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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사도신경(5)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요 1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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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5):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요19:12~22)  

오늘은 사도신경 강해 다섯번째 순서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 대목을 살펴봅니다. 마침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인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이라 ‘수난주일’(受難主日 Passion Sunda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이란 명칭은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왕이신 예수님을 환영한 데서 유래합니다.   

사도신경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자마자 곧 이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33년 생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도신경은 핵심 내용만 포함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지상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는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내용은 과감하게 생략해 버렸습니다. 복음서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신 마지막 고난주간의 기록이 1/3 가량 됩니다. 요한복음의 경우는 거의 절반에 달합니다. 33년 생애와 비교해 봐도 그렇거니와, 공생애 3년과 비교해 봐도 십자가 사건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한 마디로 십자가 지러 오신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대목이 사도신경의 하이라이트인 셈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은혜에 감격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  

여러분, 혹시 이런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사도신경이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서 대폭 생략해 버릴 정도로 짧은데,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기록하면 될 텐데, 굳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 ” 이렇게 길게 늘여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그런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① 십자가 죽음의 역사성 :   

첫째는, 십자가 죽음의 역사성을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고대에는 연대 표시를 위해 통치자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죠. 세종 XX년 ... 이런 식입니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의 이름을 통해 역사성을 증거한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누굽니까? 그는 유대 지방의 5대 총독(A.D. 26~36 재임)입니다. 누구나 동의하는 대로 유대 지방을 10여 년 통치하던 로마 총독입니다. 바로 그 시대에 예수님이 그에게 직접 심문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 속의 인물이라는 겁니다.   

② 예수님의 무죄성 :   

둘째는,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무죄성을 증거합줍니다. 그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자율권을 부여했습니다. 사형 집행을 제외하고 웬만한 사건은 이스라엘의 산헤드린(Sanhedrin)에 맡겼습니다. 산헤드린은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국회인데, 입법 사법 행정 전권을 갖고 있는 기구입니다. 

그런데 사형에 해당되는 사건은 로마 총독이 직접 재판하고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어떻게 됐나요? ‘신성모독죄’로 사형에 선고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성전을 허물라고 했다는 겁니다. 전적인 오해이죠. 자칭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제는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게 됐으니까 허물라고 한 것이고, 사흘 만에 일으킨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미리 예언한 것이었습니다.(요2:19~22 참조) 또한 예수님에게 백성들의 관심이 쏠리면서 자기들의 기득권에 손해가 생길까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들 스스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당국에 고소해서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빌라도 법정으로 간 겁니다. 하지만 로마법으로는 신성모독죄가 사형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국가반역죄’로 죄목을 슬쩍 바꿔 고소합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직접 신문하면서 오히려 죄가 없음을 확인합니다. 

요19: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그래서 석방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유대인들은 거세게 반항합니다. 

12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는 이런 압력에 못 이겨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유대인의 원성을 사고 있는 마당에 자칫 소요 사태라도 일어날까봐 염려했던 것입니다. 자기 권좌를 지키고자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마27:24 보면, 빌라도의 한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자기는 책임이 없다는 겁니다. 그럴 수 없죠. 자기가 최종 책임자인데 어떻게 책임이 없습니까? 유대인들도 문제지만 빌라도도 문제입니다.   

빌라도는 자기 권좌를 유지하려고 불법을 저질렀지만, 나중에는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나중에 로마 황제에게 보고한 문서가「빌라도 보고서」인데, 예수님이 무죄한 가운데 사형을 당하게 된 경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는 권좌를 지키고 싶었지만, 자신도 비참하게 물러납니다. 불의한 자의 말로입니다. 
  

[2]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   

① 저주의 십자가 :   

그 당시 십자가형은 흉악범에게 제한적으로 적용하던 사형법으로 최악의 고통인 동시에 최악의 수치였습니다. 십자가형이 집행된 장소가 상징적으로 이런 사실을 보여줍니다. 

17절.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에 위치한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게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로 ‘해골’이란 뜻입니다. 멀리서 보면 해골 형상으로 생겨서 그렇게 불렸다는 설도 있고, 그곳에 해골이 득실거려서 그렇게 불렸다는 설도 있습니다. 골고다라는 말 외에 ‘갈보리’라는 말도 있죠. 이 단어는 영어 Calvary를 말하는데, 라틴어 Calvaria에서 나온 말입니다.

② 대속의 죽음 :   

그러면 예수님이 무죄한 가운데 이렇게 비참한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입니다. 그 당시 십자가형을 집행할 때는 죄패를 붙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어떤 죄패가 붙었나요? 19절.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인적 사항과 죄목을 적어놓았습니다. 죄목이 ‘유대인의 왕’입니다. 유대인들이 항의합니다. 자칭으로 적으라고 ... 만일 그렇게 적으면 빌라도가 불법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게 됩니다. 그래서 거부하고 그대로 적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무죄한 가운데 죽으심을 증거한 겁니다. 놀라운 섭리이죠.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겁니다. 요1:29 “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③ 공개 처형 :   

십자가형은 공개처형입니다. 사형수가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 위로 갑니다. 법정에서 성 밖으로 빠져나가 골고단 언덕까지 1km가 넘는 거리를 갑니다. 그 동안 수많은 백성들이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가하려고 그렇게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절묘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무엇일까요? 죄패의 내용이 곧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신 겁니다. 20절.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3개국어로 기록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골고다 언덕은 성 가까이, 즉 성문 바로 밖에 대로변에 있었습니다. 높은 언덕입니다. 마침 그때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오는 지방이나 타국의 순례객들, 왕래하는 예루살렘 시민들의 눈에 많이 뜨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죽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나   

이렇게 예수님은 2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게 중요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었어도 나와 상관없는 사건이라면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렇게 바랜 역사책의 한 귀퉁이에 기록된 스토리에 불과할 겁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적용해야 합니다.   

① 믿음으로 구원 :   

먼저 믿음으로 반응해야 됩니다. 나를 대속한 십자가임을 믿을 때에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요3:16,18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오래 전 스코틀랜드 북부지방에 깊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있었습니다. 철교 밑에는 깊고 푸른 강물이 흘렀습니다. 이른 아침 양치는 소년이 계곡으로 나와 보니 전날 밤 폭우로 계곡 물이 넘치고 철교의 일부가 무너져 떠내려가 버린 겁니다. 그런데 멀리서 기차가 계곡을 향해 달려옵니다. 큰일입니다. 소년은 기차를 멈추게 하려고 황급히 철길 위에 서서 옷을 벗고 오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기관사는 철로에서 나가라고 경적을 울려댑니다. 소년은 계속 서서 옷을 흔듭니다. 기관사는 어쩔 수 없이 급정거했지만, 그 와중에 양치기 소년은 그만 기차에 치어 죽고 맙니다. 기관사와 승객들이 내려가 보니까 양치기 소년은 이미 죽어있었고 바로 그 앞에 넘실거리는 강물 위로 무너진 교각이 보였습니다. 만일 기차가 멈추지 않았더라면 기차에 타고 있던 수백 명이 인명 피해를 볼 뻔했습니다. 어린 양치기 소년 한 사람의 피 값으로 수백 명이 살아난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와 같은 일을 하신 겁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영원한 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우리 앞에 길을 가로막고 서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시며 지옥으로 가는 길을 막아 멈추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부디 이런 사실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십자가에 합당한 삶 :  

이제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십자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았습니다. 우리 인생을 망가뜨리고, 예수님을 피 흘려 죽게 할 정도로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악 가운데 육신의 욕망 가운데 헤매면 안 됩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제 우리는 죄악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결단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존귀한 존재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면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예수 믿노라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탄식하며 호소합니다.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옛날 유럽의 왕실에 이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어린 왕자들과 함께 노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왕자가 잘못하면 대신 매를 맞았습니다. 그 아이를 가리켜 위핑 보이(whipping boy)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왕자가 마음이 아파서 행실을 고쳤다고 합니다. 명예혁명 후 민주화되면서 이런 제도가 사라졌지만, 비인권적인 나쁜 제도였지만,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처럼 괴로움을 당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사실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또 다시 범죄하고 악한 길로 갈 수 있겠습니까? 부디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거룩한 삶을 살리라 다짐하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③ 십자가 복음 전파 :   

우리는 또한 십자가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 나 자신이 구원받은 과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어도 그 복음이 나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했을 겁니다. 롬10:13~14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자들이 있기에 구원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제는 나도 복음의 빚진 자로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전도와 선교의 사명입니다. 이와 같은 복음의 릴레이를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그 날까지 이 일은 계속 될 겁니다. 이 일을 누가 감당합니까? 먼저 믿은 우리들이, 그리고 우리 교회와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감당해야 될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선교지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인도에서 사역하는 어느 선교사님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재정이 넉넉지 못해서 9살짜리 아들을 현지 학교에 보냈습니다. 인도 아이들이 자기들과 외모, 머리카락, 언어 등이 다르다고 놀렸습니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몇 명이 선교사 아들을 묶어 놓고 눈에다 못을 박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었고, 부모가 만났을 때는 이미 실명된 후였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항의를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아무리 아이들이라도 그렇지! 하나님은 이런 일비 벌어질 때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도저히 이런 사람들을 위해 선교하지 못하겠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렵니다.” 선교사 부부는 짐을 쌉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부모를 가로막았습니다. 눈이 퉁퉁 부어올라 안대를 한 아들이 호소합니다. “아빠! 우리가 가면 이 나라 사람들에게 누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요? 안 돼요!” 그 아들의 눈물어린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던 선교사 부부는 다시 짐을 풀고 다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희생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받은 겁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서양 귀신 양귀자라 놀리며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은 겁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합정동 소재)에 가보면 선교사들의 묘비를 통해 숱한 사연에 접하게 됩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한쪽 귀퉁이에 위치한 어린이 묘지의 모습입니다. 당시 풍토병과 전염병으로 죽은 선교사 자녀들의 묘소입니다. 심한 경우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와 같은 복음 빚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시고” 이 대목을 고백할 때마다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묵상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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