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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귀의 꿈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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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의 꿈 (마 21:1-11) 


대중가요지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노래가 종종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해요.

이 노래는 본디 ‘카니발’이라는 그룹이 부른 곡이지만 그보다 인순이가 부른 곡이 더 유명합니다. 물론 인순이가 노래를 잘 불러서 그렇겠지만 무엇보다 혼혈아로 태어나 이 가사와 같은 삶을 산 사람이기 때문에 노래를 영혼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아마 인순이보다 이 노래를 더 감동적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인순이보다 더 감동적으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을 보았습니다. 수요예배 때 영상을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바로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라는 방송에 출연해 이 노래를 부른 김지호라는 소년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녹내장을 앓아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이날 그는 모두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한빛빛소리중창단’과 함께 출연했는데 이 친구가 부르는 이 노래는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감동시키고, 특히 인순이조차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타고난 신체적 핸디캡 때문에 절망할 수도 있었던 김지호 군이 이렇게 소망을 가지고 노래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김지호 군은 이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다들 포기하라고 할 때 운명 앞에 당당히 맞서 언젠가 푸른 하늘을 날아가고 말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꿈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타고난 운명이 너무 힘들어서, 나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남들이 나에게 “넌 안 돼, 포기해”라고 말할 때 주저앉고 싶지는 않습니까? “나 같은 게 꿈은 무슨 꿈”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꿈을 꾸며 언젠가 날아오를 수 있다는, 언젠가는 나도 반드시 하나님께 귀히 쓰이고 말겠다는 꿈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이 ‘거위의 꿈’ 같은 이야기가 하나 등장합니다.

❚나귀의 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종려주일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아주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주님을 그토록 열렬히 환영한 유대인들 외에도 감추어진 또 하나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아니, 인물이라고 하면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차라리 ‘등장동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등장동물은 바로 나귀입니다. 그런데 종려주일의 배경이 되는 이 사건에 등장하는 나귀라는 짐승은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요 위엄도 멋도 없는 천한 가축에 불과하지만 그 누구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 등장하는 나귀를 통해 종려주일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나귀는 겸손과 낮아짐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그 생애의 마지막 주를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서 제자들을 보내 나귀를 끌고 오게 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나귀를 타고 들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려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바로 구약성경 스가랴서에서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스가랴서 9:9에서 이렇게 예언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선지자에 의하면 유대인의 왕이 예루살렘에 오실 텐데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나귀’라고도 부르는 이 짐승은 말과 같은 과에 속한 가축이지만 말보다 훨씬 크기가 작고 보잘 것 없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귀는 물건을 나르거나 가나한 일반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데 사용했지 결코 왕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탈 짐승은 아니었습니다. 왕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모두 다 위엄 있는 커다란 말을 타고 다닌 것이지요. 그러니 만약 예수님이 보통 왕이었다면 자신의 권위와 위엄을 위해서라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말을 타고 들어오셨을 텐데 하필이면 이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왕은 왕이로되, 구약에 예언된 구세주인 메시야는 메시야시로되 어떤 왕이며 어떤 메시야이신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왕으로 오시되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통치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겸손의 왕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둘째, 나귀는 철저한 순종과 헌신을 상징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며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절과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그렇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합니까? 나귀 주인이 염연히 존재하지만 주인조차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즉시 보낼 수밖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이유로도 토를 달거나 핑계를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쓰시겠다는데 토를 달거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건 내 건데요”라거나 “제가 써야 하는데요”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래서는 결코 순종과 헌신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셋째, 나귀는 “오직 주님께 영광”이라는 자세를 상징합니다. 제가 나온 장로회신학대학교의 모토가 “Soli Deo Gloria”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자들이 이 모토를 가지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왜냐? 중세의 로만가톨릭, 즉 천주교는 ‘오직 하나님’이 아닌 너무나 많은 다른 것들이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대신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교황이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차지했고, 성모 마리아나 수많은 성인들이 하나님만 받으셔야 할 영광을 대신 받았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무엇보다 이 모든 영광을, 사람들이 가로챈 하나님의 영광을 본디 제자리인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모토를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가 도대체 이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주님께 영광”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일까요?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 해보셨습니까?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수많은 무리들이 길가에서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가지를 흔들고 열렬하게 환영하지 않습니까? 혹시 그 순간 나귀가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하는구나” 하고 어깨 으쓱하지는 않았을까요? 아니지요. 나귀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지요? 바로 내 등 위에 태운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에게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 받고 박수갈채를 받는 것은 나 자신 때문이 아니라 오직 내 등 위에 주님을 태우고, 모시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주님이 받으실 환영과 영광을 대신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바로 이 나귀처럼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그 분을 내 등 위에 모시고 가는 일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영광 돌리고 나는 사라집니다. 오직 주님만이 사시고 나는 겸손히 죽으렵니다.” 할 때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고 나도 주님 받으신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귀가 되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으며 우리는 깨닫습니다. 우리가 기꺼이 주님의 나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귀가 받은 갈채와 환영은 등 위에 태운 주님 때문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모시고 그 분을 위해 기꺼이 낮아지고 죽어질 때 주님 받으신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음을 말입니다. 주님 받을 박수와 영광을 내가 대신 받으려는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도, 심지어는 자신의 성공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주님을 타고 가려는 이 세대 속에서도 우리가 기꺼이 주님을 태워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귀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요? 내가 비록 천한 짐승이지만, 남들이 무시하고 깔보는 존재지만 주님을 내 등 위에 모시면 당당히 사람들 앞에 서서 이 세상의 가장 존귀한 존재로 박수 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꿈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앞으로 이렇게 성공해야지, 이렇게 잘 돼야지”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꿈을 꾸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까지 함께 살펴본 요셉의 꿈처럼 말입니다. 오늘, 귀한 종료주일에 이런 꿈을 함께 꾸며 기꺼이 주님의 나귀가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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