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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 고난의 길(2) (베다니의 예수) (막 1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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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고난의 길(2) (베다니의 예수) (막 14:3-11)


우리는 지금 역사 속에 주어진 여러 시간과 공간 중에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한 주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보통 교회사는 이 주간을 수난 주간(The holy week)이라고 합니다. 
모든 지상의 교회들은 이 주간을 기억하면서 경건의 옷을 입게 됩니다. 사복음서의 3분의 1정도가 일주일 동안의 수난사건의 기록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21장 중에서 약 2분의 1이 일주일에 걸친 수난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Ⅰ. 가룟 유다의 배신이었습니다. 

1) 그는 예수께 부름을 받은 제자입니다. 
본문 14장 10절에 『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라고 했습니다. 
복음서는 가룟 유다를 예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2) 그는 예수께 경고를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5절에 『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푸신 기적의 역사 후에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떠난 사실을 제자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을 떠난 군중들은 썩는 양식을 보고 따르던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군중이 떠난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께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가룟 유다를 가리켜서 『 한 사람은 마귀니라 』고 했습니다. 

3) 그는 돈궤를 맡은 자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 『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9절에 『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라고 했습니다. 그는 재정업무를 맡은 자입니다. 

4) 그는 위선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 『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라고 했습니다. 
베다니 잔치에서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고가의 향수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가룟 유다는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허비한다고 책망했습니다. 이때 그는 분을 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여기에 동조를 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의 구제를 빙자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위선자였습니다.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5) 그는 애찬의 암초였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1절에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6) 그는 도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 『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고 했습니다. 

7) 그는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라고 했습니다. 

8) 배반자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3-24절에 『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는 은 삼십을 받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께로 악당을 안내했습니다. 

9) 그는 저주의 천벌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8절에 『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고 했습니다.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고 넘어져 배가 터져 창자가 나왔습니다. 

10) 가룟 유다의 배신의 이유입니다. 
(1) 불신앙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 64절에 『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주의 제자로서 주를 따르며 그의 교훈을 받았고 어느 때는 그도 복음을 전하고 신유의 은사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유다가 처음부터 주를 믿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믿지 않은 것은 한 번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의 근본이 신앙이 아니고 불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특성은 배신입니다. 

(2) 돈을 사랑함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9절에 『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을 복음서 기자들은 의도적으로 보도(報道)합니다. 그는 평소에도 돈궤를 맡고 그곳에 넣는 것을 훔쳐가는 도적이었습니다. 이런 도둑에게 이상하게 주님은 돈궤를 맡겼습니다. 
이는 후세의 사역자들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였을 듯합니다. 그가 주를 따름은 신앙이 아니요 주를 이용하여 돈을 얻으려는데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入城) 이후 주님에 대한 이 기대가 무너지자 최후의 수단으로 은 삼십을 받고 주를 팔기에 이른 것입니다. 

(3) 인격(人格)의 결함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9절에 『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아무리 불신앙의 사람이었고 돈을 사랑한다 해도 인격적(人格的)으로 결함이 없었다면 이러한 배신에 이르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의 인격의 결함은 본문에서 여러 각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검과 뭉치를 든 대적들을 이끌고 그의 동지들이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옴으로 그의 동지들을 배신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라고 말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행위(行爲)는 주를 대적들에게 넘기기 위한 군호였습니다. 그의 위선과 거짓된 인격, 파렴치한 양심이 이 행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4) 사탄의 꾀임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7절에 『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또 하나의 이유는 사탄 때문이었습니다. 마귀는 가룟 유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항상 약한 부분을 통해 침투합니다. 예수님의 무리 중에 유다가 가장 약한 것을 알고 그에게로 침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탄의 침투도 항상 동일합니다. 

Ⅱ. 여인의 사랑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여자는 요한복음 12장 3절에 의하면 나사로의 누이이자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로 밝혀졌습니다. 
이 향유는 매우 귀한 향유라고 했습니다. 이 향유는 나드향이었습니다. 이 향유는 주로 왕과 같은 고귀한 신분에게 바쳐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캄비세스가 에디오피아 왕에게 보낸 다섯 가지 선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나드향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향유 한 옥합의 가격이 300데나리온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300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일년 품삯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 12장 3절에는 예수의 발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름은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몸 전체에 붓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기름 붓는 부위가 문제가 아니라 기름 부음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향유를 붓는 여러가지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거룩하게 하는 고대적 예식으로 향유를 붓습니다(창 28:18). ② 제사장들의 의식적 성별에 사용되었습니다(레 8:12). ③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붓습니다(왕상 19:16). ④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붓습니다(왕상 19:16). ⑤ 손님을 환대하는 예의로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눅 7:46). ⑥ 전통 장례법에 따라 시신에 바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요 19:40). 

이 여인은 순수하게 예수께 대한 다함이 없는 헌신과 사랑의 표로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는 예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구속사적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분노했다고 했습니다(요 12:4). 가룟 유다가 이러한 불만의 주동자였습니다. 제자들의 분노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흉악히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두로의 이방 여인에게 시끄럽다고 분을 내었고(마 15:23) 어린 아이들을 주께 데려왔을 때도 그러했습니다(마 19:13).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의 제안에 대해서도 분을 내었습니다(마 20:24). 이러한 일은 제자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화를 낸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머리에 붓는 향유에 대해서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마 26:8)라고 했습니다. 

여기 '허비하다' (아폴레이아 )라는 말은 조금도 생산적인 기대를 할 수 없는 완전한 낭비를 의미합니다. 무용하게 모두 소모해 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제자들의 관심이 오직 노동자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그 물질에 집착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실로 그들의 물질 중심의 평가는 신앙중심, 사랑중심의 한 여인의 순수한 마음을 무참히도 짓밟아 버렸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무지는 자기 만용과 이웃과의 관계 파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마태복음 26장 9절에 『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신앙적이고 현세적일뿐이었습니다. 얼마 후면 일어나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그들 곁에 있지만 하나님의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에게 공궤할 기회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제자들보다 생각이 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불평하는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마 26:10).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셨습니다. 
①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 ②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③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 26:13). 

이 여자의 행위에 대한 가치와 당위성에 대하여 예수님이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아낄 때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하는 것을 아껴서는 안 됩니다. 최선의 것을 가지고 섬겨야만 합니다. 아무데나 인색한 것은 버릇없는 일입니다. 
여기에 한 여인은 베다니의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은 수요일에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에게 매우 값진 향유 곧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에게 부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사랑의 행위에 대해 중요한 진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1) 사랑은 고가의 희생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6장 7절에 『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라고 했습니다. 
(1) 매우 값진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삼백 데나리온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2) 순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3) 깨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4) 괴로움은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와 제자들은 이 여자를 괴롭게 했습니다. 

(5) 그것은 예수 중심이어야 합니다.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6) 그것은 자기 힘을 다하여 쏟는 것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에 『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고 했습니다. 
결코 사랑은 이해타산으로 계산되지 아니합니다. 기회주의적으로 변색하지 아니합니다. 공명심도 없습니다. 기독교가 한 걸음 앞선 서구에서 재산을 교회에다 바치는 것은 이러한 사상에서 기인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자신의 재산을 쏟고 가는 것입니다. 

2) 사랑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10절에 『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고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이르시기를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아무 때라도 너희가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마리아의 사랑의 행위가 마지막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을 쏟는 사랑의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충동, 개혁의 충동, 선행의 충동, 좋은 일의 충동, 결심의 충동이 일어날 때 행동으로 옮겨 버려야 합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3) 사랑은 십자가적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8절에 『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니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주님의 십자가에 불을 피웠습니다. 

4) 사랑은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13절에 『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9절에 『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 여자의 사랑의 행위가 죽지 않고 널리 전파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흔적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고가의 희생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는 죽음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이 사랑을 그녀가 깨뜨려 쏟은 옥합의 사랑을 통해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자신을 깨뜨리는 고난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가 올 때는 그만큼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 기회가 됩니다. 배신하는 자도 부름 받은 무리 중에 있습니다. 배신은 마귀의 본성입니다. 배신은 신앙이 아니고 교권주의자(대제사장)쪽입니다. 배신자는 악의 두목입니다. 결국에는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는 영벌의 기업을 받은 자입니다. 
사랑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항상 십자가 예수를 중심(中心)으로 움직입니다. 사랑은 고가의 희생입니다. 그 사랑은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참사랑은 권태롭지 아니하고 지루하지 아니하고 모두에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는 소문이 납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 『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 사랑실천의 광장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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