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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의 삼단계 (마 20: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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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삼단계 (마 20:17-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center)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될 수 없고, 

십자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 교인이나 교회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영원한 주제는 ‘십자가의 중심성’(centrality of the cross) 이어야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모양의 귀걸이나 목걸이를 하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도 놀라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형 집행에 사용되는 교수대나 전기의자의 모형을 걸고 다닌다면 무척 놀랄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와 같은 사형 집행 도구이고 인류에게 알려져 있는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로마제국에서 십자가형은 예수님 이후 A.D. 315년에 폐지되었는데, 이는 로마인들조차도 그것이 너무나 비인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으로 여겨져 내려왔습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모든 성경의 무게 중심이 십자가에 집중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상당부분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의 핵심인 성찬식은 예수님의 상처받은 육신과 흘리신 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담고 있는 의미는 매우 풍부합니다. 

성경 본문에서 쉽게 뽑아낼 수 있는 십자가의 의미만 하더라도, 십자가의 인성과 신성, 십자가로 이루신 것, 십자가의 저주의 의미, 십자가로 이뤄질 화목,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신 이유, 십자가에 대한 여러 종류의 사람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부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바울의 십자가 신앙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전 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첫 번째(16:21), 두 번째(17:22-23)에 이은 세 번째 십자가 사건의 예고입니다. 

18-19절=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주님이 이렇게 십자가 사건을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깨닫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준비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미리 교육시키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이 피할 수 없는, 사역의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거기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상세히 아셨음에도 이를 피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는 그곳으로 스스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십자가의 삼단계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조롱과 채찍질 당하심 (= 정신적 육체적 고통)

19절=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의 첫 단계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과 채찍질 당하심’ 입니다. 이것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안하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 주님은 극한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헬라어 본문에 나오는 세 동사(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는 모두 부정사 목적격입니다. 이는 앞 문장(18절)에 나오는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는 목적이 바로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기 위함임을 보여줍니다.
이 동사들은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 가는 점층법으로 되어 있어서 후에 예수님이 당할 고난이 매우 실감나게 잘 전달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들은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능욕 당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보다 더 수치스런 일도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할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여기 ‘조롱하며’(엠파이조)는 신분이 낮은 종이나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업신여기다’ ‘비웃다’(눅 14:29) 등의 뜻을 지닙니다. 또 부녀자들이 부끄러운 일을 당할 때도 그러한 표현을 씁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홍포를 입히우고 가시 면류관을 씌움 받고 갈대를 그의 손에 들리워 총독의 군병들에게 희롱받을 때 이 단어가 사용되어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능욕당할 것이라고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정신적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에 의해 채찍질 당할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여기 ‘채찍질하며’(마스티고오)는 뼈 조각이나 금속 조각을 붙인 특수 채찍(마스틱스)을 사용하여 괴롭히는 것을 말합니다. 

채찍을 내리칠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이 가중되는 혹독한 형벌입니다. 실제 예수께서는 이러한 채찍으로 채찍질을 당함으로써(요 19:1) 이 예언도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귀한 몸은 채찍질로 참혹하게 찢기셨습니다. 주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으셨습니다. 손과 발은 대못으로 박히고 옆구리는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십자가의 첫단계인 ‘조롱과 채찍질’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 땅의 죄인 된 우리도 이처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므로 예수님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인간은 죄로부터 오는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 대신 능욕과 채찍질을 받으셨습니다. 

18절에 “보라” 는 헬라어로 ‘깨닫다, 이해하다’ 등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인간들은 죄악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내가 죄값으로 조롱과 째찍질 받아야 할 그 자리에 주님이 대신 오셔서 고난의 잔을 마셔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 위해 모든 것을 주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작은 희생도 꺼려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악하고 게으른 본성이 있습니다. 보라! 좀 알라, 좀 깨달아라, 좀 이해하라! 나를 위해 극한의 고통을 당하심 주님을 위해 우리의 남은 생을 드리는 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2. 십자가에 못 박히심 (= 희생의 죽음)

19절=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십자가의 삼단계 중 두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단계입니다. 여기 ‘십자가에 못박다’(스타우로오) 동사는 당시 로마에서 노예나 이방인 흉악범에 대하여 시행하던 잔혹한 형틀인 ‘십자가’(스타우로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십자가의 둘째 단계는 사형수의 신분으로 극형을 받아 희생의 죽음을 죽으신 단계입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오후 6시경에서부터 자정까지 성찬식을 행하셨고, 그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셔서 조롱과 채찍질 당하셨을 뿐 아니라, 급기야 사형 언도를 받아 십자가 형벌까지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인류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신 희생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의 단계는 조롱과 채찍질을 거쳐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이 받으신 십자가 형벌은 어떤 것입니까? 
십자가는 고대 유럽에서 쓰던 십자(十字) 모양의 형틀입니다. 여기에다가 죄수의 두 손과 발을 못으로 박고 몸을 매달았습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이 너무나 잔혹하여 자국민은 제외하고 식민지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서서히 죽어갑니다. 못박힘으로 인한 고통도 엄청나거니와, 낮에는 태양, 밤에는 추위의 고통이 더해지고, 날짐승과 갈증의 고통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심’ 은 이런 고통 가운데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원수들의 조롱, 잔인한 채찍질, 그리고 끔찍한 십자가형을 완전히 알고 계신 주님께서 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은 원하기만 하면 십자가를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운명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요 10:18에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불가항력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주님은 이 고난의 잔을 마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자신의 생각보다 아버지의 뜻을 중시하셨습니다(마 26:39).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확신했으므로 묵묵히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사 53:7)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이후 거의 15시간 동안 고통 당하시다가 금요일 오후 3시 경에 운명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진 고난을 참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라도 죽음 앞에서 무력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라고 했습니다. 혹 그가 성인군자라도, 부귀권세를 누리는 자라도 죽음만큼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예수께서 들어와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죽음의 자리에까지 들어오셨고, 그 결과 우리는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사망을 영원히 멸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의 장막은 허물어질 지라도 주님 재림 때에 다시 살아나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무조건 ‘예’ 하신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만 충실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온 세상이 비웃고 조롱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무조건 받아들이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십자가의 길이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 이 단순한 신앙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됩니다. 

3. 삼일에 살아나심 (= 부활)

19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십자가의 3단계 중 마지막은 제 삼일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께서는 무덤을 깨고 다시 사셨습니다. 
여기 ‘살아나리라’(에게르세타이)는 미래수동형으로서,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를 마치 잠자던 자를 깨우듯이 일으켜 주실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증거가 너무나 확실합니다. 여인들이 부활의 날에 무덤을 찾았을 때 그들 앞에는 무덤의 거대한 돌문이 이미 열려져 있었습니다. 

눅 24:1-2=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요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그들이 무덤 안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들어가니 주 예수

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눅 24:3).
빈 무덤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가 그대로 놓여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눅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요 20:6-7=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이것은 죽어 누워 있던 시신이 부활의 순간에 세마포를 빠져 나온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마지막은 부활입니다. 과거 우리는 육체적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조롱도 채찍질도 죽음도 다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부활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그렇게 복스러운 미래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육신의 몸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예수님 재림 때에 주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미래 축복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어떤 존재이었습니까? 사망 권세 아래에서, 지옥의 고통 아래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우리 아니었습니까? 예수님 아니었으면 우리는 마귀의 속박에서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죽음의 덫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을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성도는 고난의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광명한 부활의 대양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급스런 종교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장차 누릴 부활의 감격과 영광을 생각한다면, 내 한 몸 다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리라 결심해야 할 것입니다. 비유컨대 우리 모두는 혓바닥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청소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를 사모하고 다른 성도들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밧모섬의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놀라운 계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히 2:14~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우리는 죽음이라는 벽에 막힌 막막한 존재였는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신 예수께서 그 벽을 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가 담고 있는 의미는 매우 풍부합니다. 오늘은 그 중 십자가의 삼단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삼단계를 생각하며,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날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 할 조롱과 채찍질을 대신 받으신 주님, 나의 죄값으로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어 주신 주님, 나에게 부활 소망을 선물하신 그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섬길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 알기로 했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했습니다. 십자가만 전하기로 했습니다. 십자가의 삼단계를 깊이 생각함으로 성도 여러분의 삶이 바울의 삶 같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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