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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제자입니까? (막 8: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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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입니까? (막 8:27-38)


학생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살다 보면 세속적인 가치와 삶의 방식에 알게 모르게 젖어 들어 신앙생활이 흐트러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전에 있는 사순절이 회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기 좋은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곁을 떠날지라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자동적으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순절 셋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하는지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고 있는지 살펴보고 각자가 주님의 참된 제자인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1. 제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논쟁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을 꾸짖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시면서 그를 꾸짖습니다. 복음서에 흔하지 않은 이런 장면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을 크게 둘로 나눌 때 보통 오늘의 본문이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시작하십니다. 벳새다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가이사랴 빌립보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은 벳세다에서 북쪽으로 한 25마일쯤 떨어진 헬몬산 서남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요단강 물 근원 중 하나인 헬몬강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알렉산더가 정복한 후에 재건되었고 풍요를 상징하는 헬라 신 판(Pan)을 기려 파네아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 성읍을 헤롯 대왕에게 주었고 그는 흰 대리석으로 웅장한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 후에 그의 아들 헤롯 빌립은 이 성읍을 확장하고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온갖 우상 숭배와 로마 권력의 영향으로 가득한 이 도시에 오셔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영적인 문제뿐 아니라 육신적인 문제도 해결하셨습니다. 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예수님은 오병이어 이적을 통하여 굶주리고 지친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시며 에스겔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사 35: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예수님께서는 귀머거리와 반벙어리, 소경을 고치시며 이사야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또한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난 삼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으면서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였기에 예수님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막 8:17) 하시며 답답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영광을 생각나게 하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며 먼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십니다. 제자들은 평소에 듣던 대로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며 전에 세례자 요한이 전하던 것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시니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엘리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권세 있는 가르침을 듣고 또 큰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나마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만을 보고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방을 하였습니다. 누구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당신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더불어 삼년 가까이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사역에 동참했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가복음보다 나중에 쓰인 마태복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 참된 구원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당신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으로 위대한 고백을 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메시야의 이미지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왕으로서의 메시야와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의 정의를 회복시킬 육신적인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도저히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하실 수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종교지도자들, 즉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다.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까?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르시면 그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자기들도 무엇인가 영화를 누리지 않을 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 이하를 보면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면서 가버나움에 도착하여 어느 집에 머무실 때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불쌍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 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수난의 길인데 제자들은 그 길을 영광과 지위를 차지하는 길로 생각했습니다. 사 복음서에 제자들의 자리다툼이 다 언급되는 것을 보면 주님께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신 것 같습니다. '누가 크냐' 논쟁을 벌일 때 제자들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했겠습니까? 가시가 돋친 말을 했을 것입니다. 남을 밟아야 자기가 올라서기에 지난 3년 동안 자기들이 관찰한 상대방의 문제점이나 허물을 끄집어내며 흠집 내기에 열을 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도 이런 논쟁을 벌였는데 만약 예수님이 안계셨다면 아마 멱살을 잡고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제자들이다 보니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신다는 말을 들으면서 어떻게든 예수님을 말리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질 급한 베드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그러시면 안 된다고 따집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베드로의 말을 얼핏 들으면 예수님을 위하여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숨은 동기가 무엇입니까? 이제부터는 예수님 때문에 한 자리 하고 싶다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지긋지긋하다는 겁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시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 혈기를 부립니다. '항변하다'로 점잖게 번역되어 있으나 꾸짖는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단호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돌아서시더니 제자들을 보시고 나서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8:33)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졸지에 사단이라고 불립니다.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지혜로 답변했을 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고백을 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제쳐둔 채 인간적인 생각이 앞섰을 때 예수님을 실망시키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방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앞세울 때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마 4:8). 

고통 없이 수고하지 않고 온 세상을 준다고 약속하여 예수를 유혹하던 사단의 태도와 지금 베드로의 태도는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 제자는 스승 뒤에 있어야 합니다. 제자는 뒤에서 스승을 따라야 합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위치가 바뀔 때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곳이 가정이든지, 교회든지, 사업장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런 실수를 범하였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사단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많은지요? 

제자들의 오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메시야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제자들과 같은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지는 않습니까?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 참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2.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메시야인지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어떻게 따라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무리를 제자들과 함께 부르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1)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은 자존감을 버리고 무조건 자기를 낮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금욕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의 욕구를 무조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란 자기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의 만족만을 위하여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손해요 자신을 잃는 것 같이 여겨지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진정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자기 부인의 본을 보였습니까?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4:6절을 보면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반면에, 총독 빌라도는 정치적 야망이 그를 주관하였기에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줄을 알고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함으로 영원히 후회할 만한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내가 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다스리도록 나를 주님께 내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처형당하는 장소까지 가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이 전에 반항했던 권위에 복종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함을 뜻했습니다. 제자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신 구속의 사역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헬라어 원문을 보면 34절에 3개의 명령형이 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예수님을 좇으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지금 당장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순간부터 당장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기의 권리를 유보하고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주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표현도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고 지금 당장 주님을 따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예수님을 좇으라"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만나게 된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 뜻대로 계속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3. 제자는 목숨을 잃음으로 목숨을 얻는 사실을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의 삶은 순종의 삶이요, 희생의 삶이요, 헌신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5-36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어리석은 행위로 보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한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을지 몰라도 주님의 제자는 될 수 없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것”과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우선순위를 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으며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신 예수를 본받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매순간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예수님께만 순종, 희생, 헌신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을 포함합니다. 복음을 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그를 위하여 살 때 예수님도 우리를 시인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렇지만 자기만을 위한 삶은 본인에게는 만족을 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는 아무 것도 보여줄 것이 없는 면목 없는 삶이요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한때 잘 나가던 사람들이 추잡하거나 초라한 모습으로 추락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자신이 당할 수난을 밀알의 비유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기에 십자가에서 기꺼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 된 성품이나 습관들을 다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비우면 비울수록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마지막 날 주님께서 심판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우리를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 때문에 가족이나 이웃으로부터 멸시나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융통성이 없이 콱콱 막혔다고 조롱을 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손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영생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 한 수고를 인하여 상급을 주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잃는 것이 도리어 자기를 얻는 삶이요, 제자의 삶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이요 신앙의 신비입니다. 제자의 삶은 특별하게 고난을 당하고 순교를 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과 하나 되어 자기의 옛사람을 따라 살지 않고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드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주님의 질문은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주님의 질문은 “주님이 우리를 누구라 하시느냐”는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세상의 가치관으로 우리의 눈이 가리어질 때 우리는 주님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것이 필요하지만 보다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갔던 제자들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조롱하고 모욕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무리들처럼 주님에게 표적만 구하는 신앙인은 아닙니까? 입술로는 예수님의 제자처럼 치장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거짓 제자는 아닙니까? 거짓 제자들은 말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떠벌이면서 실상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참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참 제자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갑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과 골고다까지 따라왔던 여인들처럼, 주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주님이 맡기신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끝까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으신 주님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곳에 오심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영적인 통찰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No cross no life. 십자가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원합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 가진 것들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려는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기보다는 세상을 얻으려고 주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과 삶을 본받아 섬김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자신을 부인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내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회개하고, 기도하고, 때로 금식하고, 자선을 베풀며 어느 때보다 뜻 깊은 사순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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