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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다 이루었다 (요 19: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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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요 19:17-30)  
 
 
1. 최근 동남권 신공항 부지 선정 심사결과, 밀양과 가덕도 둘 다 부적합 결정을 내리면서 현 정부는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과학비즈니스벨트문제도 충청권과 대구, 광주가 서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런 국책사업들을 결정하는 것은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몹시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갈수록 정부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저는 때로 목회, 어떻게 해야할까? 전도,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고민을 합니다. 
여러분도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나? 자녀교육을 어떻게 해야할까? 직장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등 일상생활에서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고민의 해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모범답안이십니다. 
예수님처럼 살면 됩니다. 예수님처럼 행동하면 됩니다. 예수님처럼 결정하면 됩니다. 막연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신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각, 행동, 가치관, 삶의 자세는 완벽합니다. 

2. 오늘 말씀 30절에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온전히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을 때 후회를 많이 합니다. 
‘좀 더 잘 할 걸. 좀 더 열심히 살 걸. 좀 더 잘해 줄 걸.’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라는 흘러간 옛 노래처럼, 우리는 죽을 때까지 미완성입니다. 부족한 게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17절 말씀처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인류를 살리셨습니다. 
해골 골짜기란 뜻을 지닌 골고다, 라틴어로는 갈보리,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해 높이 달리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여수 애양원의 한센병환자들을 돌보다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은 1934년 그의 나이 32세 때, <십자가 생활에 불충한 나를 위하여> 라는 글을 썼습니다. 
“행복하여지기를 원하면서 의를 위하여 신고(辛苦) 당하기를 꺼리는 자, 땀도 흘리지 않고, 눈물도 뿌리지 않고, 피도 쏟지 않고, 그러나 많은 행복을 절탐(切貪)하는 어리석은 이를 많이 만나는 중 그 중에도 나는 첫째로 꼽히는 자인가 한다... 세인(世人)이 체험치 못하는 진정한 부귀영화의 안락(安樂)은 고난 역경에서 기쁜 찬송을 부르는 자가 아니겠느냐..... 빈(貧)은 애처(愛妻)로 삼고, 고(苦)를 선생으로 삼고, 자연은 친구로 삼는 생활에 진정 미(味)의 쾌락을 직감하리라.”
(이광일, 손양원목사의 생애와 사상, p.39-40)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쓰디쓴 고난을 당하여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행복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진정한 삶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죽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삽니다. 자녀를 향한 내 욕심이 죽어야 자녀가 행복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 자랑이 죽어야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내 주장이 죽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고전15;31-32)
바울사도는 자기를 적대시하는 원수들과 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냥 자기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자랑입니다. 날마다 죽는 것, 다시 말하여, 날마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기 주장, 자기 고집, 자기 이해타산을 내려놓는 것, 이것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주님을 위하여 제 교만이 죽고, 제 고집이 죽도록 도와주옵소서. 
주님 때문에 손해보고, 주님 때문에 바보되고, 주님 때문에 내가 죽게 하옵소서.”


3. 예수님처럼 뭔가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은 수치와 모욕, 그리고 고통이 반드시 따릅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흉악한 범죄자 두 사람이 달린 십자가 사이 중간입니다. 
예수님은 흉악한 범죄자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다 벗겨졌고, 속옷도 벗겨졌습니다. 발가벗긴채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골고다언덕은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운 곳인데다가, 이 날은 유월절 명절 하루 전 날이라, 전세계에서 몰려든 유대인들이 지나가면서 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관을 쓰셨고, 온 얼굴은 피투성이고, 양손과 양발에는 큰 못이 박혀서 손발에 피가 계속 흘러 나옵니다. 손이 찢어지고 발이 갈라집니다. 이 고통은 말로 표현 못합니다. 당시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매달려 피와 물을 다 쏟으시니 목이 탑니다. 
“내가 목마르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십자가 아래, 아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슬피 울고 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의 이모, 그리고 그를 따르던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자식의 죽음을 지켜보는 어머니, 그 아픔과 슬픔을 내려다 보는 아들 예수님, 
주님의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게다가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죄인이 되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고통,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영적 고통은 더더욱 컸을 것입니다. 

이런 수치와 모욕, 고통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런 것들을 잘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시 삼도수군통제사, 요즘 용어로 해군참모총장을 하면서 왜구를 제압하였지만, 원균의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박탈당하고 중앙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순신은 백의종군하여 다시 나라를 살리려 뛰어듭니다. 해군참모총장이 이등병이 되어 다시 입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오직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하여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다 감수한 점입니다.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키우기 위해 펩시콜라의 사장인 존 스컬리를 영입하여 CEO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2년도 채 되지 않아 잡스와 스컬리 사이의 불화로 잡스가 스컬리에 의해 쫓겨납니다.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 이런 수모를 겪고도 12년 후에 다시 애플의 CEO로 돌아왔습니다. 

옳은 길, 바른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수치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영웅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입니다. 


4.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생은 누구나 미완성입니다. 

십자가 지는 것, 수치와 모욕과 고통을 견뎌내는 것,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헬라어 원어에는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테텔레스타이”
이 단어는 세 가지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① 종들이 사용하는 말로, 주인이 명령하시는 일을 다 완수했다는 뜻입니다. 
② 화가들이 사용하는 말로, 작품을 완성했다는 뜻입니다. 
③ 상인들이 사용하는 말로,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일을 다 완수하셨습니다. 그래서, ‘테텔레스타이’ 라고 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피값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다 갚아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부족을, 우리의 허물을,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께서 갚아주셨고, 채워주셨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서울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님이신 고 옥한흠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이름 옥한흠을 ‘한없이 흠이 많은 사람’ 이라고 풀어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목말라 사모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호가 은보(恩步)입니다. 은혜의 발걸음이란 뜻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사는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을 채워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담당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테텔레스타이,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셔야 합니다. 


5.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이것을 히브리 즉 아람어와 로마 즉 라틴어와 헬라어로 썼습니다. 당시 세계공용어에 해당하는 것이 헬라어였습니다. 라틴어는 세계를 다스리는 나라 로마제국이 사용하던 언어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보면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아이러니가 담겨 있습니다. 죄수인 예수님이 왕이라는 역설입니다. 
실패자 예수, 죄수 예수, 보잘 것 없는 예수, 수치와 모욕을 당한 예수, 
그가 왕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적으로는 실패자요, 보잘것없고, 수치와 모욕을 당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마지막 외침은 승리의 함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적으로 별로 알려져있지 않는 사람일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존귀한 분들이요, 위대한 존재들이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왕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고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부족하고 넘어지고 실수하더라도, 채우시고 회복시키시고, 이루어주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주님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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