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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이 청결한 사람 (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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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사람 (마 5:8)

  
봄철을 맞아 한강 여러 곳에서 “한강 수중 오물 수거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다이빙 자격증을 가진 자원봉사자들이 헌신적으로 큰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대회를 통해서 건져낸 쓰레기들은 그 종류가 100여 가지가 넘었습니다. 깨진 유리병, 페트병, 폐타이어, 그리고 자전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게다가 냉장고 TV와 같은 가전제품들과 소파와 탁자 같은 가구들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 나왔습니다.

이 대회에 참여했던 한 청소년 다이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한강이 이렇게 더러운 줄 정말 몰랐습니다. 한강 바닥이 온통 쓰레기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한강은 그저 맑고 푸른 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온 뒤 가끔 탁한 물이 흐르긴 해도 한강은 그래도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깊이 잠수해서 들여다보면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들이 여기 저기 널브러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깨끗해 보이고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더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들도 그 안에 가득 차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사람들은 그 눈이 멀어있어서 마음속에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보지 못합니다. 마치 한강을 바라볼 때 그 속에 가라앉아있는 쓰레기들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척하며 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깨끗한 사람인 줄 착각하며 삽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십니다. 삼상 1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죄, 허물, 악한 것, 쓰레기 같은 것들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정확하게 분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잘못되면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잘못되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그 인생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참된 복의 여부는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마음이 청결할 때 그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것으로서 진정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우선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사용된 청결하다는 뜻의 헬라어 원어는 “카다로스” (Katharos)입니다. 이 말은 보통 키질하고 채로 쳐서 모든 겨를 깨끗이 제거해 버린 곡식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또 불평하고 비겁하며 기꺼이 따르지 않고 무능력한 군인들을 빼버린 정예의 군대를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비혼합, 비화합, 비합금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마음 즉 순수한 마음을 말합니다. 

저 깊은 산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은 아직 아무 것도 섞이지 않아 맑고 깨끗합니다. 그러나 마을 근처를 지나며 이것저것이 섞입니다. 생활 오수가 섞입니다. 축산 폐수가 섞입니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들이 합류합니다. 점점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결국 탁류가 돼 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만나며 세상살이에 떠밀리며 이런 저런 것들이 섞입니다. 욕심이 섞입니다. 허영이 섞입니다. 거짓이 더해집니다. 점점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결국 그 마음이 탁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왕하 14:3-4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대로 다 행하였어도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유다왕 아마샤에 대한 평가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당을 그대로 두어서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도 그대로 용납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겉으로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섬기는 것은 같아 보일 지라도 그 마음이 청결한지 그렇지 않은지가 다른 것입니다.

선거철이 다가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최근 뉴스를 보니 대권 출마를 선언한 모 정치인이 주일마다 대형교회를 순회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 사찰도 순회하며 불공을 드릴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예배를 왜 드릴까요? 물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도 없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분이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함이요, 결국 표를 의식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청결치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려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또한 사람 앞에서 그 마음이 청결치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마 23:27-28을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저들이 사람들 앞에서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사람 또는 위선자를 영어 성경을 보면 “두 얼굴을 가진 사람”(a double-faced man)이라고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한 얼굴을 가진 사람”(the single-faced man)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늘 같은 얼굴을 하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얼굴이 못 생겼지만 자신의 못생긴 외모를 유머의 소재로 삼곤 했습니다.

한번은 의회에서 한 야당의원으로부터 이렇게 비난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요." 링컨은 정말 억울했습니다. 나름대로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받아쳤습니다.

"만일 나한테 두 얼굴이 있었다면 왜 이런 중요한 자리에 하필 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설 때 그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되고 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을 청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힘으로는 우리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힘으로도 능으로도 될 수 없습니다.

사실 많은 종교가 그 마음을 정화해 보려고 갖가지 영적인 노력을 기울여 봅니다. 불교가 참선을 행합니다. 힌두교가 요가와 같은 극기를 행합니다. 일부 효과가 있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한 마디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롬 1:4를 보면 성령을 “성결의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결하게 변화시켜주시는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살후 2: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겔 36:2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심령 속에 두셔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부분적으로 깨끗하게 바꾸어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철저하게 청결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 성결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도움을 얻으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딤전 4:3이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될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마음이 청결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이 많아 이런 저런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듣는 것이 많아 또 이런 저런 생각이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런 와중에 사탄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우리를 미혹하고 또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생각이 정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면서 마음이 단순하게 갈피를 잡게 됩니다. 이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우리 마음을 굳건하게 붙잡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 지게 됩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게 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는 참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거대한 몸집의 포악한 악어가 22센티 작은 몸집의 새 앞에서 순한 양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악어새가 악어의 입안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입안을 청소해 줍니다. 악어는 한 입에 악어새를 잡아먹을 수도 있지만 악어새가 일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립니다. 

기도는 마치 이와 같습니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맡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다 맡겨드리고 다만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해 주십니다. 복잡한 우리의 마음은 기도 중에 정리가 되고 청결하게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감추셨습니다. 특히 출 19:21을 보면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하나님을 보려고 하다가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하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대표로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체결하셨습니다. 그 때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불과 연기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궁금했을까요? 하나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아마도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뛰어나가 강림하신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고 싶어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여주시지 않으셨고 심지어 보려고 하다가 죽을 것이라고까지 엄히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보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의도와 욕망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이시지 않으시지만 마음이 청결하게 된 자들에게는 저절로 하나님이 보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의 에세이 가운데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시인이 아름다운 시를 쓸 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어령씨는 구체적으로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강촌에 온갖 꽃이 먼빛에 더욱 좋다” 봄이 와서 강촌에 꽃이 만발했는데 시인이 강에 배를 띄어놓고 먼발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때, 자연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게 되고,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령씨는 다른 시각 하나를 소개합니다. 도끼를 든 나무꾼과 호미를 든 약초꾼입니다. 같은 강촌을 바라볼 때 도끼를 든 나무꾼은 좋은 목재를 찾으려는 시각으로, 또 호미를 든 약초꾼은 쓸 만한 약초를 찾으려는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이 때 나무꾼과 약초꾼은 사물을 노려보게 됩니다. 물끄러미 보는 시각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은 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게 되고 나무꾼과 약초꾼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되고 더더욱 자연의 아름다움은 결코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수필의 내용은 오늘의 본문과 관련해서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여기서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은 아무런 욕심 없이 그야말로 청결한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욕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했던 예루살렘 거민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는 간절한 바람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정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청결해 지면 하나님이 저절로 보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이 보이고, 우리의 삶 속에 동행하시는 주님이 보이고, 예배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주님이 보입니다. 이것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복잡한 것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버릴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진실하고 순수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결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 또 기도함으로 성령의 도움을 구체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 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 지면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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