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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강한 손이 10가지 재앙으로 나타나다 (출 7:14 - 출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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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강한 손이 10가지 재앙으로 나타나다 (출 7:14 - 출 11:10) 
  
  
2011년은 교회 표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정하였고, 이 표어를 따라 복음의 내용을 무엇으로 담을 것인가에 대하여 계속 출애굽기를 통해 강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개인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하나님 나라를 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 나라의 왕을 말해야 하고, 그 왕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면 역시 필시 왕의 권세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전의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왕의 권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성경에는 옛 하나님 나라와 새 하나님 나라의 경영이 나타나 있습니다. 옛 하나님 나라는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한 나라입니다. 신약의 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그 나라 왕은 누구며, 어떤 권세를 가졌는지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전파의 내용에 이러한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지금 전해야 하는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 왕의 권세와 비교하여 신약의 하나님 나라 왕의 권세가 얼마나 더 크고 강한 것인지 나타내 증거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여호와의 강한 손의 권세는 일반 세계 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강한 나라의 왕이 가졌던 권세와 비교하면 그 힘과 능력을 비슷하게 말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바로 왕을 항복시키고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 아들의 권세는 이런 세상 나라의 권세와 다릅니다. 그가 가진 권세에 대하여 성경은 죄사함의 권세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세를 가진 왕은 인류 역사에 어느 누구도 없었습니다. 로마와 징기스칸의 원나라, 그리고 중국의 당나라이든지 이런 권세를 가진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의 내용에 담아야 할 것은 바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이 권세입니다. 

오늘 본문이 상대적으로 다른 주일보다 분량이 매우 많았지요? 이는 10가지 재앙을 하나씩 강론하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10재앙 전체를 보고 말씀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그럼 직접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출애굽기 문맥을 다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하여 세워진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애굽에 내려간 70인의 야곱 후손들이 씨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레위 지파의 아들인 모세를 불러 애굽 바로 왕에게 보내어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어 시내산에서 처음 세워졌습니다. 

모세에게 형 아론을 함께 하도록 하여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였다고 출애굽기 5장-6장이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가서 이스라엘을 내보내어 달라고 하자 바로 왕은 듣지 않고 도리어 이스라엘을 더 학대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는 모세에게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실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바로 그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구원하심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7장-1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 강한 손을 출애굽기는 어느 특정한 형식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킨 일이 그 뒤에 이어서 나오는 10가지 재앙과 전체적으로 한 세트가 된다고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10가지 재앙의 결정적인 재앙은 유월절 재앙으로 이 유월절로 말미암아 애굽 바로 왕이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전초전의 성격을 가진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성경에서 자주 되풀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여리고성 전투를 들었습니다. 여리고성의 승리는 나머지 모든 가나안 땅의 성읍을 차지하는 전투의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항상 이렇게 서론에 가까운 승리가 있고 이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전쟁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평양전쟁을 들 수가 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 말미암아 미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항복을 얻기까지 미국은 계속 일본의 본토까지 진격하며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와 같이 10재앙도 애굽을 융단폭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10재앙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냥 10재앙이 무엇이 있었는가를 아는 정도 그칩니다. 정작 모세가 10재앙을 기록한 의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10재앙을 전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세가 기록한 방식을 추적해 가면 모세의 기록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주보의 설교개요란에 써놓은 것처럼 10재앙을 9+1로 보았습니다. 이유는 앞의 9가지 재앙을 기록한 것과 10번째 재앙을 기록한 것이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게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이처럼 모세는 10번째의 재앙을 아주 특별하게 기록했습니다. 9가지 재앙에다 한 가지 더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9가지 재앙도 그냥 첫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 나열해서 보지 말아야 합니다. 9가지 재앙을 3+3+3=9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10재앙 전부를 수식으로 나타낸다면 (3+3+3)+1=10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3가지 재앙씩 동심원과 같이 반복되며 점차 확대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재앙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7:15절에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2번째, 3번째 재앙에는 나오지 않고, 4번째 재앙에 나옵니다. 8:20절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고 합니다. 이 말이 5번째, 6번째 재앙에는 나오지 않다가 다시 7번째 재앙에 나옵니다. 9:13절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8번째, 9번째 재앙에는 이런 말이 없어요. 그러면 왜 3재앙씩을 끊어 말하려고 하는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10재앙을 보시는데 또다른 기록방식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1번째, 2번째 재앙에는 애굽의 요술사들도 모세와 아론이 행하는 재앙에 맞섭니다. 그러다가 3번째 재앙에 때는 달라집니다. 8:18, 19절을 보십시다.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게 생긴지라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이렇게 3번째 재앙 때는 요술사들도 맞서서 대항하지 못하고 결국 여호와의 권능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는 태평양전쟁을 살펴보아도 같습니다. 비록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했더라도 육군과 해군력을 동원하여 미국과 맞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전세는 기울게 되고 많은 장수들을 전장에서 잃게 되고, 다른 장수들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게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3번째 재앙까지는 나일강을 시작으로 애굽의 모든 식탁에 그리고 애굽 온 땅으로 재앙이 확대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4째 재앙부터는 말이 바뀝니다. 어떤 식으로 바뀌냐면 애굽 땅 애굽 사람에게는 재앙이 내리지만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재앙이 내리지 않았다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즉 재앙을 내려도 여호와의 소유인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시켜 보호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8:22절을 보십시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이렇기 때문에 3번째 재앙과 4번째 재앙 사이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7번째 재앙을 보면 또다른 기록방식이 등장합니다. 우박 재앙을 내릴 때 9:14절을 보시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온 천하게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니” 그리고 9:18절에도 보면 “애굽 나라가 세워진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고 말합니다. 일찍이 애굽 땅에서 경험하지 못하였던 재앙이라고 반복하며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서 볼 때 3재앙씩 반복되면서 점점 더 강한 재앙으로 애굽을 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점 더 강한 재앙이 애굽에 임하는 가운데 10:7절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드디어 애굽의 신하들도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내리면 누가 굴복하겠습니다. 요술사들이 굴복했고 신하들이 굴복했습니다. 그럼 당연히 바로 왕이 항복할 차례입니다. 

이러한 순서는 거의 모든 나라의 전쟁역사를 살펴보면 거의 같게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양 나라의 대표적인 장수가 나와 일전을 벌입니다. 그러다 한 쪽이 패하게 되면 전세는 기울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곧바로 항복하지는 않습니다. 끝까지 대항하다가 많은 군사들을 거의 다 잃고 나서야 왕이 비로서 항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10재앙을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그냥 의미가 없는 10재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3재앙씩 점점 더 강하게 내리다가 마지막 10재앙 때는 결정적인 원 펀치를 먹여 상대를 KO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예로 든 태평양전쟁에서도 역시 같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미드웨이 해전 후 큰 전쟁의 승리를 과달카날 섬에서 미군을 얻습니다. 이 섬의 비행장에 관한 싸움입니다. 그런제 태평양전쟁 때 일본은 전술적인 면에서도 미국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이미 중일 전쟁을 치렀고 동남아시아에서도 전쟁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상대적으로 진주만 기습을 당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 들었으니 전술적인 면에서도 매우 약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약세를 과달카날 섬의 전투에서 뒤집어 버립니다. 미국이 전술적이 면에서도 일본을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미드웨이 해전은 해군력만의 싸움이라고 한다면 과달카날 섬의 전투는 육해공의 싸움이었습니다. 과달카날 섬이 전략의 요충지였는데 이 섬을 탈환함으로 비로서 미국은 확실한 공격적인 전술을 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달카날 섬을 일본이 빼앗긴 것은 애굽의 요술사들이 굴복한 것과 어쩌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많은 섬들을 빼앗기며 점점 후퇴하게 된 일본군의 모습은 마치 애굽 바로 왕의 신하들이 굴복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끼나와의 본토로 진격한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이는 유월절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다 멸하신 일로 말미암아 바로 왕이 항복학 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10재앙을 통해 여호와의 강한 손이 어떻게 애굽에 나타났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교리처럼 10가지 재앙을 읽게 되면 첫 번째 재앙도 예수님의 공로로 연결시켜 버리고, 두 번째 재앙도 역시 예수님의 죄사함으로만 읽게 되어 결국 모세가 말하고자 한 것을 다 놓치게 됩니다. 

10재앙에 대하여 하나 더 생각해 보십시다. 첫 번째 재앙은 나일 강을 피로 만든 것이고, 9번째 재앙은 흑암으로 애굽 땅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창조의 시작은 창세기 1:2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면서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고 하시며 흑암에 빛이 있게 된 창조를 말하였습니다. 이를 연상하면서 보면 애굽 땅에 흑암이 있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땅에는 빛이 있다고 했습니다.  

10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할 때 애굽 온 땅에 임한 재앙을, 그 다음에는 그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과 가축, 동식물을 칩니다. 이것도 창조에서 땅을 만드시고 그 땅에 모든 동식물을 가득 채웠던 것과 대비가 됩니다. 

그러니까 나일 강에서 즉 물에서 재앙이 시작되고, 이 물에서 나온 개국리가 애굽 모든 집의 식탁과 반죽그릇에까지 올라가고, 3째 재앙에는 이가 애굽 온 땅을 점령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7번째 재앙인 우박은 집 안에 들어간 것은 치지 않았지만 집 밖에 있는 것은 식물이나 가축을 다 멸했습니다. 우박 재앙 때는 삼과 보리가 아직 나기 전이었다고 하여 모든 식물이 다 멸절당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8번째 재앙인 메뚜기는 모든 식물을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갉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박 재앙보다 메뚜기 재앙이 더 무섭습니다.  

이 메뚜기 재앙은 처음에 저는 별로 믿고 싶지가 않았더랬습니다. 그런데 펄벅의 대지를 읽으니까 중국의 메뚜기 재앙을 기록한 것이 있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 메뚜기 재앙은 가끔 보도도 되고 있지요. 아예 먹을거리가 없도록 싹까지 완전히 먹어치워 다음 해에 농사지을 종자까지 없애버립니다.  

이러한 재앙들은 최근에 일본 지진으로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 일에 대하여 세계가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 바다 물이 지구의 모든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에 일본 근해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바다가 오염이 될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 방사능 재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출애굽기의 10재앙을 기록한 방식을 따라 보면 그 의미를 더 확실하게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마가복음을 강론하면서 출애굽기와 병행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마가복음을 보면 1장의 내용과 병행합니다. 막 1:29-45절을 보십시다. “ ... ” 여기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일, 많은 병자와 귀신들을 쫓아내신 일, 그리고 나병환자를 고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본문만 보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신비한 능력으로 병을 고쳤다라는 

정도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마가는 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한 일을 기록하는지 여간해서는 알 수가 없지요. 마가복음의 특성상 짧고 간결하게 기록하는데, 이 열병 치료는 전후 문맥에서 무얼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게 볼 때 이 열병 치료에 대하여 어떤 부가설명이 없으므로 아주 단순하게 예수님의 치료능력으로만 볼 것입니다.

마가가 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원어를 찾고 문법을 따라 단어 하나까지 사전으로 추적하여 그 의미를 세밀하게 연구하더라도 이 자체로는 마가가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것은 제가 여러 번 여러분 앞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출애굽기가 아니면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우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셨고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여기서 ‘저물어 해질 때’라고 하고, 35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라고 하는 표현들은 출애굽기의 ‘아침에 일찍이’라는 말과 병행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2-34절에는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다고 하고, 39절에는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럼 이건 어떤 점진적인 모습을 나타냅니까? 장모의 집에서 시작하여 동네로 그리고 온 갈릴리로 확대가 되는 형식입니다. 즉 이것은 애굽의 온 땅으로 재앙이 점차 확대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면 읽어도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인도하며 보호한다면 그 백성 중에 누구를 가장 먼저 책임을 지고 보호해야 하겠습니까? 그건 가장 가까운 심복의 가족을 돌보는 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하들의 가족을 편안하게 해야 신하가 왕을 위하여 충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애굽에 재앙이 내릴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애굽 땅과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의 땅과 사람과 구별시키셨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낸 권세 있는 새 교훈은 궁극적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알리시려 함을 통해 하나님 아들의 권세가 무엇인지 나타냅니다. 그러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과 많은 병자와 귀신을 쫓아낸 일과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은 죄사함의 권세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애굽에서 여호와의 강한 손은 이방인인 애굽에 재앙을 내림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죄사함의 권세로 하나님의 아들이 귀신과 병을 고치신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중간에 보면 주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결박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굽 바로 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하나님 아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왕으로 오셔서 죄사함의 권세를 나타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들이 가장 가까운 제자의 가정을 돌아보셨고, 그 동네 사람을 치료하셨으며, 온 갈릴리에 전도하며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럼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갈릴리가 마치 애굽의 고센 땅처럼 구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방인처럼 천하게 여김을 받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주님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가복음의 전체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천하고 가난한 이방인들이 주님의 나라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마가복음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갈릴리는 이방의 땅이고, 흑암에 앉은 백성이 거기 거하며, 사망의 땅과 그늘진 땅입니다. 이곳에 여호와의 강한 손이 아닌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가 임하여 구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여호와의 성막에 들어가지 못했던 부정한 자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로부터 배제되었던 불쌍한 자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 아들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인자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다고 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가정, 갈릴리 땅의 사람들, 나병환자 등과 같은 이방 땅에 거하며 죄인된 사람들을 의인이라 여기는 유대인으로부터 구별시켜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장의 이런 사건들 속에 어려운 난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알면 이건 쉽게 해결됩니다. 출애굽에서 여호와의 강한 손이 구원하심을 나타내 여호와를 알리려 하신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도리어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시거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까지 하셨고 소문이 나니까 동네에도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여호와의 종이 받는 고난 속에서 그는 입을 열지 않으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침묵하시었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으신다고 이사야 42:2절에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을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을 박히실 때 그 아래 있던 자들이 ‘너 자신을 십자가에서 구원하여 보라’고 조롱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자신의 권세를 온 천하에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권세를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도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겸손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 안에서 변방인 유대 땅 그것도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산에서 11명의 천한 어부들과 함께 그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나라를 갈릴리 산에 세웠노라고 마가복음은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약하심을 죽었다고 고린도후서는 말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즉 베드로의 장모처럼, 갈릴리 온 땅의 비천한 이방인들처럼, 문둥병자처럼, 불쌍한 죄인들을 죄사함의 권세로 건지시러 오셨다고 마가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과 저는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베드로와 같이 주님의 제자의 가족입니까? 갈릴리 땅에 거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나병환자처럼 그런 병자였습니까? 우리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정말 빛이 없었고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유대 땅에서 거리로 말하자면 정말 멀리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더 큰 죄인이요 하나님께 대한 악한 오랑캐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저는 마가복음 1장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 보다 더 천하고 무능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들을 구별하사 구원하시고 세상의 유명한 자들과 부한 자들과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 말했던 것처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들이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신 자들로 교회를 함께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불러 부활의 몸인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며 성찬상에서 먹고 마심으로 참으로 권세있는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으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땅에 있어도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죄사함의 권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권능은 소리를 높여 거리에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은 천하가 알도록 하여 두려워 떨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권세는 그렇게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이 시대 가운데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교회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강남에 교회를 짓는데 2,000억원의 공사라고 합니다. 

교회를 이렇게 크게 건축하는 이유에 대하여 그 교회 담임목사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이제 교회도 세상에 대하여 말할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큰 교회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구약의 솔로몬 성전에는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주님의 몸된 성전에는 젼혀 맞지 않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다려 돌아가실 때 옷 한 벌 입지 못하셨고, 그 있는 것도 찢기워 제비 뽑았습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주님의 몸으로 새 성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권력이나 세력을 형성하려고 하려고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겸손함으로 낮아져 섬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은 너무 쉽고 세상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이 교회를 이루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면 이건 성령이 함께 하는 교회요, 죄사함의 권세가 함께 하는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교회에 약한 자들이 들어오고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이 들어올 때 교회는 더욱 기뻐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천한 자들이 들어온다고 부담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들을 내 몸으로, 내 생명으로 여겨 보호하고 지켜내어 교회의 권세를 나타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권세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이 함께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실 때 귀한 상급을 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상가에 세를 들어 504호에 거하는 저희 교회가 비록 작아도 세상을 이긴 믿음과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도록 함께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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