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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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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막 10:35-45) 


(막10:35-4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 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 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1. 아브라함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고향 하란을 떠난 지 10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큰 민족’을 이룰 수 있도록 아들을 낳으리라고 수차례에 걸쳐 약속을 확인해주셨습니다.(창12:7,13:15-16,15: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내 사라의 나이도 적지 않은 나이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조바심으로 갈등이 심각해졌습니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제안합니다. “(창16:2)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 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시오.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했기 때문에 주저없이 아내의 말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으리라고 약속하셨지만, 지난 10년 동안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도 감감무소식이니 다른 방법을 모색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여 바로 왕의 첩이 될 뻔했던 사건) 애굽 왕 바로에게서 선물로 받았던 노비들 중의 한 사람인 하갈과 동침해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족장이나 부호(富豪)와 같은 상류 계층에선 부부간에 자식이 없을 경우, 아내가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후손를 보도록 하는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경우 태어난 아기는 여종이 아니라 아내에게 속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라의 행동은 당시의 생활 습속을 따른 어쩌면 자연스런 행위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지 않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일을 저질러 결국 큰 비극의 전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극은 하갈이 비록 노예지만 한 인격체로 보기 보다는 ‘씨받이’이라는 생산 수단으로만 대했다는 실수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종이 주인의 재산이긴 하지만 그의 생명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고귀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엡 6:9). 

더욱 중대한 실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실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그 성취 방법에만 몰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방법과 잔꾀로 성취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1) 바로 이러한 것이 인간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이루어가십니다. 그런데 감히 인간이 그 약속을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방법대로 이루려고 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하여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갈은 주인의 자식을 잉태하게 된 것을 알고 교만하여 자기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라는 일개 여종에 지나지 않는 하갈로부터 받은 멸시에 견딜 수 없어 남편의 책임이라며 몰아세웁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이 잉태했다고 해서 하갈을 편애하기 때문에 겁도 없이 여주인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당신의 여종을 다스릴 권한이 당신에게 있으니 당신이 좋을 대로 하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 때부터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자 하갈이 도망해버렸습니다. 

결국 하갈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16:12) 네 아들은 들나귀와 같은 생활을 할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은 그를 칠 것이며 그는 적개심을 품고 자기 형제들과 동떨어져 살 것이니라.” 이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에 서로 적개심을 품고 동떨어져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불행한 일들이 바로 인간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먹게 되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미혹되어 금단의 열매를 먹고 결국 에덴 동산에 추방되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인류 최초의 죄악은 ‘교만 죄’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이처럼 자신을 높이는(to be high, exalted, rise) 마음이나 그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잠 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교만은 그 뿌리가 깊은 만큼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죄악입니다. 교만은 그 죄질이 아주 나쁜 죄악입니다. 그래서 지혜서인 잠언에서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잠 16:18, 18:12) 하나님은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돌보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십니다.(시138:6) 그러므로 교만한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삼상 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이 그의 교만으로 멸망당하게 될 것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14:12-15) 웬일이냐, 너, 아침의 아들, 새벽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아 맥도 못추게 하던 네가, 통나무처럼 찍혀서 땅바닥에 나뒹굴다니! 네가 평소에 늘 장담하더니 '내가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두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산 위에, 신들이 모여 있는 그 산 위에 자리잡고 앉겠다. 내가 저 구름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 하더니, 그렇게 말하던 네가 스올로, 땅 밑 구덩이에서도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구나. 

“아침의 아들, 새벽별”은 당대 열국을 압도했던 바벨론 제국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민족들을 짓밟아 맥도 못추게 하던” 그 바벨론 제국이 “통나무처럼 찍혀서 땅바닥에 나뒹굴게 된다. 스올, 땅 밑 구덩이에서도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벨론이 몰락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 사람 아담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려는 교만, 하늘 끝까지 높아져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던 인간의 교만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만한 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14:19)  너는 무덤도 없이 오물처럼 버려져, 칼에 찔려 죽은 군인들의 시체 더미 밑에 깔려 있다가, 지하 세계의 밑바닥으로 내려갈 것이다. 너의 시체를 사람들이 짓밟을 것이다.

“교만한 자가 낮아지고 거만한 자의 콧대가 꺾이며 여호와께서만 높임을 받을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 날에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교만하고 거만하며 자만하는 자들을 모조리 낮추실 것입니다.”(사2:10-11)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면 그가 우리를 높이시겠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느니라.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주느니라.”(사57:15-16)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항상 자기 낮추어 겸손한 생활로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며 항상 함께 하시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열 두 제자들에게 자기가 앞으로 당할 일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10:33-34)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거기서 내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손에 넘어갈 것이니라. 그들은 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이방인들은 나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라. 그러나 나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이때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와서 부탁합니다. ‘선생님, 저희들의 소원을 좀 들어주십시오.’ 예수께서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자 ‘우리를 주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도다. 내가 마셔야 할 고난의 쓴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아야 할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느냐?”라고 되물으시자, ‘고난의 쓴 잔’, ‘받아야 할 세례’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예, 할 수 있습니다.’며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두 제자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든 못하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10:39)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니라. 그러나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사람들의 것이니라.”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한 자리 부탁하는 것을 듣고 있던 10 제자들이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막10:42-45) 너희가 아는 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느니라.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느니라.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처음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며 베드로와 더불어 특히 예수님의 신임을 받은 제자였습니다. 또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막16:1)는 마리아와 자매간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였는지(혈육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이종사촌지간) 이들 두 제자들이 예수께 부탁한 것은 왕 우편과 좌편이라는 영광스럽고 가장 권세있는 높은 자리였습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을 기존의 모든 왕권들을 무너뜨리시고 영광스러운 왕의 보좌에 앉는 것으로 잔뜩 기대했었던 것입니다. 

옛 선지자들이 수천년 동안 예언해왔던 메시야, 이스라엘을 새롭게 구원하시고 통치하실 메시야로 여기고 그의 통치가 임박한 것으로 판단해서 예수께 미리 ‘높은 자리 하나’를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두 제자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며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도다. 내가 마셔야 할 고난의 쓴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아야 할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느냐?”라고 되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기대하고 있던 제자들이기 때문에, 아니 영광에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고난의 쓴 잔’, ‘받아야 할 세례’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예, 할 수 있습니다.’며 자신있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때 야고보 형제는 그들이 구한 우편과 좌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좌우편은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의 자리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바라보면서 행진 하시는데, 저들은 왕의 보좌 좌우편 자리만을 눈독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도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 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헤사(Helper)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해주시는 것입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고난의 쓴 잔’, ‘받아야 할 세례’는 조만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실 고난과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이 두 제자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깨닫지 못하고, “예, 할 수 있습니다.” 며 자신감있게 대답했지만, 이 야고보 형제들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참 뜻도 이해하게 되고 또 그 뜻대로 고난의 쓴 잔을 마시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막10:39)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미리 그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기독교 초기에 순교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10년째 되는 해에 헤롯에 의해 칼에 베어 순교했습니다. 

(행12:1-2)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그리고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 때 밧모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계시록을 기록하고 100세가 되어 죽었습니다. 순교만이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지 섬에서 보낸 고난의 생애 역시 고난의 잔을 마신 것이었습니다.


3. 야고보와 요한 이 둘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와 혈연관계에 있다할지라도,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에게 있어 야고보와 요한의 ‘지극히 높은 자리’ 청탁은 몹시 심기가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좋은 자리를 두 형제가 독점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까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입니다. 이를 보신 예수께서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리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느니라.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느니라.” 세상은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 낮은 자들 위에 군림하여 세도를 부릴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교회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 질서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리는 것이 통례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전혀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느니라.” 고 말씀하시므로 제자들의 스승이신 예수께서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철저히 섬기는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생명까지 바쳐 인류를 섬기시고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마저 인간의 죄값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람의 종으로 오신 목적, 섬김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류 구원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최고의 모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최고의 겸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빌립보서 2:5-8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본문 45절,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는 말씀에서 “대속물”(헬라어,‘뤼트론’,λ?τρον)이라는 단어는 “푼다.”(헬라어,‘루오’,λ?ω,to release, untie, unbind)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포로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속전(贖錢)을 지불하고 포로나 노예에서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는 것은 죄와 죽음의 노예상태에 있는 인류를 자유로운 생명으로 풀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사53:6)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은 죽으리라(창2:17)는 법을 정하셨습니다.(롬 6:23) 범죄한 인간이 살 수 있는 길은 죄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섬기시는 삶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제1세기에는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습니다. 너무나 초라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학문도 집안 배경도 없는 목수의 아들이 그나마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맥없이 죽었으니 그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미련하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초라함, 그 약함, 그 땀과 눈물과 피, 홍포에 쌓인 패배자 같은 그 예수가 곧 자기를 비우신 하나님, 낮은 데로 내려오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됨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자신을 낮추어 살 때,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삶을 살 때, 피차에 나음을 입게 됩니다.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는 겸손이 삶의 모든 문제들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이 지배구조가운데 있다 해도 자신을 낮추어 섬기며 사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낮은 데로 내려오셨을 뿐만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기 위해 사람의 노예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빌2:9-11)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잘 가르쳐 로마의 장군이나 국회의원격인 원로원 의원으로 진출시키거나, 식민지 관료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나 의회기관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말씀은, 베드로가 네가 장차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요21:19)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루지 못한 굴지의 재벌이 되거나 세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높은 곳을 향하셨다면 굳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그것들을 친히 담당하시고자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 예수께서 세상에서 한 자리 꿈꾸며 자리 다툼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왔노라 너희가 높고자 하면 그러면 섬기는 자가 되라 무릇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군림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복종하여 섬기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습니다. 더 존경받고, 더 높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더욱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14:7-11입니다.

(눅14:7-11)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기 전에는 세상에 말석에 앉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말석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허리가 낮은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지위에 계속 계실 수 있으신 분이, 죄의 노예 상태에서 신음하는 자들과 고통을 같이 나누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낮추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본받아야 하는 성도는 마땅히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처럼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종의 형체를 입고 자기를 낮추었을 때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마음을 가졌을 때 비로소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권력에 굴종하는 비굴함이 아니라, 진리에 복종하는 겸손함이며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동안, 세상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환난과 곤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믿고, 인내함으로써 끝까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적게 배운 사람을 막 대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마시고 눈높이를 낮추시기 바랍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작게 가신 사람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마시고 어깨 높이를 낮추어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과 단점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거나 공갈을 그치고 자신의 상전이 하늘에 계신 것을 깨닫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엡 6:9) 

특히 “(딤전 6: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겨 사랑받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잠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악입니다.” 크고자 하십니까? 으뜸이 되고자 하십니까? 섬기는 자가 되시고 모든 사람의 종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지만 동등됨을 취하지 말고 믿음을 겸한 사랑으로 섬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며 사는 삶으로 하나님께서 지극히 영광스럽게 높이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잠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약속의 말씀대로 행하여 “재물과 영광과 생명”의 풍성한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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