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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는 통하지 않는 인간의 염려 (마 6: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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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는 통하지 않는 인간의 염려 (마 6:24-34)


서비스와 서브는 다릅니다. 세상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많은 업체들이 있습니다. 식당 ․ 숙박업소 ․ 주유소 ․ 백화점 이런 업체는 고객의 취향을 맞추고 고객이 만족하기를 추구합니다. ‘고객은 왕이다. 고객은 항상 옳다.’ 이것이 서비스 정신입니다. 

교회는 서브, 섬기는 단체이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는 아닙니다. 거기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교인들의 취향을 맞추려고 하지 않고 교인들의 만족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하시고 사랑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취향을 따르신다든가 사람들의 만족을 채우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의 신�� 자라나서 주님을 서빙하고 섬기고 순종하고 알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회활동을 하러 오신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아주 분명하게 ‘노’라고 거절하실 때가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랍비여 내 형제로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부탁했을 때 예수님이 분명하게 거부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나를 너희 재산 나누는 재판관을 만들었느냐’고 말씀하셨어요. 또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찾아왔을 때에도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노’라고 대답하셨어요. 

이후에 들어주시기는 했습니다마는. 또 한 번은 예수께서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러 가셨을 때 제자들이 따라가서 주여 온 동네가 주님을 찾나이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이 거절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다른 동네로 가자 거기서도 천국복음을 전하리니’ 그러니까 예수님이 섬기러 오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요청을 들어주시고 모든 사람의 만족을 채워주셨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보기에 좀 퉁명스럽게 대답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불교계의 큰 스님들이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에 대해서는 익숙하면서 왜 교회는 늘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되고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해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정한 말,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을 때는 시험에 듭니다. 친절하지 않다고 시험에 들고 또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다고 시험에 듭니다. 기분이 나쁘면 천당에도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친절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예수님보다 더 선할 수 없습니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친절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 차이점은 교회가 오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버하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친절은 사람들의 신앙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육신의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면 믿음을 가질 것으로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나무라는 방식으로 때로는 경고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시고 또 회개하게 하셨지 늘 사람들 비위에 맞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교회가 예수님보다 더 친절하고 더 다정할 수 없다는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하셨지만 인본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신본주의자였습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단어가 천국, 또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천국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으냐. 하나님 중심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가정에 천국이 임한다는 말은 가정이 하나님 중심으로 변한다는 얘기에요. 천국백성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에 소속된 백성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천국에 소망을 둔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우리의 소망을 둔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천국을 확장하는 차원에서 사람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냥 도우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 보시기에 사람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될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평소에 염려하는 많은 것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사실 이것은 생존에 대한 염려입니다. 인간은 늘 생존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요즘 시대는 생존에 대한 염려가 더 고차원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자녀의 교육이라든가 자녀의 취업이라든가 부동산이라든가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라든가 노후대책이라든가 이런 식으로 생존에 대한 염려의 방법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늘 염려합니다. 

사람들이 염려하는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젊은이들은 짝을 찾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또 그 이외에 남들이 나를 예쁘게 볼까, 멋있게 볼까, 나는 친구가 얼마나 있나,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나, 이런 많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염려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무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믿음의 사람에 있어서는 이런 모든 염려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보셨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런 것을 염려하나 너희는 이방인처럼 하지 말라’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모르시느니라가 아니고 아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은 하나님이 그걸 무시하신다는 얘기가 아니고 하찮게 보신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데 그러나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염려하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이 없는 증거이고 그리고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의보다는 인간의 염려 위주로 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심사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초적인 염려로부터 졸업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이 본문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제일 기도를 많이 하는 도시가 어디인지 아시지요. 라스베이거스라고 하지요. 이건 미국이 기독교 국가냐 아니냐를 떠나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는 동기가 지극히 하찮은 일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정말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잃어도 그만 따도 그만 어떻게 보면 오락으로 만들어 놓은 도박이라는 것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일 정도라면 사람의 기도하는 동기라든가 그 신앙의 동기가 얼마나 비본질적인 것이 좌우된다는 얘기입니까. 

이것은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룬 것은 참 많은데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알만합니다.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극성스러운 민족이에요. 그게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자신이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굳이 강단이 아니더라도 사회학자들, 신문 칼럼니스트들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나무라는 말씀처럼 보이기도 하고 위로하는 말씀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섞여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나무라실 때가 많아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없기 때문에, 너무 생각이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무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무라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동시에 위로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위로를 경험하려면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들립니다. 반대로 마음을 바꾸지 않고 우리의 원래 고집대로 나가면 아마 주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음을 바꿔서 이방인적인 사고를 바꿀 때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고 주님의 뜻이 깨달아지기 시작하고 주님의 위로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고 마음에 평강을 얻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방인 같은 생각을 바꿔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의 우선순위와 또 우리의 편견과 불신을 벗어버릴 때 그때 주님의 뜻이 깨달아지고 음성이 들리고 위로가 임하고 평강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때를 써도 안 됩니다. 때를 쓴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때를 써서 가는 곳이 아니고 회개함으로 가는 곳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결국 내 생각과 내 방향을 바꾼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려워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나무라시는 말씀 같지만 여기에 주님의 엄청난 위로와 격려와 또 축복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너희는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26절에 ‘너희는 이보다 얼마나 귀하냐-precious’라는 겁니다. 우리의 귀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귀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고 돈이 귀하고 시간이 귀하고 가족이 귀하지요. 그러나 정작 내 자신은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부가 가족이 모여서 식사할 때는 정성스럽게 반찬을 준비하지만 자기 혼자 식사할 때는 아무거나 남아있는 반찬을 먹습니다. 

또 남자든 여자든 남들 앞에 나설 때는 옷에 신경 쓰고 머리도 빗고 여자는 화장도 하지만 집에 혼자 있을 때는 아무런 옷이나 입고 씻지도 않고 있습니다. ‘너희는 귀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안다면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살이란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극단적으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건 절대적인 절망이에요. 자기 자신이 귀하다는 사실을 알면 자기의 삶을 자기 멋대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또 자기 자신이 귀하다는 것을 알면 남을 귀하게 여길 줄도 알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 함이니라’고 했어요. 반대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자기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남들도 귀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인간의 귀중함은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가치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다고 하시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의 가치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하셨고 또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30절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말은 안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고 하물며 주시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며칠 전 신문을 봤더니 프리스턴대의 케네먼 교수라는 사람이 집중착각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집중착각. ‘당신이 어떤 문제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다면 그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중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로 케네먼 교수는 교육과 소득의 상관관계를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학력이 소득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려고 애쓰는데 사실 소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교육 이외에도 다른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중착각. 지금 한국인들은 집중착각에 빠져서 삽니다. 자승자박이에요. 우리가 만든 올무에 우리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삽니다. 이것을 풀어버릴 수 있는 것은 국가가 아니고 사회가 아니고 정부가 아니에요. 내가 풀어버릴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믿음으로밖에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늘 걱정합니다. 나는 걱정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래서 심지어 철학적인 용어까지 만들었습니다. ‘앙스트’라고 마치 감기를 인플루엔자라고 부르면 좀 고상하게 들리는 것처럼 인간의 염려를 ‘근심염려’라고 하지 않고 ‘앙스트’라고 하면 고상하게 여기지만 다 같은 것입니다. 그게 이방인들 같아요. 이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염려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개가 끼었을 때 도시 한 블록을 덮은 안개의 양을 물로 축소하면 한 컵 정도의 분량이라고 합니다. 안개를 물로 변화시키면 한 컵 정도밖에 안되는데 그게 안개가 되니까 아주 넓은 지역을 덮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의 정체도 그것을 파악하면 사실은 그렇게 큰 게 아닌데 우리가 그것을 확대시켜서 염려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이 적다는 얘기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세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지만 우리를 돕기 위해서만 오신 게 아니고 우리를 위하지시만 우리 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편을 들어주려고 오신 게 아니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지만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면 나머지 일들은 자연히 이루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이 부분이 참 믿음과 기복신앙의 경계선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냐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내 편에 서 주기를 고집하느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통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시고 위대하시고 인간은 너무 작아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이 통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동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그냥 하나님을 의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것을 추구하고 인간과 하나님이 대화하고 뜻을 공유하고 동역자가 되는 것, 이건 대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차원은 이방인들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 ․ 천국백성 ․ 천국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지극히 크시고 인간은 지극히 작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과 인간이 같은 뜻을 공유하고 같은 것을 추구하고 같이 동행하고 같은 일을 동역하고 친구가 되고 한 편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을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너스를 얻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더해 주십니다. 마음에 평강을 얻고 염려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정말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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