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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금과 그리스도인들...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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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그리스도인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저는 쓴 나물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저희 집사람이 고돌 빼기 김치를 담글 때면 쓴 맛이 다 빠져나가지 않게 하라고 당부하곤 합니다. 어느 권사님은 쓴 나물 좋아하는 제 입맛을 아시고 고돌빼기 김치를 일부러 담아다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고돌빼기 김치는 써야 제 맛이 납니다. 
소금에 절여서 물에 너무 오래 담가 놓으면 쓴맛이 다 빠져나가고 마는데 쓴 맛이 없어진 고돌빼기 김치는 정말 맹 맛입니다. 

쓰지 않은 고돌빼기 김치는 더 이상 고돌 빼기 김치가 아닌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그것만이 가지고 있는 톡특한 맛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맛은 상대방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설탕은 단맛을 가지고 있고 고추는 매운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탕에 단맛이 없으면 더 이상 설탕이 아닙니다. 매운맛이 없는 고추는 더 이상 고추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소금이니...” 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짠맛이 있습니다. 
왜 성도들을 가리켜서 단맛을 내는 사탕이라고 하지 않고 하필이면 짠맛을 가진 소금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소금이 지닌 짠맛의 기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소금의 짠맛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특이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기능입니다. 
소금 자체의 짠맛만 가지고는 재미스러운 느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음식물과 적당히 섞여질 때 그 소금의 맛은 더 이상 짠맛이 아닙니다. 
자신의 짠맛은 숨겨지고 음식물의 맛을 더 톡특하게 드러내줍니다. 자신을 희생시켜 다른 것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소금의 맛입니다.

소금이 음식물에 들어가 자신의 짠맛만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소금이 아닐 뿐 아니라 소금이라고 해도 가짜 소금입니다. 진짜 소금은 자신을 녹여서 다른 사람의 맛을 더 맛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2:3절에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고 했습니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 바로 소금의 맛입니다. 

둘째는 변질 방지 기능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을 맺을 때 소금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소금이 변질 즉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먹음으로 신실함과 변치 않는 우정을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민수기 18:19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변치 않는 하나님의 언약을 “소금 언약” 이라고 한것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에 변질이 오면 그때가 말세입니다. 세상의 악한 것에 오염되어서 신앙이 변질되면 더 이상 세상에 대하여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조미료 기능입니다. 
음식을 만들 때 각가지 온갖 양념을 다 넣었어도 소금이 빠지면 맛없는 음식이 되고 맙니다.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변변한 찬거리 없이 맨밥에 간장 찍어먹던 시절 말입니다. 그 때 우리들의 입맛을 돋구웠던 조미료가 바로 「미원」이었습니다. 그것만 넣으면 무엇이든지 맛이 있었습니다. 국에도 넣었고 찌개에도 넣었습니다. 맹물에 된장만 풀어 넣고 그것만 적당히 넣으면 맛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원보다 더 좋은 조미료는 바로 소금입니다. 조미료 같은 신자가 필요합니다.

넷째는 촉매 기능 대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취사를 위해 불을 피울 때 흔한 낙타 똥을 말려서 땔감으로 썼습니다. 그런데 불을 지피고 소금을 뿌리면 촉매역할을 해서 화력이 좋아지고 오래 탄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교회에 이런 소금이 필요합니다. 꺼져가는 불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촉매역할을 할 수 있는 소금과 같은 성도 말입니다.
레 6:12-13절에 보면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은 불의 제단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에서 언제나 타올라야할 불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의 불은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기도의 불 / 불이 있는 기도
찬양의 불 / 불이 있는 찬양
봉사의 불 / 불이 있는 봉사
전도의 불 / 불이 있는 전도 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불들이 활활 오르게 촉매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다섯째는 갈증 유발 기능이 있습니다. 
소금을 먹으면 갈증을 느낍니다. 그래서 소금이 된 성도들은 언제나 영적 갈증에 목말라 합니다. 생수의 근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맛 잃은 성도는 영적 갈급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악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예레미아 선지자는 렘2: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두 가지 죄악이 무엇입니까?

1) 생수의 근원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를 버림으로 생수가 말랐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악입니다. 요 7:38절에 보면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 라고 하셨습니다. 

2) 스스로 웅덩이를 팠습니다. 
스스로 생수를 얻겠다고 웅덩이를 팠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이방 종교를 의미합니다. 스스로 파는 웅덩이는 생수를 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터진 웅덩이 이기 때문입니다. 터진 웅덩이는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터진 웅덩이에서 갈증을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소금을 먹어야 합니다. 
즉 생수의 근원을 버린 사람들은 소금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갈증이 회복 될 것입니다. 
소금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영적 갈증이 생길 뿐 아니라 그 갈증을 채우는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면 보는 사람들이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될것입니다. 

여러분! 소금입니까? 

소금의 맛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행여 맛 잃은 소금은 아닙니까?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버리워 밟히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의 맛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칭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행 2:47절에 보면 성령 충만 받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말을 잘 살펴보면 성도들이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은 그 칭송으로 하나님을 찬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칭송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소금의 삶을 살면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칭송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칭송을 하나님께 돌려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의 삶을 삶으로서 불신자들로 하여금 칭찬받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로 인해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켜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을 깨닫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조효훈의「하나님의 휴가」라는 작은 책자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점심 시간, 서울 충정로의 한 붐비는 식당 문을 열고 한 ‘비구니’ 승려가 나타나 목탁을 치면서 시주를 요청했습니다. 이때 난데없이 그 식당의 여종업원이 "우리는 교회 믿어요!"라고 쏘아붙이며 비구니를 문밖으로 밀어 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승려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표정 하나 변함없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조효훈 목사는 그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손님들 모두에게 물어보아도 그 날 그 비구니가 교회 믿는다는(?) 종업원에게 이겼다고(?)했을 것이라고, 그 날 그 곳에서 크리스천과 교회의 체신이 땅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체신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소금이라고 하실 때 단서를 붙이신 것이 “세상에 대하여...” 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만의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만의 믿음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세상에 대하여 녹아지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소금은 

첫째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둘째는 변질 방지 기능이 있습니다. 
셋째는 조미료 기능이 있습니다. 
넷째는 촉매 기능이 있습니다. 
다섯째는 갈증 유발 기능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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