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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롬 9: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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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롬 9:19-33)


오늘 본문 30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한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처음 쓴 글이 아닙니다. 이미 같은 9장 14절에서 쓴 글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그 글을 쓴 전후 맥락은 이러 했습니다. 그는 먼저 6-7절에서 말하기를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참 백성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서는 것은 전적으로 택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께 달렸다고(11절) 설명한 후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는 물음에 이어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되묻고는 곧바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한 바 있습니다. 그 후에 덧붙인 사도 바울의 논리는 아주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다 죄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택하여 다시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삼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택하시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불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해 우리가 할 말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옳고 선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우리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상 이전의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먼저 19-20절을 봅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사도 바울은 본문의 첫 절부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사실은 사람이 감히 반문조차 할 수 없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토기장이와 그가 그릇 만드는 데 사용하는 진흙 한 덩어리 사이의 비유는 사실은 단순히 능동체와 피동체 사이의 관계를 훨씬 넘어서는 하나님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의 무한한 차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세우시는 일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먼저 강조한 사도 바울은 그러나 곧바로 하나님께서 그 절대주권을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에 은혜롭게 사용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본문 21-24절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사도 바울이 여기서 본래 토기장이의 의도 속에서의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은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비유를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차별 없이 모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용과 풍성하신 영광의 대상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말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근본이 다르지 않고 다 한 진흙덩어리에서 토기장이가 만드는 것으로 사도 바울이 비유했음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밖에서 누구를 구원하실지라도 우리가 감히 할 무슨 말이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어도 그 가운데서도 또 믿는 자를 일으켜 세우신다 한들 우리가 감히 무슨 말 한 마디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강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있고 유대인 중에서도 믿는 이들로 남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호세아와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본문 25-29절입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렇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민족적 배경과 상관없이 하나의 새 백성으로 불러 모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성으로 보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셨지만 그의 새 백성은 유대인뿐 아니라 출생이 이방인인 사람들로도 구성된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는 것은 국적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사도 바울은 거듭 밝히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사도 바울이 다시 한 번 물은 것이 본문 30절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지금까지 반복해온 그 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오직 믿음에 의한 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키는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은 마치 돌에 부딪치고 걸려 넘어짐과 같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율법의 요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시고 사람들에게는 그를 믿는 믿음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한 믿음을 배격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에 이르는 데서 배제되게 되었음이 사도 바울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고 율법을 행할 줄도 몰랐던 이방인들에게 믿음을 주시며 그 믿음을 의로 여겨주시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끄러운 삶에서 영광의 삶으로 옮겨가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30-33절을 다시 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고마운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입니까? 이 얼마나 은혜로운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까? 이 하나님의 주권행사에 대해 우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감사할 것밖에 뭐가 있겠습니까? 돌덩이같이 완악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쇠뭉치처럼 강퍅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저 진흙덩어리에 불과한 우리를 오랫동안 참으시며 관용으로 빚으셔서 오늘날 우리들 각자와 같은 멋진 인생을 만드시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습니다. 감히 입도 뻥끗 할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며 기회를 주시며 수단을 주시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교제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평생토록 감사하며 죽도록 충성하는 것밖에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이 한 없는 은혜, 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 나아가 힘껏 전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행할 가장 귀하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더 이상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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