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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신앙은 우리를 바꾼다 (고전 15:1-19, 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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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은 우리를 바꾼다 (고전 15:1-19, 57-58)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금요일 오후 3시쯤 운명하셨습니다. 그날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운명하시고 안식일이 시작될 때까지 불과 3시간 정도의 여유밖에 없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둘러 시신을 장례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굉장히 촉박했습니다. 

유대나라도 매장이 있었기에 가난하고 보통 사람인 경우 그냥 땅을 파서 묻어버리면 끝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존경하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를 위해 파 놓았던 동굴 무덤을 기증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동굴에 무덤을 만들고 거기에다가 선반을 달아서 시체를 안치했습니다. 마침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 무덤에 장사하기를 원하여 이제 급히 장례 절차를 밟고 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라는 경건한 사람이 찾아와 마치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대우하듯 많은 향료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수위를 싸고 두건을 씌워 정중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장례 지냈습니다. 이 일에 여인들이 와서 함께 거들었습니다. 그리고는 10~20명 되는 장정들이 매달려야 겨우 굴릴 수 있는 큰 돌로 동굴 무덤 아귀를 막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급하게 장례를 끝냈습니다. 

예수님을 장례 한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무덤을 막은 돌을 굴리고 다시 살아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남자건, 여자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장례와 함께 예수님의 시대는 끝이 났고 예수님의 생애도 종말을 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 되던 날 아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을 먼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실제로 무덤에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무덤으로 급히 와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시체는 온데 간데 없고 비어있는 무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위와 두건만이 고스란히 누웠던 자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몇 사람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자기가 부활하신 것을 실제로 입증해주셨고, 여인들 중 몇 사람에게도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이 사실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만나주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이 사울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20여 년이 지나고 난 후,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본문 15장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25년이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나신 것을 목격자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야고보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등, 전부 일일이 기록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한번에 오백 여명이 될 때도 있었는데, 아직 그들 가운데서 반이나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이 안 믿어지면 앞서 생존해 있는 그 목격자들을 만나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오늘 15장의 내용을 가지고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안 믿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그래서 복음을 막론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안 믿으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여러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온 천하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런 삭막한 분위기에서 바울로부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예수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었기에 그들이 다 세례를 받고, 고린도교인이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안에서 조차 예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부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말이다. 부활은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답답해가지고, 바울이 지금 고린도전서 15장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날조된 학설 내지는 종교적인 맹신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 특별히 머리가 비상한 학자들 중에는 평생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까운 인생을 다 날려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실과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 학자의 생활을 했다면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거짓말로 증명하려고 평생 학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특히 독일에는 부활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평생 머리를 싸매고 달려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를 연구해서 박사나 교수,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왜곡하고 잘못된 것으로 증명하여 세상적으로 학자, 박사가 되면 뭐하겠습니까? 정말 그들이야 말로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절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복음서를 읽다 보면 이야기가 제각기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입을 맞추어 거짓을 진실처럼 꾸미려고 하면 그런 식으로 기록해서는 안됩니다. 어설프기 끝이 없는 기록들을 복음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의 이름을 보면 사복음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간 시간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곳는 새벽 일찍이 갔다고 하고, 어떤 곳은 해가 돋아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만났다는 천사의 숫자도 틀립니다. 어떤 기록에는 천사 한 명을 만났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는 두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천사가 있던 위치도 다릅니다. 어떤 기록은 천사가 무덤 안에 있었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는 천사가 굴러낸 돌 위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은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을 날조하려고 조작했다면 이렇게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증명하려고 하는데 여자를 앞세워서 되겠습니까? 요즘 같이 여권이 큰 소리를 치는 때는 여자 말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여자는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법정에서도 여자를 증인으로 채택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여자 말은 안 듣기로 작심을 한 시대입니다. 그런 마당에 여자들을 내세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날조됐거나 조작됐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하나도 꾸밈 없이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서로의 말들은 좀 틀려도 확실한 결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이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소문이 난 것은 예수님이 처형 당한 지 사흘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현장이 예루살렘에서 수백 리 떨어진 갈릴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 곳에서 나온 이야기라면 예수님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너무나 그리워서 만들어낸 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그것도 예수님이 처형당한 예루살렘 현장에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 말을 겁 없이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직도 형장에는 핏자국이 낭자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자고 소리치던 폭도들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있습니다. 빌라도와 대제사장이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무덤가에는 병정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는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함부로 떠들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발각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제자들은 두려운 나머지 방안에 틀어 앉아 자기들도 잘못하면 예수님처럼 끌려가지 않을까 하여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판국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소리를 함부로 합니까? 그런데 그런 현장에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그런 말을 하는 여인들이 습니다. 그것이 진실이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이 그런 소문을 듣고도 조용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군인들도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무도 여인들과 제자들의 주장을 반박해서 뒤집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요. 왜 그렇습니까? 변명을 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 기록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날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날조된 사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물론 학적으로 굉장히 높은 수준에 있는 학자들의 이야기이므로 쉽게 읽을 수는 없지만 한번 읽어보면 우스워서 못 읽을 정도입니다. 그것을 말이라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증명하려면 그럴 듯한 소리를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지고 똑똑한 것처럼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형당한 그 도시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 사실을 생명 걸고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이 뭉쳐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에 관한 신앙은 교회가 세월과 함께 만들어낸 신앙이 아닙니다. 

C. H. 도드라는 유명한 학자가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이긴 하지만 중생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서 이렇게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부활신앙은 교회 안에서 막연히 생긴 믿음이 아니다. 막연히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부활신앙은 교회를 존재하게 만든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부활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이 지상에 등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부활을 믿지 않는 것보다 믿는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분들 가운데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은근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거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 다만 아내의 권유에 밀려 억지로 교회에 나오다 보니 약간 믿기는 하지만 그게 있을 법한 일이겠어? 그냥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존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그러리라고 믿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가지고는 구원을 못 얻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도 예수님을 못 만나야 됩니다. 그런데 엄연히 살아계신 주님을 본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논증을 인용하겠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아무도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다 쓸데 없는 것이 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계시기에 우리의 예배가 아름다운 것이고, 우리가 주의 날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계시기에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양으로 살든 상관없이 항상 꿈과 희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을 당해도 낙망하지 않고 일어서서 믿음으로 인생 길을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저 정도의 나이가 되면 인생을 내려다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인생을 좀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깁니다. 젊었을 때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은 나이가 되면 인생이 정말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유명하다는 것도 쓸데 없고, 성공했다는 것도 별거 아니고, 잘 산다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한 때 건강하다는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것도 다 지나가는 것이고, 물거품 같은 것입니다. 설혹 실패하여 힘들게 살아도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입장에서 '세상은 너무 허무하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너무 악하다. 너무 잔인하다. 도무지 세상은 마음을 줄만한 것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자살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는데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이 기독교라면 저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살기 위해서라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것 좀 붙들고 싶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살만한 힘이 좀 생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 계신다. 그 분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해주신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나는 그 이야기를 믿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은데, 진실이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살 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고, 항상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대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찬송가 150장)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그 살아계신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그 살아계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부활신앙은, 필립 얀시가 표현한 것처럼, 이 세상의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심지어 죽음 마저 뒤엎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곧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그 부활이 나를 바꿉니다. 크게 다음 3가지 면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로 죽음을 승리자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7절) 여기에서 이김을 주신다는 말은 죽음에 대한 이김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죽음을 승리자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죽음을 향해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죽음이라는 것을 떼놓고 어떤 문제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생명과 죽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명이 있습니까? 죽음이 있습니다. 태어납니까? 죽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입니다. 생명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통계에 보면은 4, 50대 남자들의 사망 확률이 여자보다 2배로 높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1년에 적어도 25만 명 이상이 죽습니다. 죽음은 이상한 것도 아니고, 무서운 것도 아니고, 고통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죽음을 놓고 깡패 같다고 했습니다. 깡패들은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가서 "너 죽고 싶어?" 하고 공갈을 칩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우리를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가서 "너 반드시 죽어!" 하고 협박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참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어떤 면에서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죽음이 우리에게, '너도 죽어. 너도 죽고 싶어?' 하는 죽음의 공갈이 사실이 아니길 증명하고자 얼마나 나름대로 애를 씁니까? 아침마다 조깅도 하고, 역기나 골프도 쳐보고, 그 다음엔 생식도 먹고, 다이어트나 에어로빅도 하면서 애를 씁니다. 운동을 하고 몸 관리를 잘하면 70세에 죽을 사람이 80세에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조금 미룰 수는 있어도 그 죽음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결국은 죽음이 젊은 시절의 기쁨도 앗아가고, 노년의 평화도 훔쳐갑니다. 누가 죽음의 협박과 공포에서 우리를 건져낼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만이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죽음 앞에서 떨지 않게 하시고, 죽음을 정복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25장 8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을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26절로 넘어가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처리할 원수는 사망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죽음을 정복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죽음 앞에서의 항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패배자의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승리자의 눈으로 죽음을 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이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령한 몸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는 대신 영의 몸을 입게 되고, 썩을 몸 대신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되고, 욕된 몸 대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되고, 약한 몸 대신 강한 몸을 입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처럼 영원히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따라서 죽음을 뛰어 넘어 그 후에 있을 놀라운 하늘의 영생의 축복까지 우리에게 안겨주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됩니다.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라는 유명한 미국 목사님은 지금부터 100년 전에 계셨던 분으로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아직 젊은 나이일 때 사모님이 아이들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믿음 좋은 목사님들 가정에 의외로 이런 일이 있곤 합니다. 아마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질 위인이 못되기 때문에 아내와 이때까지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 불쌍해서 지금까지 살려두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위대한 설교자의 가정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목사님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하고는 자녀들을 차에 태워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엄마를 잃은 자녀들에게 뭔가 위로의 말을 좀 하고 싶은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큰 트럭이 마주보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지나자마자 '웽' 하고 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지나가는데, 그 트럭이 던지는 큰 그림자가 목사님이 탄 승용차를 덮고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얘들아, 너희들 어떠니? 저 트럭에 치여서 죽고 싶니? 아니면 저 트럭의 그림자에 싹 덮이고 지나가고 싶니? 어느 쪽을 원하니?" 그러자 아이들이 씩 웃으면서 "아빠, 그것을 말이라고 해요. 치이면 다 죽쟎아요?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이 낫죠."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 옳은 말이야. 2천여 년 전 예수님도 죽음이라는 트럭에 치여 죽으셨단다. 예수님은 죽음에 치여서 희생당하셨어. 그 덕분에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 우리는 세상에서 죽지만 죽음에 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쓱 지나가는, 그 그림자 밑을 통과하는 것뿐이란다. 너희 엄마는 그렇게 잠깐 세상을 떠나신 거야." 

우리가 잘 아는 어떤 분도 참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홀로 죽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진정 사랑하는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 한다면 당신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단순히 현재의 생을 마감하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시간의 세상으로부터 영원의 세상으로 가는 통로가 되는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 순간적인 아름다움에서 다음 세상에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가는 통로가 되는 죽음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가는 통로가 되는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패배자의 시각이 아니라 승리자의 시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세상을 떠난 송달 장로님처럼 죽음을 앞에 놓고도 어린애처럼 활짝 웃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의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셨습니다.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망을 멸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죽음 앞에서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 부활은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줍니다. 58절에 보면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동안 우리를 흔드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모두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아도 우리를 흔드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옥 목사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아 보여도 어떤 때는 지진이 흔들리듯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무나 악하고 더럽고 예기치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앞날을 생각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존재 근거를 흔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위임 받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며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할 왕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일 높으신 분입니다. 

어린 아이들 말로 하면 제일 높으신 분이고, 제일 힘이 센 분이고, 제일 강하신 분입니다. 이 분이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이분이 부활하신 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분과 같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의지하고 흔들리면 안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부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일에 힘쓰게 만듭니다. 58절에 보면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만 왕의 왕이 되시는 것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동안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주의 일이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는 주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왕 한번 세상을 살 바에는 나를 구원해주신 부활의 주님을 좀더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평범한 일상생활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들이 집안에서 청소하고 자녀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등 자질구레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일들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의 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도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삽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영광 위에 살고 싶습니다. 우리 가정도 주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싶습니다.' 이런 기도와 함께 모든 일을 하면 그 모든 일이 주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직장에 나가서 아침부터 상관의 눈치를 봐가면서 하루 종일 견디는 것도 보통 스트레스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모두가 주님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와서 이렇게 하는 것이 죽지 못해서 하는 줄 압니까? 다 주님을 위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거예요. 여기서 벌어서 헌금도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벌어서 내 자식들도 키우고요. 다 주의 일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서 항상 열려 있으면 내가 하는 평범한 일 모두가 다 주님의 일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 부활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하면 일상생활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에 전심을 다하려고 노력을 한다는 것입다. 전도를 하는 일이라든지,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이라든지, 이 세상에의 불의를 견제하기 위한 어떤 운동을 하는 일이라든지, 교회 와서 봉사하는 일이라든지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에 전력을 다해서 열심히 하려고 시간 내고 마음을 바치고 애를 쓸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주의 일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이 온 우주의 주가 되시고, 장차 우주 만물 가운데 충만하게 되실 것을 믿는 사람은 그분이 기뻐하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의 일을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부활을 믿으면 죽음을 보는 눈이 바뀝니다. 승리자의 눈으로 바뀝니다. 예수 부활을 믿으면 이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흔들려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을 믿으면 우리의 모든 일을 주의 일로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저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길 바랍니다. 주님이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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