 경배하지 않고 있다. 침묵한 결과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였다. 만일 예루살렘이 침묵하면, 돌들이 예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심판에 관한 말씀이다. 

구약성경 하박국서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합2:11-12)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갈대아 사람들, 곧 바벨론에게 내려질,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피로 성읍을 건설하고, 불의로 성을 건축했다. 사람들을 죽이며, 약탈한 것으로, 성읍들을 지었다. 따라서 그들이 성벽을 쌓는데 사용한 돌들은, 한 마디로 죄악의 상징이었다. 계속 그 돌들이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죄악을 성토했다. 그 결과 바벨론은,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다. 돌들이 부르짖으면서, 바벨론의 죄악을 드러내었던 것같이, 돌들은 소리지르며, 예루살렘의 침묵과, 불신앙을 성토할 것이다. 그 결과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 멸망한 것처럼, 예루살렘도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는 본문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침묵하고,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을 아셨다.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을, 자신이 심판주가 되시기에 아셨다. (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지금은 온 예루살렘이 환호하고 있지만, 곧 침묵할 것이다. 곧이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비통하신 심정으로 우셨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정치적인 로마와의 평화가 아니다. 영적 평화, 곧 하나님과의 평화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결국 예루살렘에 심판의 날 멸망의 날이 이르렀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원수의 나라, 로마군인들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예수님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그대로 성취된다. 그때 로마군은 4가지를 행했다. (1) 토둔을 쌓았다. (2) 예루살렘을 둘러 포위하고, 사면으로 가두었다. (3)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학살했다. (4)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았다. 

예루살렘이 침묵하며,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내렸다. 그 때 예루살렘의 돌들은 소리 지르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침묵과, 그들의 불신앙을 크게 성토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살피시며, 그 곳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침묵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 결과 심판 받고 말았다. 우리도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른다. 따라서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기쁨으로 경배하자.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즐겁게 받으며 살자. 그래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예수님께, 늘 칭찬을 받으며, 상급 받는 우리 모두가 되자!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신다. 따라서 그 분께 순종하자. 만왕의 왕이 되신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진정한 평화를 주신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돌들이 소리치는 심판에 처하게 됨을 알고,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열심히 전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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