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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는 ‘불’이다!

  •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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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s.jpg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성령강림후 열셋째 주일, 2016년 8월14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절 대웅전에 들어가면 정면에 부처상이 놓여 있습니다. 얼굴 표정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게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교회당의 예배처소에 들어가면 대개 앞 벽면에 십자가상이 걸려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그 십자가에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고상을 사용합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이런 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합니다. 자비를 베풀려면 온 세상의 가난과 불의까지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 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사랑을 베풀려면 자신은 배신당하고 고통 받아야 하고, 한걸음 더 나가서 투쟁해야 합니다. 십자가상이 이를 대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걸 ‘가상칠언’이라고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입니다.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발언입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이셨습니다. 유대교 고위층과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고, 선지자들을 배척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광야의 여우도 굴이 있지만 당신 자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외로움에 빠지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신 적도 있습니다.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종종 토로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2:50절에서도 예수님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왜 답답해하셨을까요?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거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거 아닌가요? 무엇이 답답하신 걸까요? 50절을 읽을 테니, 잘 들어보십시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이 받아야 할 세례는 단순히 세례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할 때 이미 세례 요한에게서 받았습니다. 세례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가리킵니다. 그의 운명은 인류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다 마쳐야만 자신의 사명도 완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명이 다 끝나기 전까지는 마음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교과서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틀린 게 아닙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서 예수님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혼을 가득 채운 생각이 무엇이기에 그가 자신의 운명이 끝날 때까지 답답한 심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은 하나님 나라와 함께 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외친 말씀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선포는 그 핵심 주제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는 메시지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장애를 고치거나 질병을 고치는 예수님의 행위도 똑같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가오는 결혼식 날짜를 기다리는 예비 신랑과 신부의 경우입니다. 그 두 사람에게는 결혼 외의 다른 것은 다 사소해집니다. 또는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하다가 퇴원날짜를 받은 사람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퇴원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는 삶의 환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고 자신의 운명으로 삼았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 통치는 생명 사건입니다. 우리의 삶이 완전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소해집니다. 거꾸로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 중요해집니다. 첫째가 꼴지 되고, 꼴찌가 첫째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자신의 실존 전체로, 즉 자신의 운명 전체로 증거 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삶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주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으로 나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율법학자, 성전 제사장들입니다. 복음서 이야기는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예수님이 어떻게 거부당했는지에 대한 보도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친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은 회당 출입을 거부당하고, 길거리와 저자거리와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은 신성모독 죄로 유대교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았고, 빌라도 로마 법정에서 십자가형 선고를 받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애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유대교 지도자들과 유대 민중들에게 배척당해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신 마음이 답답하다는 토로는 그의 삶과 운명 전체를 압축하는 진술입니다.



그 답답한 마음이 49절에서 아주 강한 은유로 표현됩니다. 그 은유의 키워드는 ‘불’입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요즘과 달리 2천 년 전 사람들에게 불붙이는 일은 매우 불편했습니다. 불씨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불을 붙였습니다. 불을 붙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고대인들은 실감나게 들었을 겁니다. 태우고 변화시키는 성질의 불은 보통 심판에 대한 은유로 자주 사용됩니다. ‘불의 심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 13:20절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에 추수꾼들이 추수 때에 불사르게 가라지를 단으로 묶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불은 ‘성령의 불’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심판을 가리키든지, 또는 성령을 가리키든지 다른 게 아닙니다. 심판은 생명을 얻는 사건이고, 성령은 생명의 영이라는 점에서 심판이나 성령이나 모두 생명 구원과 연결됩니다. 생명 구원은 곧 하나님 나라 사건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불을 던지러 왔다는 말은 인간 구원을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전하러 왔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이 불붙듯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마음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경험

도대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하면 불붙듯이 실감할 수 있을까요? 이건 수학공식을 풀듯이 손에 잡히는 게 아니라서 이를 이해하려면 영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선 예를 들어볼 테니 여러분에게 이런 경험이 있는지를 검토해보십시오. 어떤 분과 잠깐 커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커피를 일반적인 아메리카노만이 아니라 자신만이 개발한 특별한 방식으로 마십니다. 우유 반잔에 물 반잔을 섞은 다음에 커피 두 스푼을 넣어 마시기도 합니다. 커피를 마실 때의 그 맛과 느낌만이 아니라 마시고 난 다음 커피 잔에 남아 있는 향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빈 잔을 곁에 놓아둔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커피를 ‘폼’으로 마시거나 피로 회복을 위해서 마시기도 하고,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마실 겁니다. 어느 쪽이 커피를 불붙듯이 경험하는 건지는 여러분이 답을 알 겁니다. 커피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그렇습니다. 삶의 미세한 부분들에 밀착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냥 건성건성 건너뛰는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의 잔향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야말로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건 누가 억지로 가르쳐줘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소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마시는 건 소 자신이 해야 하듯이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이 우리의 영혼에 불로 붙을 수 있을까요? 잘 안 될 겁니다. 그게 쉽다면 예수님이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설교하는 당신의 영혼에는 하나님 나라의 불이 붙었냐, 하고 묻고 싶으신가요? 저의 솔직한 대답을 원하시나요? 그건 그림처럼 확인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앞에서 한 커피 이야기처럼 그 답은 그의 삶과 삶의 태도에 들어 있습니다. 그건 또한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들립니다. 저 사람이 다 마신 커피 잔을 왜 저렇게 들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저 사람이 왜 저런 태도로 인생을 사는지, 저런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의 대답을 조금이라도 기대하는 분들을 위해서 한 마디만 한다면 이렇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운명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조금씩이라도 더 깊이 알게 되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무엇인지를 실질적으로 더 깊이 경험하고, 거기에 더 가까이 가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저항의 힘

불은 옆으로 번지고 변혁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렇습니다. 불은 폭발적인 변혁의 에너지라는 점에서 누룩과도 비슷합니다. 51절은 이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내가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 나라는 당연히 평화의 나라일 텐데, 본문에서는 오히려 분쟁의 나라처럼 묘사되었습니다. 52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인해서 사람들이 다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53절에서는 가족들끼리도 분쟁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의해서 가족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눅 14:26절, 17:34-35절, 막 10:29-30절에도 나옵니다. 이중에 눅 14:26절만 읽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런 말씀들은 오해받기 쉽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친척이나 가족 사이에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으니 그들과의 싸움을 각오하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기독교인이 피해의식에 빠져서 싸움꾼이 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왜 평화가 아니라 분쟁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 걸까요?



하나님 나라는 거짓 평화를 묵과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짓 평화는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전 청결 사건을 보십시오. 예수님 당시의 성전 마당에서는 장마당이 섰습니다. 멀리서 온 참배객들을 위해서 환전해주고, 번제로 바칠 동물을 파는 장마당입니다. 좋은 뜻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성전 당국자들의 이권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성전이 평화롭게 운용되었습니다. 거짓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공무원들이 불법 노점상들을 쫓아내듯이 성전에서 상거래를 하던 사람들을 쫓아냈습니다. 이런 거짓 평화는 오늘도 반복됩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강요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가라앉는 2년 반 전 세월호 선실에 남아 있던 수백 명의 학생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사드배치 지역으로 결정된 성주 주민들도 정부 당국이 잘 알아서 판단한 일이니 시끄럽게 하지 말고 좀 조용히 있으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오죽이나 많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도 일반 신자들은 문제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안에 대해서 사사건건 트집 잡듯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정말 심각하게 문제가 많은 사안에 대해서도 ‘은혜로 합시다.’라거나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묻어둡시다, 합니다. 강제력으로 상대를 침묵시키는 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사회적인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거짓 평화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자기 인생을 평화롭게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신을 속이는 거짓 평화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는 평화가 아니라 분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평화가 아니라 분쟁을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의 설명에 대해서 여러분은 다 동의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거짓 평화인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있습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자기 딴에는 거짓 평화와 싸워보겠다고 나섰는데, 실제로는 상황 판단을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자기를 나타내려는 공명심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 판단이 어렵기는 하지만 대개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고 있으면 그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56절이 우리에게 어떤 기준을 제시합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판단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외식’, 즉 위선에 있습니다. 위선은 자신을 실체 그 이상으로 높이고 살아가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런 위선이 종교인들에게, 특히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주 나타납니다. 정치인들에게도 그런 위험성은 많습니다. 학교 선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거짓 평화에 저항해야 한다면 그 범위는 어느 정도이어야 할까요? 우리가 모든 문제에 오지랖 넓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구석구석 쫓아다니면서 저항할 수는 없습니다. 그 범위를 다른 사람이 결정해 줄 수도 없습니다. 각자 처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면 됩니다. 본문 52절과 53절에 거론된 분쟁은 일상에서 일어난 겁니다. 거창하게 사회 정의와 세계 평화를 부르짖지 않아도 됩니다. 개인적으로 뜻이 있어서 그런 일에 참여할 사람은 하고, 자기가 직접 관련이 되는 좁은 영역에서 거짓 평화와 투쟁하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불을 던지러 왔다 하신 예수님이 바로 불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기 앉아계신 분들은 다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들일 겁니다. 불은 심판의 불이며, 성령의 불입니다. 즉 생명과 구원의 화염입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구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생명과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말로만이 아니라 영혼의 중심에서 경험한 사람들은 그 이외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의 영혼에서 불길이 솟듯이 거짓 평화에 속지 않고 저항합니다. 지난 2천년동안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다 그런 태도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라는 불이 우리에게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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