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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무교병을 이레 동안 먹으라 (출 11:1 - 출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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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무교병을 이레 동안 먹으라 (출 11:1 - 출 12:51) 

2011년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교회 표어를 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큰 틀은 성경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기록을 하였고, 부활하신 주님도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나라 왕이 어떤 권세를 가지신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 왕이 가지신 권세에 대하여 먼저 말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말하는 출애굽기는 ‘여호와의 강한 손’을 말하였고, 신약의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말하는 마가복음은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를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게 임한 왕의 권세가 무엇인지 우리가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까지 이 권세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거를 할 때 필요한 새로운 주제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왕의 권세 다음으로 무엇을 복음의 내용에 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왕이 가진 권세 다음에 이어져야 할 내용은 왕이 백성에게 주시는 생명에 대하여 증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왕이 가진 권세는 자기만을 위한 권세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자기 권세를 나타냄은 자기를 따르는 백성에게 이 권세로 생명을 주고자 함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의 강한 손이 나타남은 10재앙인데 그 중에서도 유월절 재앙이 가장 큰 손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대한 모세의 기록을 출애굽기가 말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그 힘과 위력에만 치우쳐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먹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먹음은 곧 생명을 말하는 것이니, 막강한 권세의 나타냄을 말하면서 동시에 생명을 주심에 대하여 매우 크게 나타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규례에는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 것과 쓴 나물과 아울러 무교병을 먹으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세와 생명과의 관계는 어느 나라의 어느 왕이든지 항상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명박정권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이명박대통령 후보가 가진 권세가 무엇인지 말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의 권세로 나라 백성에게 주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이명박정부는 747정책을 제시했습니다. 자기가 왕권을 잡으면 대한민국에게 이러한 생명을 주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입니다. 747정책은 10년 안에 대한민국이 7%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고, 국민소득은 4만불을 달성하며, 세계 7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명박정부의 핵심정책입니다. 이것은 바로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이렇게 잘 살게 하겠다는 것이지요. 즉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처럼 현재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자는 어느 누구든지 이런 목표를 제시하고 약속하여 왕권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현대의 왕이 제시하는 정책과 오늘 본문에 기록된 유월절과 무교절의 생명이 비슷한 의미라는 것을 알자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애굽을 파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면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먹는 백성으로 살게 하며 그 생명의 잔치가 무교절의 7일로 확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 먹음이 무교절의 7일로 확대되어 첫 날에도 성회요, 마지막 날에도 성회로 큰 잔치 가운데 생명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한 구원의 생명의 축제를 7일 동안 열고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이 무교절에는 유교병을 먹지 않아야 하며 집 안에 누룩이 발견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절기에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제거됩니다. 즉 이스라엘 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교병을 먹는다는 것은 이제 애굽의 바로 왕에게 속하여 먹었던 생명을 끝내고,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 먹는 생명을 누리며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보았던 것처럼 애굽 온 땅에는 죽음의 재앙이 내려졌으나 유월절에 이스라엘 자손은 어린 양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로 피를 바르고 새 생명으로 먹는 것을 누렸습니다. 이것은 성소적인 교제입니다. 일년 한 차례 대제사장이 피를 뿌려 지성소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 보좌 앞에서 누리는 교제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구원은 항상 가족공동체로써의 구원입니다. 중풍병자의 사건은 사실 중풍병자의 믿음은 전혀 말하지 않고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말합니다. 이런 것 자체가 새로운 가족 공동체로의 구원을 말하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구원은 어린 양 한 마리에 참여한 식구로써 먹고 마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모인 공동체가 주님의 몸을 이루는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많은 교회가 있다고 해서 이곳 저곳에 다니면서 아무 곳이나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개인구원의 개념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한 몸의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구원의 공동체와 새출애굽의 구원의 공동체 모두 다 어린 양에 참여한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누렸던 가족공동체로써 먹음으로 구원의 생명입니다.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출애굽 구원에 있어 새로운 일입니다. 이 유월절에 7일 동안의 무교절 축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7일이라 함은 당연히 안식일 교제를 뜻합니다.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사람이 동참하여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날입니다. 유월절을 천지창조와 같이 하나님의 새 일을 이루심이라 본다면, 무교절은 안식일 교제로 즐거워하여 출애굽 구원에 이스라엘 백성이 무교병을 먹음으로 함께 참여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생명의 완성과 치료, 그리고 회복은 항상 7일 규례로 되어 있습니다. 나병환자가 최료가 되어 회복하면 이스라엘 진 중에 들어와야 하는데 7일 동안 진 밖에 머물렀다가 들어와야 합니다. 유출병이 있는 자도 이레 동안 기다렸다가 정결예식을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구원의 생명의 완성일일 뿐만 아니라 생명이 회복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들어오게 되는 정결규례에도 적용이 됩니다.

그러면 신약의 마가복음은 어떻게 복음을 믿으라고 하겠습니까? 지난 주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해서 말한 후에 다시 제자를 부르심이 마가복음 2:13-17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으로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러분에게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마가복음에서 제자 부르심이 나오게 되면 그건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는 것임을 알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심을 통하여 주님은 죄사함의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레위를 부르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셔서 잡수신 일입니다. 

이렇게 레위 제자를 부르심과 그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신 일을 말씀한 후에 3:12절까지는 주로 먹음에 대한 문제와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출애굽기에서 무교절이 먹음에 대하여 말하고 안식일 규례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금식에 대하여, 안식일에 들판의 이삭을 잘라 먹은 것에 대하여, 그리고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친 일을 말한 후에 3:7-12절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나왔다고 말합니다. 이런 내용은 출애굽기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중다한 잡족과 많은 가축들이 애굽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하는 내용과 서로 병행합니다. 

이렇게 보면 마가복음의 금식과 들의 이삭을 먹은 일, 그리고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일은 서로 별개의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들이 자기 백성에게 어떤 생명을 주는 왕인지를 말하기 위하여 먹는 것과 안식일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주었던 안식일과 생명을 대비시켜서 하나님 아들이 주시는 안식일과 생명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차례대로 보십시다. 마가복음 2:18-22절에는 금식에 관한 문제를 말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물은 사건입니다. 여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구약 백성입니다. 이들이 금식함에 대한 적절한 모델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여호와의 보좌 앞에 나아간 일입니다. 이 날에 이스라엘 회중은 전체가 다 금식을 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뵙는 생명의 교제를 누림에 있어서 이스라엘 회중들은 자신들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제자들이 누리는 교제는 이와 다릅니다. 그것은 마치 혼인집의 신랑과 함께 하는 교제와 같습니다. 혼인잔치 가운데 신랑이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는 교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 아들과 누리는 교제는 옛 백성의 교제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새 시대의 생명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새 생명의 시작이었듯이,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새로운 생명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낡은 부대 안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즉 옛 생명의 교제로 금식함을 통하여 누리는 일은 이제 아들 안에 주시는 생명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권세 아래 금식함을 통하여 누리던 생명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들로 말미암아 죽음을 이긴 새로운 생명의 교제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안식일에 들판의 이삭을 잘라 먹은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생명은 안식일에 성소에 진설된 떡을 먹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것을 먹음은 생명을 누림이었고, 성소 밖에 있는 것을 먹음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아들과 함께 하는 생명은 들의 이삭도 진설병처럼 거룩한 떡으로 함께 하는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소 안의 생명과 성소 밖의 생명으로 나뉘었던 구약적인 생명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된 생명으로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성소 밖도 거룩한 양식으로 주셨으니 그 생명을 더욱 온전케 하시고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히멜렉 제사장 때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성소 안에 있던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만 먹어야 했던 떡을 다윗도 먹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나타남이었습니다. 더 풍성한 은혜였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제 들의 이삭도 안식의 떡으로 주시는 참 주인이 오셨습니다. 종이 주는 안식일의 생명은 성소 안에 진설된 떡만 줄 뿐이지만, 주인이 주는 안식일의 생명은 성소 밖에 있는 것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치셨습니다. 그 사람은 구약의 안식일에 한쪽 손이 마른 채로 있어야 했습니다. 안식일에도 흠이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교절에 누룩이 조금도 집에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룩과 무교병은 함께 있어서는 안됩니다. 누룩이 없는 무교병으로 무교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와 같이 안식일의 주인이 오셨을 때는 부정하거나 흠이 있는 자가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에 자기 백성에게 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생명을 주시지 않습니다. 온전한 생명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마가복음은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새 시대의 온전한 안식일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복음을 믿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권세가 있는 왕이 온전한 안식과 생명을 주신다고 증거하시니 이제 큰 무리가 그를 따라 나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왕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고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이명박대통령을 이 나라의 왕으로 세운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가 경제적인 대통령으로 자기를 내세웠고 그 경제의 왕됨을 747정책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투표하여 왕으로 받은 것입니다. 

무교절에 7일 동안의 안식일의 교제로 생명을 누렸으나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십시다. 48-59절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 먹이신 후에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천명을 먹이신 표적을 보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내가 주는 떡과 모세가 광야에서 주었던 떡을 대비시켰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은 영생하는 생명을 주지만 모세가 준 떡은 죽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주심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먹었고, 광야에서 모세로 말미암아 하늘의 만나를 먹었던 유대인들은 이 새로운 떡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신 말씀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나는 물을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먹고 마심도 죽음을 이긴 생명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자기 몸으로 주시는 생명의 떡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새로운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떡을 먹음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생명의 떡을 먹음으로 아들과 같은 생명을 누리는 것이며 이는 죽음을 이긴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날에 주님의 떡상에 앉아 있는 것에 대하여 너무 모릅니다. 성찬에 참여하여 떡을 떼는 것을 하나의 절차나 기념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죽음을 이긴 생명의 교제를 누리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늘의 생명을 누림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제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워렌 버핏이라고 하는 세계적 갑부를 아실 것입니다. 주식 투자의 귀재여서 엄청난 수익을 얻어 손꼽히는 갑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람이 매년 행사를 벌이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자기와 식사를 한 끼 하는 것을 경매에 붙이는 것입니다. 2010년에도 이 경매가 있었습니다. 이 경매가 우리 나라 돈으로 자그마치 33억 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왜 이 식사 한 끼를 위하여 33억원의 돈을 치르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는 아마도 워렌 버핏의 갑부된 비결을 듣고자 함이라고 판단합니다. 즉 워렌 버핏이 가진 권세를 33억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고, 그 권세를 한 끼 식사를 통해서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식투자의 비법을 한 끼 식사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찾았던 일과 같은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이 너희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나를 찾아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와 무교절의 생명을 얻었어도 그건 썩을 양식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우리가, 여러분과 제가, 이 주님의 떡상에 앉아 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왜 주일에 이 자리에 나와 이 주님의 상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헌신하여 이 생명의 상에 앉아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주시는 생명의 떡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몸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워렌 버핏과의 식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의 식사입니다. 워렌 버핏은 주식투자의 비법을 전수하겠지만, 우리 주님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생명, 곧 죽음을 이기신 생명을 전수하실 것입니다. 

이 주님의 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것은 고난을 묵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죽음을 이기신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죽음을 이긴 생명을 누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주일에 주님의 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생명을 헐값으로 매도합니다. 33억원의 값만도 못한 아주 천한 값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신 왕 앞에서 주님의 얼굴을 뵙습니다. 그 왕과의 교제가 이 떡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생명의 교제입니다. 이 생명을 먹고 마시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갑부가 되려고 하는 목표가 아니라, 하늘의 기업을 상속하고 하늘에 속한 생명을 누리려 함이 목표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고 죽음의 권세를 밟고 승리하도록 이 생명의 교제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신 승리가 나의 것이 되도록 이 생명의 식탁을 오늘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오늘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언약 식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참 생명이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 하는 생명의 나타남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음행한 자가 있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교회를 누룩이 없는 새 유월절 떡 덩어리로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5:6-8절입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는 누룩이 없는 순전한 떡이 되었습니다. 이 곳에 묵은 누룩이 없어야 합니다.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온전히 지켜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지혜있는 자가 많았습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개인의 문제였을 뿐 공동체를 위한 지혜와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져 나가는 일에 그들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 교회가 누룩이 없는 떡 덩어리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 지체 중에 누가 힘들어 하며, 어려우며, 심지어 타락의 길을 가는지 생각하고 염려하며 지켜내야 합니다. 그럴려고 이 떡상에 우리가 둘러 앉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에 연합된 어린 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요즘의 교회는 오히려 세상의 먹고 마심을,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살도록 예배를 조절해 주고 있습니다. 1부 예배라도 빠지지 말고 드리되 빨리 가서 생업을 위해 일하라고 만들어 준 것입니다. 조그만 일이 생겨도, 조그만 몸의 아픔만 있어도, 너무 쉽게 주님의 상을 거절하거나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타당하게 여김으로 온 덩어리에 퍼지게 한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 속에서 저희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이 교회를 세우게 하셨는지 아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교절 축제가 아닌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축제로 예배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곳에서 참된 안식이 나타나 온전한 생명으로 회복되어 주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살게 되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있어야 할 존재이유입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축제로 이 주일의 삶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교회의 생명이 세상에 흘러 넘쳐 세상에 온전한 안식과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함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써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어 죄와 죽음을 밟고 승리하는 권세 있는 생명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늘 공동체가 되도록 함께 협력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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