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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벗, 하나님의 원수 (약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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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벗, 하나님의 원수 (약 4:1-10) 
 
 
오늘은 하나님과 원수 된 삶, 그리고 하나님과 벗된 삶에 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3장 마지막에서 강조되었듯이 성도의 공동체는 ‘화평’이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의 수신자들은 “싸움”과 “다툼”이라는 단어로 묘사될 수 있는 정반대의 상황에 있었습니다(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 세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나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묘사될지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너희 중에” 싸움과 다툼이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세상처럼 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고 있노라고 포장하며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아무런 예외를 두지 않고, 교회 중의 싸움과 다툼의 근원은 “정욕”이라고 밝힙니다.

“정욕”(헤도논)이라는 단어는 원래 달콤하다는 뜻에서 오감을 즐겁게 하는 것, 쾌락을 주는 것, 쾌락의 추구로 뜻이 발전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만족을 위해 선악과를 따먹은 일이 정욕에 해당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자연인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2절은 자기만족을 위한 치열한 추구를 “욕심” “살인” “시기” “다투고 싸우는” 등의 살벌한 단어로 묘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지 못하고” “취하지 못”하는 서글픈 결과를 동시에 말합니다(2a). 얻고자 하는 것은 제한이 되어 있는데 얻고자 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이겠지요.

욕심, 살인, 시기, 다툼, 싸움으로 자기만족을 잠시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성도가 원하는 바를 얻는 정당한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기도라는 은혜의 방편을 주셨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 11:9)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2b). 서로 자기만족을 위해 다투면서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오늘날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이 사용되지 않을수록 교회는 세상의 방편을 도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회의 축소판이나 사회보다 더한 곳이 되어버리지요. 구하지 않는 것만이 문제라면 기도하는 곳에는 다툼이 그치고 화평이 임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기도로 힘을 얻어 더 열정적으로 다투는 현장도 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3). 1절의 “정욕”이라는 말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은혜의 방편입니다. 세상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필요한 것들을 구한 도구가 기도입니다. 또한 자신의 원하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 자기를 부인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먼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며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은 진실한 자기 소원을 아뢰셨습니다.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게 만족을 주지 못할지라도 순복하기 위한 수단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성도의 제 일 단계 원칙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아무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마 16:24).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만족이나 자기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갈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정욕”이 부인되기는커녕 기도를 통해 오히려 정욕이 강화되었습니다. 세상적인 방식으로 도무지 자기만족을 얻을 수 없으니까 기도를 통해서라도 얻으려고 하는 모습이지요.

이런 기도자에 대해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4a)이라는 충격적 호칭을 사용합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방 풍속을 따라가는 이스라엘을 ‘음녀’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야고보는 성도라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자들을 음녀로 부릅니다. 거룩한 은혜의 방편조차 세속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는 것 같지요.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성도가 정욕에 쓰려고 기도하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입니다. 둘 모두 교회를 세상처럼 만들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성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란 정말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이 첫 번째 전략이 성도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 좀 더 교묘한 두 번째 전략은 기도하는 성도로 하여금 정욕에 쓰기 위해 기도하도록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뜻하는 것이며,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4b). 세상과 어느 정도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여지를 전혀 남겨 두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충격적이고 극단적인 표현들을 사용할까요? 5절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전하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지극함이지요. 신약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했습니다(고후 11:2). 신부가 신랑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늘 다른 남정네를 갈망한다면 사랑이 넘치는 여인이라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로서 남편에 대한 최대의 사악함이 되겠지요. 따라서 야고보는 이 세상 쾌락도 적당히 즐기면서 하나님의 벗으로 남으려고 하는 태도를 간음녀가 정부와 놀아나면서 남편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사단이 교회를 타락시키는 효과적인 무기 중의 하나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었던 자기만족을 신앙을 이용해서 얻을 수 있다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만으로는 성공하고 성취하기에 부족해서 기도라는 방법으로 보충하려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교회는 교묘하고도 급속하게 세속화 될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다른 종교인의 기도 내용과 같다면 이미 세속화된 것이지요. 성도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도 좋지만 이 세상 것에 있어서도 남보다 뛰어나거나 최소한 남보다 못하지는 않아야 된다는 생각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간음녀의 태도임을 깨닫고 단호히 돌아서야 합니다.

“간음한 여자들”을 용서치 않을 것 같던 야고보는 6절에서 갑자기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6; 잠 3:34). 구약에서 간음녀는 돌아 맞아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간음녀 같은 이스라엘을 길이 참으시고 끊임없이 돌아오도록 호소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용서하시는 사랑을 이용해서 ‘이 세상과 즐겨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는 않겠군’하며 더욱 뻔뻔하게 세상으로 향합니다. 반면 겸손한 자는 ‘주님! 제가 바로 간음한 여인입니다’라고 실토하며 그 은혜에 감복하여 돌아섭니다.

7-10절은 10가지 명령들이 연속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가르치는 동시에 은혜 받은 자에게 순종을 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지요. 이 명령들은 하나님과의 벗된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율법이 아니고 이미 받은 은혜로부터 더 큰 은혜로 나아가도록 하는 복음의 은혜에 기초해 있습니다. 심각한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더 큰 은혜를 받는 겸손한 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종류별로 묶으면 첫째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와 “마귀를 대적하라”입니다. 그러면 유혹자 마귀가 “너희를 피하리라”는 약속이 있지요(7).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성도는 더 이상 유혹을 이길 수 없다고 변명할 것이 아니라 이 약속을 믿고 다시금 하나님께 순복하며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입니다.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8a). 성도는 순간순간 세상으로 향하는 관심을 돌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적극적인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부지런히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해야 하겠지요. 

셋째는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입니다(8b). 하나님께 얼마동안 충성하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의 세상 정욕이, 외적인 삶뿐만 아니라 마음에조차 깨끗하게 청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성실히 살다보니 성공하고 성취했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은근히 라도 세상 출세를 갈망하는 마음은 없애야 합니다. 네 번째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와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입니다. 진지한 회개와 함께, 이전에 웃고 즐겼던 세상 쾌락을 애통과 근심으로 여길 만큼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상의 아홉 가지 명령은 “주 앞에서 낮추라”는 명령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는 약속은 ‘겸손하면 드디어 세상에서 높여주시겠구나’라며 정욕을 지지하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 정욕을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도의 최종 상태가 높여지는 것임을 알고 짧은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그분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밖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원수가 있음을 말합니다. 벗 아니면 원수라는 것이 너무나 타협의 여지가 없는 극단적 주장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자체가 가르치고 있는 바임을 주목하면서 우리의 옷깃을 여밀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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