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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할 수 있는 사람, 하는 사람 (마 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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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사람, 하는 사람 (마 21:12-17)


최근에는 뜸해졌지만, 한국 교회는 그 동안 대형집회를 많이 열어왔습니다. 1970년대에 서울 여의도광장에서는 무려 백 만 명 이상이 모이는 대형 집회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런 집회가 열리면 찬양대원도 엄청나게 동원됩니다. 여러 교회 찬양대가 연합하여 찬양하는데, 수천 명이 찬양할 때도 있었습니다.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찬양대원이 4천 명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4천 명이었을까요? 역대상 23장 5절을 보면 <사천 명은 문지기요 사천 명은 그가 여호와께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만든 악기로 찬송하는 자들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서 찬양한 사람이 4천 명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준비한 것입니다.  

예수님 때도 성전에는 훌륭한 찬양대가 있었습니다. 비록 과거에 비해 로마 치하에서 성전의 권위가 많이 추락했지만, 여전히 멋진 찬양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찬양의 전문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경에 밝고,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준 높은 찬양 가사를 잘 만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러운 게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얼마든지 찬양을 잘 할 수 있었지만, 막상 찬양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게 본문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본문에는 <잘 할 수 없지만 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성전에서 소리를 높여 찬양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면서 찬양했습니다. 

옛날 우리가 어렸을 때는 구경거리, 놀거리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특이한 구경거리만 생기면 해가 질 때까지 그 주변에 머물곤 했습니다. 뻥튀기 아저씨가 오면 그 분이 집에 갈 때까지 옆에서 구경을 했습니다. 방역차가 흰 연무를 뿜어내면서 달리면 그 독한 소독약을 들이마시면서 차를 따라가던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본문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감람산 벳바게에서부터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따라온 아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왔는데, 그 아이들도 무슨 구경거리가 있나 해서 따라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성전에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왕이 화려하게 완성한 성전이었습니다. 그는 분봉왕이 된 후 초라한 성전을 장려하게 꾸밈으로써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했습니다. 그의 몸 속에는 에돔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유대인들은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런 민심을 알기에 성전 공사에 나섰던 것입니다. 

헤롯 성전은 높은 대지 위에 세워졌고, 빛나는 대리석의 아름다움을 멀리 수 킬로 밖에서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헤롯 성전의 성전 본 건물 크기는 솔로몬 성전 때와 같았지만. 성전 뜰은 솔로몬 시대의 2배나 되었는데, 그 면적이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약 1/6의 면적을 차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본래 성전 뜰은 안 뜰과 바깥뜰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안 뜰은 제사장들의 뜰이었고, 바깥뜰은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의 뜰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헤롯왕 당시에는 제사장들의 뜰, 유대인들의 뜰, 여인과 아이들의 뜰, 이방인들의 뜰로 세분화되었습니다. 바깥뜰의 핵심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아마도 본문의 어린이들은 여인과 아이들의 뜰에서 노래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요? 아이들은 밖에서 사람들을 따라오면서 부르던 그 노래, 하도 불러서 입에 밴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날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호산나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태복음 21장 8절을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노래를 성전 뜰에서도 계속 불렀습니다. 

이 아이들이 찬양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전문적으로 노래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들은 정식으로 임명된 찬양대원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잘 할 줄 모르지만,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균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를 보면 지성과 감정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압니다. 교회 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알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아는 게 많습니다. 또 감정도 풍부합니다. 기도할 때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뻐하면서 찬양합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지가 약합니다. 의지가 약하다보니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삶에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또 예배당 안에서는 감정이 풍부하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감정은 아침과 저녁이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실천이 약합니다. 요즘 우리가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알기는 많이 알고 말은 많이 하는데, 실천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실천은 약한 것>,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미국의 문호 <스티븐슨>씨가 자기 교회에서 본 일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부흥집회가 끝나는 날, 성도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길 원하는 분은 손을 들고 일어서십시오!> 그러자 한 사람이 제일 먼저 일어나서 <하나님께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담임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어떤 일에 헌신하길 원합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자문만 하는 자리라면 무엇이나 좋습니다.> 그러자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입술의 봉사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입술만의 봉사는 헌신이 아닙니다.>  앉아서 자문만 하는 것,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만 하는 것, 그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이게 자칫 전문가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성입니다. 

본문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얼마든지 직접 찬양하든지, 찬양대원으로 하여금 찬양하게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만 꾸짖었습니다. 자신도 하지 않고 남도 못하게 하는 악함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우리는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완전하게, 확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분이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만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독생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난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감질나게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위대한 행위를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는 찬양대를 모두 귀하게 여기지만, 그 중에서 우리 교회에는 특별한 두 찬양대가 있고,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하나는 남성들의 보아스찬양대입니다. 대개 남자들은 노래방식 노래에는 익숙하지만, 악보를 보고 4성부로 노래하는 데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여성에 비해 남성들은 음치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닌 보통 남자들끼리 찬양을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3,40명의 보아스 찬양대원이 있습니다. 

또 자랑스러운 것은 새벽찬양대입니다. 새벽에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새벽에 노래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아마 전문 성악가에게 새벽에 찬양을 부탁한다면 사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 아마추어는 기회만 있으면 부릅니다. 사양하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찬양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새벽찬양대는 귀합니다. 요즘 55명-40명 정도 찬양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무엇이든 <할 줄 아는 것>보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는가>라는 방법론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막상 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짠 법입니다.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데 힘쓰지 말고, <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둘째로, 잘 할 줄 몰라도 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부족한 것을 채우십니다. 

성전 뜰에서 찬양한 아이들의 노래는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노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의 찬양을 온전케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6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은 부족해도 완전케 하셔서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이 하나님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 위대한 이적의 핵심적 메시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자신이 먹으려고 가져온 떡과 생선을 드렸습니다. 식어버린 보리떡과 말라버린 생선은 볼품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그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그것이 얼마나 적은 양인지, 또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생각하고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것을 내 놓아도 비웃음을 받지 않을는지 따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보잘것없지만 과감하게 내 놓았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먹을 것을 가져온 사람이 이 아이 하나뿐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어른들도 먹을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내놓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둘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혼자 먹기 위한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적고 보잘것없는 것을 내놓기 부끄럽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 생각이 많아 행동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욕심 때문에, 때로는 너무 부끄러워 내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적어도 상관없습니다.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낡았어도 염려 없습니다. 그냥 행동하십시오. 드리십시오. 그러면 나머지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워서 사용하십니다.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는 볼품 없었지만, 모자란 것은 예수님께서 채우셨습니다. 그 날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지혜를 채우실 줄 믿습니다. 부족한 능력을 채우실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비록 힘이 부족하지만, 부산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 현장을 위해 도전하고 헌신할 때 기꺼이 우리를 도우시고, 채우셔서 이루실 줄 믿습니다. 부족하다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벽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부족한 중에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찬양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을 채워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기억할 것은 우리도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성전에서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어떤 어른들에게 성전 뜰에서 찬양하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들은 아마 이런 저런 생각만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거룩한 성전 뜰에서 찬양할 수 있나? 여긴 찬양대원만 하는 곳인데, 우리는 비전문가인데 창피하게 어떻게 하나? 여기서 찬양하다가 높은 분들에게 경을 칠지도 모르는데, 난 못해. 안 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신중하다는 뜻도 되지만, 늙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은 이 점에서 어른과 다릅니다. 

<산타포를 찾아서>란 영화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이기적이고 타산적이어서 크리스마스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크리스마스와 산타클로스는 모두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낭만도, 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 중에는 하얀 색의 강아지가 한 마리 등장하는데, 이 강아지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누구에게나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천진난만하여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어린이들,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만 들립니다. 어른들에게는 강아지 짖는 소리로만 들립니다. 영화 속에는 고아원의 여러 어린이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강아지가 짖을 때 다른 어린이들은 사람의 말로 듣는데, 가장 나이가 많은 소녀는 강아지 짖는 소리로만 듣습니다. 다른 어린이들이 에워싸고 말합니다. <왜 못 들어? 왜 안 들린다고 해? 왜 짖는다고 그래? 우린 들을 수 있는데....>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린이들은 어른과 다릅니다. 어린이들인 천진합니다. 아직 체면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아직 고집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깊은 생각보다는 충동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소위 신중한 어른이 되었고,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과 아름다움을 잃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 늙어간다는 것은 느려지는 것, 마지못해 하는 것, 가식적이 되어 가는 것, 생각만 많아지는 것, 자기 생각의 울타리에 갇혀서 새로운 세계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생각은 많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우리가 어린아이가 되길 원합니다. 거룩한 충동을 느끼기 원합니다. 잘 못해도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잘 못해도 <하나님, 제가 해볼께요....>라고 앞으로 나서길 원합니다. 어른들처럼 이것저것 재고, 계산하고, 따지고 앉아있지 않길 원합니다. 

어린이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을 보면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이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이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어른의 교만함, 자기 중심적 태도, 이것저것 따지면서 말만하고 있는 게으름, 다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중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 비결을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른인 우리가 다시 어린아이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요한복음 3장 5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서 물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보혈에 어른으로서 지어온 부끄러운 죄들, 할 줄 안다고 말만하면서 실제로는 하지 않은 많은 죄들, 교만함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길 원합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 맑고 천진한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을 가지고 늙고 탁하고 쉰 목소리가 아닌, 어린이처럼 맑고 맑은 영혼의 목소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길 원합니다. 우리 삶이 그렇게 되길 원합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할 수 있다>고 자랑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행동하고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길 기원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우리 마음과 삶에 영접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 호산나의 찬양을 부르는 어린아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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