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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하라 (신 21:22-23, 고전 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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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하라 (신 21:22-23, 고전 1:22-24)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0년 경 로마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글라디아토르(검투사) 반란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노예로 팔려 검투사가 되었는데 기원전 73년에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하였습니다. 그는 도망친 노예를 모아 반란군을 결성하여 로마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 대부분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반란군이 9만 명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군의 새 지휘관인 크라수스가 반란군을 심리적으로 방해하여 스파르타쿠스 부대가 분열되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와 전면전을 펼쳤고, 폼페이우스 군대가 개입하여 수많은 노예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크라수스에게 붙잡힌 6,000명의 포로들은 비아 아피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스파르타쿠스 영화가 여러 번 나왔는데 영화에 보면 스파르타쿠스와 양아들이 검투사가 되어 결투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상대방을 죽이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기는 사람은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십자가형을 면하게 해 주려고 서로가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멸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절대로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없는 십자가가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십자가가 우리 구원의 상징인 것입니다. 
  
신명기 21:23에는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이고,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조건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고,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 기적,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전 생애가 아름답고 귀하지만 십자가가 아니면 예수님의 전 삶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나를(I) 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16:24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누구나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누구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는데 누가 그 십자가를 만듭니까?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시며 “이거 지고 따라 오너라“고 하십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십자가의 길 말고는 그리고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 말고는 참 생명과 평화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정하면 십자가를 쉽게 질 수 있습니다. 모세가 자신은 입이 뻣뻣하고 말을 하지 못하다고 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보내셨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저부 받을 사람이라고 고백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보내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여 주님께 자신을 떠나라고 했을 때에 주님은 택하여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예수님을 핍박한 자요 죄인 중에 우두머리라고 했을 때에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에 대신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은 그날 우연히 그 길을 지나가다가 운이 없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대신 진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그 십자가가 복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루포가 로마서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성경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냥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한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주일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표적이나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를 전해야 합니다. 

22-23상에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표적이나, 헬라인들에게 지혜는 가장 추구하는 삶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표적도 지혜도 아닌 참 가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가치입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고, 참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표적’이란 사람이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예수님을 찾아와 표적을 구했습니다. 표적을 보면 믿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더 구했습니다. 

마태복음 12:38에는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6:30에는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라고 했습니다. 표적을 보면 믿겠다는 이들에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더 이상 메시야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표적으로는 메시야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혜’는 헬라인들이 얼마나 이성적 증거를 요구하는가를 말해줍니다. 헬라인들은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 되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헬라인들의 가장 큰 이상은 지혜이며 철학입니다. 철학(philosophy)이란 말은 지혜(sophia) 라는 말과 사랑(philos)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즉 철학은 지혜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로는 지적 요구를 충족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이성으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표적과 지혜가 얼마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표적은 아무리 보아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보면 “모세와 선지자를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의 살아남을 볼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면 표적을 보아도 믿지 못합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면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합니다. 지혜는 인간의 삶에 약간의 도움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구원을 방해할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지혜는 오히려 십자가를 가로막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십자가라는 이름 자체는 로마 시민의 몸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눈과 귀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로마 시민들은 십자가형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말은 ‘에스타우로메논’이란 헬라어입니다. 이 말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십자가 못 박히셨지만 지금도 그 대속적 효과가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때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한 그리스도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우리 전할 것, 전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현재적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표적이나 지혜로 설명할 문제가 아닙니다. 
  
표적을 구하는 형식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를 원합니다. 지혜를 구하는 이성주의자들은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도 십자가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영국의 한 예배당 옆에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라는 글을 써놓았다고 합니다. 그 때 교인들은 열심히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얼마 후 시대가 변화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말한다는 것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외치고, 정치를 논하고, 철학을 말하고, 도덕 문제를 설교했습니다. 그 교회 담에 있던 담쟁이 넝쿨이 ‘십자가에 못 박힌’이란 글씨를 가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교회 담에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합니다’라는 말만 남았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어떤 것도 우리의 전파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가 전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도덕주의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문학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고린도전서 2:2에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신비한 표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철학적 지혜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표적이나 지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로지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기로 했습니다. 

  
둘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24절에는 말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표적이나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능력과 지혜를 전해야 합니다.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이나 헬라인이 구하는 지혜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지혜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참 지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전할 가치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얼마나 큰 능력, 얼마나 큰 지혜인지 아십니까? 전 인류를 다 구원할 만큼 큰 능력입니다. 하나의 십자가, 한 번의 십자가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구원할 만한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전 우주를 밝힐 지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이치를 말합니다. 죽음으로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살린다는 인생의 이치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화해의 지혜가 있습니다. 원수가 된 것, 둘이 된 것을 하나가 되게 하는 이치를 십자가는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 지은 인간이 하나가 되게 하는 무궁한 지혜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능력, 이보다 더 한 지혜를 본적이 있습니까? 세상에 이 보다 더 큰 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못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랬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힘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힘을 보세요. 사랑하면 모든 사랑의 덕목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의 힘은 세상을 구하고, 온 인류를 구원합니다. 
  
기원후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7년 만에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공표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아래에서 섬기는 힘의 나라가 칼을 품은 위에 서는 힘의 나라로 변모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세상 권력의 비호를 받게 되자 십자가의 능력은 사라지고, 칼의 능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제국에는 세속적 힘은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은 사라졌습니다. ‘전도폭발’이란 유명한 전도 프로그램을 만든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도 “만일에 기원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복음이 전 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다”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16에는 십자가는 둘이 하나 되게 하시는 능력이 있어 원수 된 것을 소멸하는 지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안톤 레이지라는 30년 동안 연극에서 그리스도 역할을 하는 배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미국의 여행가가 들이 극장을 구경하러 왔는데 아주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짊어진 어느 부인이 일행 중에 함께 왔습니다. 그 부인은 만일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는 자기 남편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멋이 있고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점심시간에 부부가 무대에 접근하였습니다. 남편이 십자가가 있는 곳에 가까이 갔습니다. 남편은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배우가 등에 지고 가는 그 십자가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십자가를 가지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배우 레이지가 다가왔습니다. 여행가는 배우에게 “이건 연극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형제님, 만일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한꺼번에 다 지고 가셔야 했으니 그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이 무거운 십자가가 우리 모두에게 큰 능력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성 시릴은 하나님은 지구를 최대한 끌어안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팔을 뻗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팔이 얼마나 넓으시겠습니까?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사에도 십자가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약한 자가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병이 낫기를 바랍니다. 우매한 자가 지식과 지혜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힘이 없고 나약한 자가 힘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과 지혜가 있는 십자가를 우리가 믿고 전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감히 죄인인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게 합니다. 부끄러운 죄인이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가장 고상한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결론 

‘천로역정’에는 크리스천의 십자가의 체험이 나옵니다. 크리스천이 올라가고자하는 왕의  대로 양쪽에는 높은 울타리가 있습니다. 울타리의 이름은 구원입니다. 크리스천이 올라가는 동안 등에 있던 무거운 짐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워합니다. 크리스천은 쉬지 않고 달려가서 마침내 한 언덕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아래 부분에 무덤이 입을 벌린 체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이 십자가 위로 올라가려는 순간 그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이 벗겨 등에서 떨어져 무덤 입으로 빨려 들어가 다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홀가분함에 기쁨이 넘쳐서 이렇게 외칩니다. “주께서 괴로움을 당함으로 내게 평안을 주셨고 주께서 목숨을 버리사 내게 영생을 주셨나이다”. 십자가에서 무거운 짐을 다 떨어버리고 기뻐 뛰며 노래하며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 주님이 지시고 달리시고 죽으신 그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짐이 다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지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능력이며 지혜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십자가의 주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며 십자가만 붙잡고 사는 순례하는 크리스천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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