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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 가장 뛰어난 이름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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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가장 뛰어난 이름 (빌 2:5-11)

 
우리는 성공주의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만 성공에 골몰하고 있는 시대, 성공에 집착하고 있는 시대, 성공주의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이 연속해서 자살하고 교수까지도 자살한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입학하기 어렵고 모두가 부럽다고 여기는 대학교, 최고의 지성과 학문을 자랑하는 대학교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그들의 삶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좌절감과 그동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던 모습들이 어느 날 순식간에 무너져가는 것에 대한 깊은 자괴감이 그들로 하여금 불행한 선택을 가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재미있게 본 영화 한편이 있습니다. “킹스 스피치”라는 영화입니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탄 영화인데 현재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지 6세가 아직 왕이 되기 전, 그는 앨버트 왕자였습니다. 그는 엄격한 아버지 조지 5세 밑에서 자랐고 재능있는 형 사이에서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힘들게 자랐습니다. 능력은 많았지만 몸이 연약했고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더듬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형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이혼녀와의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20세기의 아주 유명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앨버트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때가 1936년이었습니다. 당시 라디오가 처음 발명되었는데 영국을 대표하는 왕은 대중 앞에 나가서 연설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을 더듬었던 앨버트 왕자는 대중 앞에만 서면 완전히 오그라들었습니다. 그에게 연설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였습니다. 말을 더듬는 현상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어렸을 때 형과 비교하면서 지녔던 열등감이 알게 모르게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아내가 격려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그는 괴짜 의사를 만나고 서서히 회복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 영화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조지 6세로 취임하기 전, 연설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안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어치료사와 실랑이를 벌이게 됩니다. 보다 못한 언어치료사가 의도적으로 왕이 앉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왕자가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너 같은 평민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 그랬더니 언어치료사가 의자를 둘러보더니 웃으면서 말합니다. “아니, 낙서만 잔뜩 있는 의자인데 뭐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그러면서 자아의식에 꽉 묶여져있었던 조지 6세의 생각들을 끌어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자존심에 꽉 붙들려있었던 조지 6세의 생각들은 언어치료사를 통해 하나 하나 풀려가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말더듬는 장애도 극복해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성공주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공에 엄청나게 집착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더구나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분야에 성공한 사람들을 향해서 박수를 칩니다. 칭찬을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좋은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쟁에 뒤진 사람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인생에서 비난받으면서 살아야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공이란,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일까요? 성공주의는 1등만이 살아남게 되어있습니다. 2등을 하면 괴롭습니다. 엄청나게 자신을 자학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 자체가 살벌해집니다. 

성공이란 것은 과정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성공만이 인생을 지배하지는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도 수없이 많은 실패의 과정 속에서 성공이라는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성공은 소중한 것이지만 성공주의에 집착하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공의 목표를 어디에 두는가?’ 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명백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성공입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아이들의 호감을 사는 것. 
솔직한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고 
미덥지 못한 친구들의 배반을 참아 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간에 
세상을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 
자신이 살았었기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좀 더 마음 놓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삶을 즐거워하고 그 삶을 누리는 것이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따듯하게 친구를 보면서 미소한번 짓는 것, 자녀를 따뜻한 마음으로 안는 것, 아내와 남편을 보고 미소를 짓는 것이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내게 주어진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내가 태어난 그때 보다 내가 있음으로 인해서 더 축복받은 땅으로 바뀌어 놓는 역할들을 내가 했으면 그게 성공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성공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남을 행복하게 하고 당신이 있음으로 이 땅에 축복을 주신 인생에 최고의 성공자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뛰어난 분입니다. 가장 놀라운 이름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레고 기대됩니다. 실망하고 낙심될 때 예수님을 생각하면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분,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주시는 분, 우리가 낙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할 때 포기하지 말고 담대함으로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고 초청하시는 분, 바로 그분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면 어떻게 그가 성공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실패자요 인생의 낙오자처럼 보입니다. 정말로 저렇게 살아도 되는가? 고난과 역경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것이 어떻게 성공인가? 33살의 청년의 나이에 자신의 인생을 끝마치는 것이 무슨 성공인가? 많은 사람들이 혐오했던 십자가, 사형수마저도 거부했던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무슨 성공자인가? 세상에서 있었던 잠깐의 인기도 사라지고 사람들이 외면했던 그 사람이 무슨 성자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예수님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신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높이셨습니다. 가장 낙오자처럼 보이고 가장 실패자처럼 보였던 그의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원과 희망과 용기를 준 생명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확인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9~11) 

하나님께서 십자가 달린 예수님을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그분에게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낮아짐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비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강제적으로, 억지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8)

어떤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보면서 예수님이 자살의 길을 갔다고 괴변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몸을 자해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뜻을 향하여 가다가 부딪히고 도전하면서 죽음의 길을 가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낮아짐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반대로 갑니다. 우리는 높아지려고 합니다. 낮으면 낮을수록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런데 가장 높은 자리에 계셨던 예수님은 낮아짐을 택하셨습니다. 당신이 가지셨던 명예와 특권,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셨을까요? 우리를 웃게 하고 울게 하는 세상의 값싼 성공주의를 타파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천박한 경쟁주의에 집착해서 사는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인생이 업적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사는 것임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는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100% 겸손한 사람, 100% 교만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속에 겸손과 교만이 끊임없이 다투고 있습니다. 교만이란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허세이자 과장인 자기 뽐냄입니다. 소극적으로는 내면에서 자기 열등감, 자기 연민 그리고 자기 가학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인생을 좌초시킵니다. 둘 다 교만의 표증입니다. 

그러면 겸손이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적 표현은 이렇습니다.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태도.” 겸손은 자만하거나 건방지지 않고 점잖으며, 성공했지만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겸손도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반대로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겸손이란 이것보다 더 위에 있는 겸손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무한하신 분인 것을 깨달으면서 인간은 때가 되면 아침이슬처럼 꺼져갈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겸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립보서 2:6)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처럼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임에도 하나님처럼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의 길로 우리를 향해서 찾아 내려오셨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당신의 정체성이 명백했기 때문에, 그의 삶은 내려와서도 당당했습니다. 겸손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아도 우쭐하지 않는 것, 또한 반대로 이웃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아도 마음의 상처를 받고 그것 때문에 한 맺히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 앞에서 남이 칭찬하면 감사함으로 받고, 남이 조롱하고 비난해도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자신을 향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이 가야할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길입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입니다

또 겸손이란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입니다.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절제하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저 못된 놈들! 다 뒤집으시죠! 불을 내려서 다 망하게 하시지요!” 라고 말했을 때조차 예수님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다리셨고 참으셨습니다.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겸손입니다. 

존 베일리는 겸손과 교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뒷면이다.” 하나님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뒷면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만이란 무엇일까요? “교만이란 자기 자아에 대한 확신의 뒷면이다.”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잘되면 자기 때문이고 안 되면 불평과 불만 속에 빠져 인생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잘 되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잘 되지 아니해도 기다림으로 자신의 삶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이것이 겸손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절제된 비전을 갖는 것이 겸손이라면 무절제한 야망을 갖는 것이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이란 자기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다 쓰지 않고 준비시켜놓는 것이 겸손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에는 무한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모를 보여주는 것에는 가능한 한 절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골고다의 언덕에서 당신이 수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최고의 이름을 믿고 있습니다. 뛰어난 이름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여 하나님의 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아니, 스승이라고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절망감과 무력감을 타파하셨습니다. 우리의 경쟁적인 성공주의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인생에서 값진 존재인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인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존재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이웃에게 사랑을 증거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우리가 너무 성공주의에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까? 경쟁에 연연하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무너뜨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금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사랑의 은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놀라운 생명의 은총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부활절을 새롭게 맞이해야할 것입니다. 

내일부터 수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세 가지 권면을 해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동안 한 번도 새벽기도에 나오지 못하셨던 분이 계십니까? 새벽기도에 나오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받기 원합니다. 첫사랑을 다시 회복하고 말씀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집이 너무 멀어서 나오기가 힘들면 인터넷을 통해서 함께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입니다. 이번 수난주간에 건강에 지장이 없는 분들은 하루 한 끼씩을 금식해보시기 바랍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 분들은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금식하시는 분들은 보통 한 끼에 3,000원짜리를 잡수셨다면 약 18,000원, 5,000원짜리를 잡수셨다면 30,000원 정도를 아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주위의 연약한 사람에게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세 번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하나님을 향해서 외쳐보십시오. “하나님 사랑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입니다! 제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주십시오!” 가슴을 펴고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누리면서 부활절의 기쁨을 다 함께 만끽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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