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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식탁 이야기

  •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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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s.jpg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성령강림후 열넷째 주일, 2016년 8월28일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평가는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어색한 평가는 그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눅 7:34)이라는 것입니다.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당시 세례 요한이나 바리새인 등, 나름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태도가 달랐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하면서 함께 먹고 마시는 일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잔치나 먹는 이야기가 제법 나옵니다. 눅 14장에는 이와 관련해서 세 가지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세 이야기가 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먹는 식탁을 주제로 합니다. 첫 번째에서 세 번째로 진행되면서 메시지의 강도가 강해집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첫째 이야기와 둘째 이야기에 해당됩니다. 일단 두 이야기를 따라가겠습니다.

 

1)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눅 14:7-11)

예수님은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거기 함께 모인 바리새인들은 서로 식탁의 상석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상석은 주인 자리에 가까운 곳입니다. 그런 자리에 앉으면 자신의 위치가 높아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충고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았을 때 상석에 앉지 않도록 하라. 주제 파악도 못하고 거기에 앉았다가 더 높은 사람이 오면 그 자리를 내어준다.’는 겁니다. 청와대 영빈관에서 벌어지는 만찬을 생각해보십시오. 의전에 따라서 자리가 배열됩니다. 서열이 낮은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을 수가 없고, 실수로 앉았다면 나중에 물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초청받았을 때 차라리 낮은 자리에 가서 앉으면 주인이 상석으로 안내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을 11절에서 이렇게 맺으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일종의 지혜로운 처세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유대교 문헌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고, 아마 동양의 스승들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했을 겁니다. 이런 교훈을 얻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세상은 상석으로 올라가라고 우리를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상석에 앉지 못하면 어딘가 인생에서 실패한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석을 차지하려고 투쟁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일에 운명을 겁니다.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라는 말씀은 귀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런 수준으로 읽는 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겁니다. 예수님이 고작 우리로 하여금 세련된 교양을 쌓고 수신제가(修身齊家) 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런 게 필요한 사람은 공자를 따르는 게 훨씬 낫습니다.

본문의 식탁 이야기에서, 어떤 사람이 낮은 자리에 앉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딱 들어맞는 사람입니다.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은 낮은 자리에 앉아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이런 자리에 앉을 사람이 아닌데, 주인이 빨리 내게 와서 상석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저기 저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보다 서열이 훨씬 낮고, 인격적으로도 형편없는 사람이야. 나는 지금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이 사람은 낮은 자리에 앉긴 했지만 실제로는 높은 자리에 버티고 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련된 처세술로 읽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보다 훨씬 근원적 사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인간의 삶과 운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서는 자기를 높이는 자가 무조건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반드시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이 말씀과 달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높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낮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을 기계적인 원리로 보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라는 개념 자체를 벗어나서 세상을 봅니다. 비유적으로 유치원 아이들의 소꿉놀이를 생각해보세요. 각자의 역할을 합니다. 엄마, 아빠, 언니, 동생, 가정부, 주인 등등입니다. 소꿉놀이에서는 이런 역할과 자리에 의미가 있지만 소꿉놀이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소꿉놀이의 논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이 말하는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라는 구조가 우리의 영혼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가 반드시 나쁜 것만을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자기를 높인다는 것은 자기 삶을 자기가 완성시킨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돈도 모아야 하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아야 하고, 권력도 얻어야 하고, 종교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세상의 논리를 따를 때가 많습니다. 신앙을 이용해서 높은 자리를 취하려고 합니다. 어쩌다가 높은 자리를 얻게 되면 흡족해 하고, 그걸 얻지 못하면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자책합니다. 성공주의에 예속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아무리 끌어올려도 삶이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속으로 생각이 다른 분들이 계실 겁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느냐, 뭔가를 성취하니까 흡족하더라, 하고 말입니다. 그런 것이 실제 삶인지 아닌지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한 병에 50만 원짜리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과 1만 원짜리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돈의 차이만 보면 상대가 되지 않지만 포도주를 마신다는 자체만 놓고 본다면 차이가 없습니다. 50만 원짜리를 마시면서 시름에 젖거나 자기도취에 빠질 수도 있고, 1만 원짜리를 마시면서도 포도주 자체와 일치될 수 있습니다. 향과 액체가 입안을 적시는 느낌과 목을 통해서 넘어가는 순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삶이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낮은 자리라고 하더라도 삶 자체를 누리는 사람이 있고, 높은 자리라고 하더라도 삶을 소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 베풂과 보상

눅 14:12-14절에 나오는 이야기도 역시 잔치에 얽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12절에서 자기를 식사에 청한 사람이 듣기에 민망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이어서 13절에서 잔치를 베풀려면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우리들은 ‘기브 앤 태이크’라는 말이 있듯이 답례를 전제로 대접을 합니다. 적게 주고 많이 받는 방법을 강구합니다. 뇌물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나라 사법계에 막강한 힘으로 작동되는 전관예우도 서로 이해타산에 근거해서 주고받는 원리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끼리끼리 대접하고 대접받는 이런 관행이 심한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김영란 법’을 입법화할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의 식사 모임 자체를, 그리고 인간관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의 쿰란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체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금욕적으로 살았습니다. 대접하고 대접받는 일들이 이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시장 바닥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베풀면서 살라는 충고일까요? 이런 수준의 말씀은 당시 괜찮은 지혜 교사들 누구에게서나 들을만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 어른들 중에서도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이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높은 사람들에게 연줄을 대기 위해서 기웃거리지 않고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이건 다 옳은 삶의 태도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삶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라니, 정말 강렬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들은 갚을 것이 있는 사람들만을 골라서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갚을 능력도 없고 마음도 없으면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민폐’ 끼치는 이들로 간주하고 가능한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풂에 대한 보상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돌립니다. ‘의인들의 부활 시’에 보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종말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갚아준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이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나요? 쉽지 않을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보상받지 못하는 걸 못 견뎌합니다. 이게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경제 논리로만 돌아가는 세상은 그렇다 치고, 하나님을 믿는 교회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 생활한 것만큼 하나님이 당장 보상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말로는 천국 소망에 모든 걸 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금 당장 잘되어야합니다. 교회 봉사생활에서도 다른 교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심지어 장로가 되기 위해서 인정받을만한 일을 골라서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게 우리의 실제 모습인데,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히려 복되다는 말이 과연 현실성이 있을까요? 종교적인 덕담에 불과한 건 아닐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 번째 이야기의 대답과 비슷합니다. 우리 인생의 보상은 하나님의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이 그 대답입니다. 이런 대답만 듣고도 ‘그렇지, 맞아!’ 하는 분들이 있고, 옳은 말씀이긴 한데 ‘실감하기는 어렵네.’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보상이라는 말을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에 묶여있기 때문에 이런 사태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선 사람들로부터 받는 보상이라는 걸 잘 생각해보십시오. 대개의 경우는 형식적인 겁니다. 서로 이해타산에 의해서 주고받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기 삶의 영역을 확대하는 겁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이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만족스럽다고 해도 잠시이고 더 큰 만족을 구하면서 이리저리 휩쓸립니다. 그런 걸 우리는 인생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방식 외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없어서 그렇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의인들의 부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실질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 즉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지금까지 설명한 예수님의 이 비유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좀더 정확하게 알려면 이 비유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대상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눅 14,15장은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불편하게 여기던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좋은 점이 많은 사람들인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눅 14:15-24절에 나오는 잔치 이야기는 예수님이 14장에서 말씀하신 세 가지 연속 이야기에 속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미리 초청장을 보냈던 사람들을 데리러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각자의 핑계를 대고 잔치에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거리로 보내서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을 잔치에 들어오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게 이상하지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천국식탁의 초대를 거절할 핑계를 찾는다는 게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보상에만 마음을 둔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가리킬까요?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무도 그걸 눈으로 보이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대충 알고 있는 대답은 교회 생활에 충실하면서 세상살이에서도 모범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건 바리새인의 경우에서 보듯이 직접적인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지,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투쟁하는지를 보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직접적인 대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겉으로는 얼마든지 남이 보기에 그럴듯한 인생을 펼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투쟁하면서도 여전히 교만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만 흡족해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 질문에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제 입장에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죽음!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memento mori! 매 순간 죽음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에 두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을 허무주의로 여기면 안 됩니다. 오히려 허무주의의 극복입니다. 죽어야 할 실존에 집착하면 오히려 허무에 떨어집니다. 삶에 대한 과도한 열정은 곧 허무의 이면입니다. 죽음은 삶과 더불어서 진행된 모든 것과의 단절입니다. 아무도 이를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마지막을 미리 끌어당겨서 산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일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누가 높은 자리에 앉느냐에 대해서 관심이 실제로 줄어듭니다. 보상받는 것에 대한 관심도 줄어듭니다. 죽음 앞에서 연봉 1억 원과 2천만 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고, 그와 더불어 이미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세례는 한번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예배와 성찬예식에서 반복됩니다. 예배와 성찬은 천국 식탁의 모범입니다. 즉 죽음과 생명에 대한 기억이자 약속입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알고 믿을 때 여러분은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에 대한 세속적 판단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얼마나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관점으로부터 해방되어 천국식탁에 참여하는 기쁨을 일상에서 실제로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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