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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고난의 흔적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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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흔적 (요 20:24-29)


인도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도였지만 기독교인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를 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변호사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간디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지만 예수님을 믿지는 못하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위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에 대한 최악의 비판이었습니다. 

아마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비록 교회는 다니시지만 비슷한 의견을 가진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라고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생각하는 사람이고,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습니다. 저는 일반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모순에 대해서는 그렇게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세계에 대해서는 실망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목사지만 남에게 목사가 되라는 권면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의 문화에 대해서 실망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실망했느냐? 도덕적 위선에 실망한건 아니고, 그들의 협소함, 편협함, 대인이 되지 못하고 소인됨, 질투, 시기, 경쟁, 외면적 초라함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은 만일 누구와 점심 약속을 하셨다면 예수님이 한턱 내셨을 것입니다. 오늘날 말로 하면 예수님이 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런 대범한 면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목사들은 열이면 아홉은 상대방이 낼 줄로 기대합니다. 얻어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대접할 능력이 없습니다. 목사라는 직분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 것을 저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매력 없는 직업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떻게 제가 목사가 되었느냐, 어떻게 목회를 계속 할 수 있다는 얘기냐.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비록 세상에는 모순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그것보다도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해야 될 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되는 것보다는 이미 복음을 들었지만 그것을 신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 교회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 신앙에 대하여 실족한 사람들을 회복시켜야 하는데, 그들의 숫자가 많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교회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얘기냐, 이건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그런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다만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교회에서 상처를 입는 첫 번째 이유는 율법주의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왜 PK 중에 비뚤어진 사람이 많은가? PK는 목사의 자식이란 말입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이, ‘목사의 아들이 되가지고, 목사의 딸이 되가지고 왜 그 모양이냐,’ 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듣고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딸, 아들이 어쨌다고요. 목사의 자식이 되고 싶어서 목사 집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왜 무리한 것을 요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신앙적인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가 결코 사랑으로 와 닿지 않고, 상처를 주고 무력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은 손가락질 하는 분, 나를 정죄하는 분, 엄하신 분, 노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은, 하나님도 알고 남도 알고 나도 알고 지나가는 개도 압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덜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과장 때문입니다. 과장은 실제 모습보다도 부풀리는 것입니다. 이게 잘못하면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을 위선자로 만드는 것은 현실을 과장하려는 압력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뭐든지 결과가 좋아야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병에 걸려서는 안됩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병에 걸려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믿음이 없다는 증거예요. 설사 병에 걸렸더라도 빨리 나아야 됩니다. 사람들에게 우리의 상태를 보고할 때는 늘 좋은 보고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믿음이 좋은 사람의 증거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가화만사성의 본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자녀라면 다 신앙도 좋아야 되고 부모의 말씀을 잘 들어야 되고 공부도 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일 자녀가 불량 청소년이라면 그건 부모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미국 딕 체니 부통령의 경우처럼 딸이 레즈비언이라면 그건 한국 교회에서는 큰일 날 일입니다. 입에 올릴 수 없는 일입니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요. 창피해서 어떻게 교회를 다니겠습니까? 

여러분 저희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안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간증이라는 것은 속성 상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되요. 해피엔딩. 결과가 좋았다, 그런 내용이 아니라면 누가 간증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들을 때는 재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괴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나는 저렇지 못하다는, 나는 신앙인인데 나는 저렇지 못하고, 나는 모든 것이 해피엔딩은 커녕 해피하지 못한데, 나는 도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얘긴가, 나는 왜 이 모양이란 얘긴가.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정직한 간증을 한다면 모든 것이 해피엔딩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모든 것이 해피엔딩이 아니었어요. 물론 궁극적으로는 해피엔딩이었죠, 부활하셨지만, 문제는 우리는 우리의 궁극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아직 인내하고 기다려야 되는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엔딩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만을 정직하게 말한다면 해피한 것 보다는 고난스러운 것들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 신문을 안 좋아하는 이유도, 기독교 신문이기 때문에 좋은 기사만 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교회가 이렇게 해서 부흥했다더라, 누가 이렇게 해서 고난을 극복했다더라.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 마음이 위로를 받는 게 아니고 오히려 불편합니다. 내 인생은 이렇지 않은데, 이 사람은 뭐가 이렇게 특별할까, 이 목사님들은 어떻게 이렇게 목회를 잘 할까?

여러분 정말로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스토리는 모든 게 잘 됐다, 라는 말보다는 우리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아, 이런 분들도 이런 고난이 있구나, 나만 이런 것이 아니구나, 아,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시는구나. 이런 성경말씀대로 ‘세상에 있는 모든 형제들이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니라.’ 여러분 현재 고난을 솔직히 말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솔직한 사람이며 신앙인입니다. 이 교회 문화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과장하게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필요한 것이고 결국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 사람들이 교회에서 상처를 입는 세 번째 이유는 도덕적 위선을 부추기는 분위기 때문이에요. 도덕적인 위선 때문이 아니고 도덕적 위선을 부추기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이런 얘기 들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고 예배당을 나서다가 주차장에서 받은 은혜 다 쏟아버렸다. 무슨 은혜가 된장국물인가요? 쏟아버리게. 쏟아버린다고 쏟아집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얼굴 붉힐 사건이 생겼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교회를 나섰는데, 속이 상해서 남이 나를 속상하게 한 것도 괴롭지만 내가 속이 상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실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니까 나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나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인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화가 나면 화를 내세요. 화가 난다는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세요. 배가 고프면 허기를 느끼고, 목이 마르면 갈증을 느끼고, 졸리면 졸리고, 예쁜 여자가 보이면 예뻐 보이고, 화가 나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나를 탓할 수 없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배가 고플까, 목이 마르다고 나를 탓할 수 없습니다. 졸리다고 나를 탓할 수 없습니다. 이게 잠 마귀가 아니예요. 졸린 거예요. 화가 난다고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해요. 화가 나니까 화가 나는 거죠. 다만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게 중요하지요.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해요. 그때 지혜와 믿음이 필요한 것이지요.

몇 년 전, 제가 주일 아침에 차를 몰고 교회를 오다가 교회를 들어오는 골목 입구에 누가 골목을 막고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을 봤어요. 제가 화가 났어요. 주일 아침에 골목을 막아버리고 공사를 하다니. 이 불경건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 못된 사람들 같으니라고. 화가 났어요. 그래서 항의를 하는데, 인부 중 한 청년이 저를 보더니 혹시 목사님 아니냐고 합니다. 주일 날 아침에 이런 식으로 화를 낼 사람은 목사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에게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교회로 왔는데, 자 저의 심리 상태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이제 30분 후면 가운을 입고 거룩한 척하고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를 해야 되는데, 교회를 오는 길에 화를 내고, 말다툼을 하고, 심지어 어떤 청년이 목사에게 실망했다는 그런 눈길을 주었으니...이제 제가 마음을 추슬러야 되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야 되고, 하나님이 나를 목회자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분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을 필요가 있는 순간이 바로 그런 순간이에요. 감정에 굴복할 수 없고 또 사람의 어떤 비판에 굴복할 수 없고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믿음으로밖에는 설 수 밖에 없는 시간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주일 예배, 1, 2, 3부 예배를 무난히 다 마치고 이제 퇴근 시간이 됐는데, 아침에 말다툼했던 청년에게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직 거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운 여름날이었는데, 생수 한 병을 들고 거기에 가봤더니 아직 있더라고요. 어디 앉아 있더라고요, 피곤한 눈으로. 그래서 생수를 건네주면서 아침에 내가 미안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말하기를 나도 교회를 다니는데 직장 때문에 교회를 잘못간다, 하면서 생수를 받았어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런데 내 이상인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문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 좋은 신앙인이 되도록 돕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나의 나됨을 하나님이 아시면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을 알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로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상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 가면 돈 자랑 말고, 어디 가면 얼굴 자랑 말라는 말처럼,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상처 자랑을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상처를 입으신 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상처를 입으셨냐면 부활하신 다음에도 상처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도대체 도마도 정말 잔인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예수님의 창자국을 손가락을 집어넣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할 때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이기에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느냐. 하나님이 그냥, 그냥 죄인을 용서할 수 없었느냐, 이렇게까지 당신의 아들이 비참하게 고난을 당하게 하고서야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될 때가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일률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쉽게 우리는 모범답안을 말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맞는 얘기예요. 그렇지만 십자가의 의미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은 그것만을 강조합니다. 

카톨릭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믿지만 그들은 그런 식으로만 십자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좀 더 깊고 넓게 묵상을 합니다.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워낙 강퍅하고 돌처럼 굳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냥 말씀하셔서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도마와 같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그 손에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으로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믿지 못하겠노라, 라고 말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랬어요. I cannot believe,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게 아니고 I will not believe, 믿지 않겠다, 라고 말했어요. 

여러분 이것은 도마의 입장만을 반영하는게 아니고 우리 모두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건 도마만을 말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를 말하기 위하여 여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강퍅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이렇게 강퍅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그냥 말씀하시는 것으로는 우리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아픔의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같이 아프셨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이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언어를 가지고 말씀하실 때 사람이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이와 같은 뜻이 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의 큰 고통 사라져’ 십자가의 예수님의 고난을 볼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고 예수님에 대해서 마음이 열리고 그리고 예수님이 얼마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고난의 증거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멋진 대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고 가시 면류관 자국, 손의 못 자국, 옆구리의 창 자국, 즉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흔적 앞에서만이 우리가 도마처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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