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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파의 능력 (시 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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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파의 능력 (시 27:1-6)


Ⅰ. 참치형 인간

작은 풍랑을 만나 바다 한 가운데서 표류하던 배에 마실 물이 떨어졌습니다. 타는 목마름에 당황하고 있을 때 마침 배 한척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보시오. 우리 배에 마실 물이 떨어져 죽을 지경이오. 물 좀 주시오.” 
지나던 배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당신들은 이미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 하류에 도착한거요. 
그 물을 퍼 마시면 되오.”

강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애타게 마실 물을 간절히 찾고 있는 선원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그 이름 안에 있는 놀라운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우리는 이미 은혜의 강(기쁨의 강, 성령의 강, 사랑의 강)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씨도 오래전 (2007년)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바다 속에서 살고 있는 아기 꽁치가 엄마꽁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엄마, 바다가 어떻게 생겼어요?” 아기 꽁치의 질문을 듣은 엄마꽁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그런 게 있다고 듣긴 했다만, 나도 잘 모르겠다.” 

바닷속에 살면서 바다를 본 적 없는 게 우리들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인간을 넙치, 참치, 날치형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넙치형 인간은 바닥에 납작 깔려 살면서 물 흐름을 타고 움직입니다. 
참치는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습니다. 때문에 하루 종일 퍼득퍼득 헤엄쳐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날치라는 생선은 바다 바깥으로 뛰어 오릅니다. 
촤 ~ 악! 날아오르면서 바닷 속 물고기가 바다 풍경을 봅니다. 
수면을 박차고 멋지게 뛰어오르는 날치처럼, 다른 세계로의 돌파가 우리 삶에도 필요합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일생은 참치형 인간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오늘보다 더 부요하고 풍성한 삶을 위해 하루종일 퍼득거려 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도 6∙25 전쟁이후 폐허로 변해버린 이 땅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모두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끼고 절약 하면서 부지런히 일한 결과, 
전쟁폐허의 흔적은 사리지게 되었고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인해 
1996년 이미 OECD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기술력은 이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스마트폰 시장에도 뛰어들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 자동차, 가전제품 등의 분야에서 이제는 made in Korea란 말 자체가 제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퀄리티 높은 브랜드의 명칭으로 변하가고 있습니다.

기술과학도 발전했고 경제도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는데 왜 우리의 마음은 더 억눌려 있고 세상은 더 문제가 많아 보이는 것입니까? 

첫 번째는 현대인들은 환경문제와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구제역으로 인해 죽은 가축의 수가 삼백만마리가 넘었습니다. 가축이 생매장되는 그 현장의 참혹함을 보면서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 참담함 속에서 모두가 할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일본정부가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수 1만여톤을 바다로 방출을 해서, 방사능 노출 피해에 대한 세계인들의 불안감은 커져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정신적인 피폐입니다. 
2011년 2월 20일 어느 인터넷 신문에 “자살 공화국,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란 
기사가 실렸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 한해 1만 5,413명, 하루 평균 42.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90년대 초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해서, 90년대 후반 금융위기를 거친 이후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OECD 평균자살률이 10만명당 11.2명인 것을 생각하면 한국의 자살률은 거의 3배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세 번째는 관계적 갈등입니다. 
어려운 세상을 살아온 세대가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심지어 가족, 교우, 직장동료간에도 상처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상처촌에서 상처를 받으며 살아온 터라 또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갑니다. 

네 번째, 세상의 그무엇보다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 죄의 문제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멸망으로 몰아가려는 사탄이 우리를 노려 보고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공격해 옵니다. 여기에 걸려 교회들도 아파하고 가정들도 무너지고 어른도 아이도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 정신적, 환경적, 인간관계의 억압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세상의 어려움 때문에 결코 너는 망하지 않는다.
- 너에겐 세상의 문제를 돌파하는 생명의 능력이 있느니라. 
- 원수 대적이 너를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역사상 그 누구보다 원수 대적의 끈질긴 공격을 받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II. 본문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의 위세 앞에 이스라엘과 사울 임금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이라는 소년이 나타나 돌팔매 하나로 골리앗을 무찌릅니다. 이 일로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노래를 지어 부를만큼 다윗의 이름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윗 생애에 큰 위기가 되었습니다. 
성공이 곧바로 위기로 돌변한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성공이 한자 높아지면 공격도 한자 높아집니다. 
축복이 한자 높아지면 시험도 한자 높아집니다. 
왕위를 빼앗길까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이 일은 사울에게 “악신이 힘있게 내려 광기를 부리게 된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해석입니다. 

1) 사울은 가까이 있는 다윗에게 두 번씩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 합니다. 
2) 그 다음은 다윗을 함정을 파놓고 홀몸으로 블레셋 땅으로 보내 죽게 하려 했습니다. 
3) 이후 다윗은 사울과 원수 추적자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엎드려 기도하다가 오늘 본문의 시를 짓고 노래하게 됩니다. 
가드 왕 아기스 곁으로 도망을 가서는 자기를 죽일까봐 미친 척 침을 수염에 흘리고 나녔습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사해 근처 엔게디 동굴에 숨어 지내다가 사울 임금 일행과 맞부딪히고 맙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가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생물체에겐 원수 대적이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생명의 위협이 있다는 것입니다. 땅을 기는 한 마리 벌레에게도 대적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에게도 대적이 있습니다. 사업가에게도 대적이 있고 정치가 대통령이 되어도 정적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대적이 많아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악한 대적 마귀가 있습니다. 
질병도 상처도 죄의 짐도, 죽음의 두려움도 나의 대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대적도 없이 사는 사람들은 모두 공동묘지에 있습니다. 

이때 성도는 그 악한 환경과 대적을 돌파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돌파의 능력”입니다. 

시편 27편은 “여호와는”이란 말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1인칭 단수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1절부터 6절까지 여섯절 안에 무려 21번씩이나 반복됩니다. 
1절부터 마지막 14절까지는 40여번 반복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금 온갖 대적에 쫓겨 신음하고 있는 내게 어떤 분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시요. 그 사실이 지금 당신이 당하고 있는 그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겁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내 상황도 캄캄하고 내가 있는 곳은 동굴처럼 암울하기만한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그분은 나의 빛이십니다. 금방이라도 잡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는데 하나님 곁으로 나아가니 그분은 나의 구원이 되십니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 돌파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나는 기도만 하였는데 여호와 앞에서 원수가 꼬꾸라집니다. 
다만 아쉬운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4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6절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제는 죽을만큼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보다는 평안한 일상속에서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III. 예수 십자가: 돌파의 능력

여러분! 인생을 살아오면서 힘겨운 짐이 없던 때가 있었나요? 

나에게는 돌파해야 할 짐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고달프고,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살아가며,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괴롭고, 권력자는 그들 나름대로 힘겨운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짐이 있고,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연약함과 죽음의 짐이 있습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에게 괴로움은 떠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통 속에서 태어나서 고통 속에서 살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갑니다. 출애굽 지도자 모세의 기도대로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 

그러기에 세계 정복을 꿈꾸던 나폴레옹도 세인트 헤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나는 지금까지 단 일주일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 저기 바닷가에 넘실거리는 물결은 세상 사람들의 눈물이요, 저기 부는 바람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한숨소리로구나”라고 한탄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고난을 원하든, 원치 않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수고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나는 곳이 창세기 타락직후입니다. 이때부터 수고는 인생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고민이 없겠지 하고 만나 보면 고민이 몇 배나 더 있습니다. 일의 고민, 자신에 대한 고민, 부모나 자식에 대한 고민, 부부간의 고민 등, 화려하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고뇌하고 있습니다. 

웃는 얼굴 뒤에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넓은 가슴속에도 홀로 가슴 치는 아픔이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얽혀 그 갈등으로 영혼이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아셨습니다. 
저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고 그것이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절망하는 인생을 향해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에게는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감히 이런 절대적인 초청과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초청이요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인생의 모든 한계, 문제를 돌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풀어야 할 짐, 
예수님이 풀어주시는 짐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는 죄의 짐을 돌파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죄가 없어.” “나는 법 없어도 살아”하는 사람을 종종 보는데 그런 사람이 제일 흉측한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은 죄 중에 잉태되고 죄에서 태어나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짐을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죄짐을 다 풀어 주셨다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짐은 그 자리에서 당장 풀어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질병의 짐을 돌파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서운 고통 중의 하나가 질병입니다. 
질병은 생명을 앗아가고 행복한 가정을 파괴해 버립니다. 
가정에 남편이 병들면 행복이 깨집니다. 
자식이 아프고 아내가 병들면 온 가정이 우울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병을 퇴치하려고 지구가 생긴이래 수천년간 약초를 찾아다녔고, 오늘날도 의학이 발달했다고 자랑은 하지만 불치병은 더욱더 늘어갈 뿐입니다. 말세의 재앙 중에 질병으로 고통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성경은 예고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암, AIDS, 이름 모를 난치병들...

그러나 야훼 라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출16:16) 이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만난 모든 환자들은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 시간도 예수님께서는 질병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내게 오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못된 질병의 짐아 풀어 져라!” 
이 시간도 진정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질병의 짐이 풀어집니다.

세째로, 예수는 가난의 짐을 돌파하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세계지도를 펴놓고 국민 소득 2만불, 3만불 이상 되는 나라마다 색칠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색칠된 나라가 예수를 믿는 나라인가 다른 종교를 믿는 나라인가를 알아 보십시오. 
여러분이 찾아낸 30여개 국 중에서 95%가 기독교 국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5%에 해당하는 그 외 한 두 나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경제부흥을 이룩한 다음 껍데기만 취하고 알맹이 예수를 버린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는 그 물질적 풍요로 인하여 무서운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네째로, 예수 이름은 죽음의 짐을 돌파하는 능력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오늘밤 찾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죽음 이후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예수 앞에 나와 죽음의 짐이 풀려진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 인생이 끝난다고 해도 오늘 지구가 없어진다고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무거운 짐들을 벗기를 원치 않습니까? 짐이 이것들 뿐이겠습니까? 인간은 모두가 생활고의 짐, 자녀들의 염려, 근심, 걱정, 절망, 좌절, 실패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모든 짐진 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금까지 여러분이 어떤 인생의 짐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그 짐들이 몽땅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인생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까요?
서너살 난 어린아이가 밖에 나갔다가 동리의 큰 아이가 괴롭히면 “엄마”하고 찾습니다. 밖에 나가 놀던 아이가 넘어져 상처가 나면 “엄마”하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십시오. 무슨 일을 만나면 “하나님”하고 기도하는 것이 어린아이가 되는 길입니다. 상처난 몸을 끌어안고 실패한 몸을 이끌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하며 겸손히 예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마을에 호랑이가 내려오면 큰 개들은 무서워 흔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왈 왈 거리고 짓는 개가 있어요. 강아지입니다. 그것도 똥개 강아지입니다. 
이걸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겁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겸손합니다. 
여러분은 초청에 응하셔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영접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차려놓은 뷔페식당에서도 내가 집어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향해 아무리 멋진 계획을 준비하고 계서도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의 승리가 세상의 한계를 돌파하는 능력입니다. 
평안한 교회생활이 온갖 문제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돌파하는 힘입니다. 
거기서 즐겁게 제사하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귀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더러운 욕망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돌파의 능력은 세상권력과 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집에 있고 예배에 있습니다. 
예수는 내 인생 돌파의 능력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죽음과 죄를 돌파하는 능력입니다. 

이번 사세특밤에 참여하면서 
- 영혼이 한층 맑아짐을 느낄 것입니다. 
- 기도의 권세가 강해짐을 느낄 것입니다. 
- 죄의 이길 힘이 더해짐을 느낄 것입니다. 
- 삶이 새로워 짐을 느낄 것입니다. 

Ⅳ. 은혜로의 초대

일전 괌 제일장로교회 집회를 인도하고 요코이 동굴을 가 보았습니다. 
쇼이치 요코이(Shoichi Yokoi)라는 일본인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의 전세가 일본군에게 불리해지자 괌 섬에 있는 
한 동굴로 잠적해 버렸습니다. 적에게 목숨을 빼앗길까 두려워 28년 동안 정글 속에 숨어 살면서 밤에만 활동하였습니다. 개구리, 들쥐, 달팽이, 새우, 호두, 밤, 망고 등의 열매를 먹고 살았으며, 히비스커스 껍질로 바지와 셔츠를 손수 만들어 입었습니다. 

쇼이치 요코이는 28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둠의 밖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두에나스와 데그라시아라는 두 명의 사냥꾼이 그를 발견해 
전쟁의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마침내 쇼이치 요코이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쇼이치 요코이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동굴 속에서 비참하고 
비인간적을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전쟁이 끝났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고, 그 기쁜 소식을 듣고 동굴에서 나와야 합니다. 전쟁이 끝난 기쁜 소식을 믿고 자유가 물결치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올 때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는 지옥을 돌파하는 능력이다!

복음을 전해주는 것과 복음을 듣는 일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우리 주변에 아직도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해 여전히 어둡고 침침한 동굴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가슴이 저리도록 안타깝고 괴로운 것은 자신들이 동굴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그들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그들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 주겠습니까? 

쇼이치 요코이가 동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동굴을 박차고 나오는 일이 위험해 보일 수 있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박차고 나와야 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동굴 밖으로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순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내 인생의 온갖 한계를 돌파하는 능력이 믿음안에 있음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이라는 능력의 강물안에 있습니다. 마음껏 마시고 누리십시요.
바다속에 살면서도 바다에 갖혀 살지 말고 환경을 뛰어 오르는 돌파의 능력을 가지고 사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을 삼킬 것처럼 덤빈다 할지라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세상보다 크십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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