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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를 사랑하사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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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사 (갈 2:20)

(갈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히 충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만 보았지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넘겨주는 악행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었고 나름대로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는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자 인간적인 차원에서 추구하였던 의와 열심 등을 모두 버린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과거의 잘못된 열심을 모두 버린 이유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만난 자만이 형식적인 거짓된 것들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거짓된 위선의 껍데기를 버리는 것이 바로 성도의 '죽는 삶'입니다.

남들에게 나쁘게 평가받는 것을 두려워한 외식적인 행동, 입에 발린 칭찬의 말, 겉으로 꾸미기에 급급한 경건 등은 모두 버리고 그러한 외식을 추구하는 마음을 죽여야만 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그렇게 죽이고 포기할 때에만 주님을 바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체면, 재물 등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난하고 의롭게 살았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체면 유지로 교회 생활을 하는 자들이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 봉사로 외식하는 자들은 분명코 주님의 참된 의도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설명한 새로운 삶은 율법이나 죄에 매달려 사는 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삶이요, 새 생명을 덧입게 된 부활의 삶입니다.

(롬 6: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고후 5:7)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사람'이 산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실로 바울은 주안에서의 '삶'의 방향과 의미를 깨달은 인물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외모나 형식적인 경건, 외식적인 선행, 규범의 준수 등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인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예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재물이나 명예 등은 이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참된 의와 사랑이신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만이 의미가 있는 삶입니다. 또한 이것은 개인들이 처한 삶의 양태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측면에서 다른 형제들이 누리는 삶과 그 모습을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 12명은 개성과 성격이 제각기 다른 모습이었지만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에 그런 모습을 결코 책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도들의 삶은 그와 같이 다양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경건이나 외양 등을 인간적인 안목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삶의 모습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복잡함을 인정 할 수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생명의 근원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1: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 내용을 확증하는 고백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신 분이라는 설명이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참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생명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충족시키는 분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성도가 의롭고 바른길을 살아갈 때에 그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아야만 합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환란을 이길 힘을 얻고,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계속해서 지도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로 인해 구원받은 자가 그분의 힘을 계속 공급받지 못하고 스스로의 능력과 힘만을 의지할 때, 그는 분명코 올바른 길에서 실족할 위험을 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아는 이미 죽어 존재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자신의 전부이고 또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 된다고 고백 합니다.
이러한 고백의 바탕에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사도라고 별명을 받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믿고 진정한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지상생애 마지막이 가까우면서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3:1)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주셨던 마지막 교훈에도 사랑을 말씀합니다.

(요 13:34-35)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설명하며 사랑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 합니다. 이러한 사라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요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속성인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일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이유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의 회복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대상들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거룩함으로 온전케 하시고자 하십니다.

천국을 준비하신 이유도 사랑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가 기다릴 삶의 전부라면 해결될 수 없는 그 많은 미 해결 미 완성의 문제들의 궁극적인 해답을 위해 준비하신 그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모든 상처받은 사랑이 치유되고, 사랑이 영원히 완성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나이가 좀 많이 들어서 뒤늦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에 나온 분의 이야기라 합니다. 한 일 년 동안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서 그는 '늦게 시작했으니까 먼저 믿은 사람들을 좀 급하게 따라 잡아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했다 합니다. 

과외수업도 하고, 개인 교습도 받고 하면서 어쨌든 빨리 성경과 교리를 익혀야겠다 해서 공부를 하는데, 성경이 고어로 된 성경이라서 뜻이 잘 통하지 않으므로 영어성경, 독일어성경을 대조하면서 읽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주석서도 참고했다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나가다가 목사님께 와서 물었다 합니다. '목사님, 성경에 보니까 긍휼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긍휼이라는 단어가 참 중요한 것 같지만 뜻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영어성경으로 돌아가 읽어보았더니 영어성경에는 러브(Love)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사랑'이라고 번역했으면 간단하겠는데 그걸 왜 긍휼이라고 해서 헛갈리게 합니까? 왜 '사랑'이 아니고 '긍휼'입니까?' 

그래서 목사님께서 대답을 해 드렸다합니다. '똑같은 사랑이요 단어도 같지만 그 개념은 서로 다릅니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이 있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같지 않아요. 또 젊은 사람들끼리 남녀 간에 사랑하는 것, 이런 것은 수평적 사랑이에요. 그런데 '긍휼'이라고 하게 되면 이는 아주 높은 위치에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아하, 그렇군요. 참 귀한 뜻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하더랍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느 신사가 중병에 걸렸다 합니다. 그런데 이 신사는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없어져 감을 느끼고 고민하게 되었고, 이 고민을 친한 친구에게 털어 놓았다합니다. 이 신사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친구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합니다. '자,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해 보세. 어기서 집으로 돌아가면 아마도 나는 우리 귀여운 아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 아이의 부드러운 두 눈을 지그시 바라 볼걸세. 그리고 우리 아기가 들려주는 그 매력적인 음성(물론 제대로 된 말은 아니지만)에 귀를 기울이겠지. 아무리 일에 지쳐 몸이 피곤해도, 이런 천사가 내 곁에 있다는 그 사실하나만으로도 나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네. 

왜냐하면 우리 아기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지. 그러나 그 아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할거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거의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내가 가슴이 아파 고통스러워해도 우리 꼬마 아가씨는 그냥 잠만 쿨쿨 잘걸세. 혹 내가 아파서 신음할 때도 이 무심한 천사는 저 혼자만 즐겁게 떠들며 놀거야. 설사 내가 죽더라도 이 꼬마는 며칠 동안은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잊고 살테지. 그밖에도 우리집 꼬마는 나에게 단돈 1원도 가져다주진 않고 끊임없이 돈을 요구 할 거야. 물론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부자는 아니네. 그렇지만 이세상의 모든 돈을 다 내게 준다 하더라도 나는 사랑스러운 나의 천사를 포기할 수는 없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게. 아기가 나를 사랑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내가 아기를 사랑하는 게 나을까? 우리 아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나? 내가 사랑을 베풀기 전에 내가 주는 사랑의 값어치만큼의 무언가를 우리 아기가 내게 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친구의 말에 그 신사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합니다. '알았네. 내가 생각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함을 이제야 깨달았네. 내가 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겠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향하여 가십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코카콜라는 전 세계인들이 즐기는 세계적인 음료수입니다. 코카콜라를 처음 만든 아사 켄들러는 자기가 경영하던 작은 약국의 지하실에서 이 짜릿한 음료수의 제조권을 구입한 후 날개 돋힌 듯이 팔려 돈더미 위에 올라 앉는 큰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인 아서 쥬니어가 알콜 중독에 걸려 재산을 없애고 몸과 마음이 병이 든 폐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서 쥬니어에게는 목사인 삼촌이 있었습니다. 그 삼촌은 사랑하는 조카가 알콜 중독에 걸려 폐인이 되어가자 남다른 애정과 안타까움을 갖고 이 조카를 바로잡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켄들러 목사는 자기 조카를 한번도 꾸짖거나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어떤 때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따뜻한 눈빛을 주면서 부드럽게 껴안아 주기만 했습니다. 삼촌의 따뜻한 사랑에 감동된 아서 쥬니어는 어느날 술병을 들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술병의 마개를 따지 않겠소. 이 순간부터 술을 끊겠소.' 아서 쥬니어는 그순간부터 술을 끊었고 그의 아내는 그 술병을 리본으로 묶어 가보로 보관하였으며, 지금도 그 술병은 코카콜라 회장인 켄들러 집안의 중요한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버마(미얀마) 선교사였던 아도니람 져드슨이 첫 선교 기간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보스톤을 방문했을때 기자들이 그에게 어려운 일은 없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많이 있었지요" 다시 묻습니다. 산앙의 회의는 없으셨나요? 예를 들어 선교하러 온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생기다니 하는 그런 종류 말입니다. 그는 다시 대답합니다. "많이 있었지요" 그러면 어떻게 그런 회의를 극복하셨나요? 져드슨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그런데요, 십자가를 보면 그분은 사랑이시거든요" 
  
악성 췌장암에  걸려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절망 적인 선고를 받고 면회도 금지된 병원 독방에서 응급조치를  받으면서 하루하루 죽음과 싸우는 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미 성인으로 의사 일을 하고 있는 아들입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감정이 메말라 있어서 자식들에게 애정표현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나 봅니다. 그리고 자식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고 항상 자기 주장대로 해 버리니까 아들이 나중에는 아버지만 보면 가슴에서 분이 치밀어 올라서 참을 수가 없어지고, 결국은 둘 사이가 멀어져서 수십 년 동안 겉으로만 부자 사이지 내적인 사랑이 오고 가는 일이 없는 삭막한 관계를 유지 해 왔나 봅니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돌아가실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병문안을 와서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 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를 꽉 껴안았습니다. 아들이 느닷없이 자기를 껴안으니까 아버지는 잔뜩 긴장해서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굳어 가지고 안기지를 않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들은 그 다음 번 병 문안 와서 다시 아버지를 안았습니다.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빳빳이 안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마음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건 정말 소망이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자기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를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하고, 아버지는 진정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안아주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문안을 갈 때마다 아버지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아버지가 말을 잘 안 들으면"아버지, 팔을 저에게 둘러 보세요. 그리고 좀 꽉 껴안으세요. 그래요, 됐어요. 좀더 힘 있게 껴안아 보세요." 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계속 유도했습니다. 아버지의 긴장된 자세가 풀어지는 데는 그로부터 몇 달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버지가 아들 을 먼저 껴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점점 깊은 애 정과 염려를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2백 번 째의 포옹이 있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널 사랑한다." 평생 아버지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사랑의 표현, 애정의 표시를 처음으로 들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껴안으시며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어 함께 하시며 역사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롬 5:5)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성령 하나님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그가 우리 안에서 사랑 할수 있는 힘을 부여하시고 우리가 사랑하도록, 사랑의 삶을 살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조차도 사랑하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미국의 한 중환자 병동에 아주 심한 화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십대 초반의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처음 자원봉사를 나온 대학생 한 명이 멋모르고 중환자 병동에 들어와서 (원래 자원 봉사자들은 중환자 병동에는 들어오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이 소년의 기록을 보고 나이를 확인한 다음, 중학교 2학년 과정에 해당되는 영어 문법의 동사 변화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소년이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 순진한 대학생 자원봉사자는 며칠 동안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의사들이 회복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판정을 내렸던 이 소년의 상태가 기적같이 나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주, 두 주가 지나면서 완전히 고비를 넘기고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음에 모두가 놀랐는데, 다들 이 소년의 회복 원인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얼굴의 붕대를 풀던 날 소년에게 그 원인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사실은 저도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한 대학생 형이 와서 다음 학기 영어 시간에 배울 동사 변화를 가르쳐 주기 시작해서 놀랐습니다. 그 형은 '네가 나아서 학교에 돌아가면 이것들을 알아 둬야 공부에 뒤떨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확신했죠. '아, 의사 선생님들이 내가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나에게 다음 학기 동사 변화를 가르쳐 줄 리가 없지.' 그 때부터 마음이 기쁘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고아원에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아이가 있습니까?" 그 물음에 원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네, 있어요. 열살짜리 여자아이인데 매우 흉한 꼽추예요. 단지 이름만은 좋아서 머시 굿페이스(Merch Goodfaith: 훌륭한 믿음의 은혜라는 뜻)이지요." "바로 그런 아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고서 그 아이와 함께 떠났습니다.

35년이 지난 후, 아이오와 주 고아원 감사실의 실장은 한 고아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가정은 매우 특별한 곳인데 깨끗하고, 음식도 훌륭하며 특히 그곳 원장은 사랑이 넘쳐 흐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이곳에 수용된 어린이는 모두 잘 보살펴지고 있으며, 원장은 풍부한 사랑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저녁식사 후에 피아노 앞에 모여 섰을 때 나는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결코 그 원장의 눈과 같은 아름다운 눈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내가 그 원장의 얼굴이 보기 흉하고 꼽추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데 놀라워했다. 그 원장의 이름은 머시 굿페이스이다." 어떤,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추하고 보기 흉한 고아를 보살펴 줄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머시 굿페이스는 사랑의 방법을 배우고 또 그 사랑을 백 배로 증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의 관광객들이 인도의 나환자 촌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간호사 선교사 자매가 나환자들의 피 고름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던 한 중년신사가 이렇게 독백처럼 말을 내 뱉었다고 합니다. "난 백만불을 주어도 저런 짓은 못하겠다" 이때 이 자매가 그 말을 흘려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도 백만불을 받아도 이 짓은 못합니다." 그러자 그가 "그럼 어떻게 그런 일을 하고 계십니까?" 이 자매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성령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사랑을 촉구하십니다.
  
종려주일에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 사랑을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안에서 고난 주일을 보내며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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