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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 16: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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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 16:31-3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 대야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오늘 예배에 동참한 모든 이들 가운데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기뻐하는 오늘, 여러분의 마음도 부활의 빛으로 환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내내 참회와 삼감을 뜻하는 보라색과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흰색으로 바뀌었습니다. 보라색 강단보(褓)와 스톨을 흰색으로 바꾼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변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를 상징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의 생일은 다 다르지만 이 부활절은 우리의 공동 생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누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왜 소중한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 긴 과정을 일일이 다시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 뭔가 핵심만 살펴야 합니다. 가끔 공원묘원에 가면 비에 적혀 있는 말을 살필 때가 있습니다. 과거 광주 망월동 묘지에 갔을 때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라는 묘비명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아내에게 바치는 남편의 헌사였던 것입니다. 

고 김정준 목사님의 묘비에는 ‘임마누엘’이라는 한 단어만 적혀 있습니다. 그 단어는 목사님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던 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을 꿰뚫을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사랑, 섬김, 희생…. 여러 가지 단어가 떠오릅니다. 저는 오늘 세 가지 상징물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대야, 십자가, 빈 무덤이 그것입니다(도널드 크레이빌,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의 결론 부분 참고).

‘대야’하면 우리는 즉시 성 목요일에 벌어졌던 한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봉사를 하셨습니다. 식사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수건으로 닦아주셨던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후 예수님은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요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허리를 숙이고, 더러운 발을 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런 마음으로 섬기셨습니다. 남이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진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 섬김이 있었기에 예수가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의례가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대야와 수건을 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의 기운이 감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대야와 수건이 사라지면 예수 정신도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대야와 수건을 든 사람이 많아질 때 교회는 따뜻해지고,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고 회복시키는 생명 공동체가 됩니다. 

• 십자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야와 수건을 들고 사신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은 십자가였습니다. 오직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 왜 로마의 정치범 처형 도구인 십자가를 지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가 권력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세 잡은 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사회의 밑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것을 팔자려니 하고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 ‘나도 사람이다’라고 외칠 때 그들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러니 체제의 입장에서 예수는 불온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70-80년대를 살아가면서 기독청년들이 목이 터져라 하고 불렀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춤의 왕>이란 노래인데, 이 노래에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생명의 춤으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춤은 신바람입니다. 생명의 도약입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 멋진 생명의 춤을 추었습니다. 창조 때부터 시작된 예수의 춤은, 공생애를 거쳐, 십자가와 무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높은 양반들 위해 춤을 추었을 때 그들 천하다 흉보고 비웃었지만
어부 위해서 춤을 추었을 때에는 날 따라 춤을 추었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춤 췄더니 높고 거룩한 양반들 화를 내면서
나를 때리고 옷을 벗겨 매달았다, 십자가에 못박았다

십자가란 어떤 고통이나 시련이 닥쳐와도 사랑의 방식대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위협 앞에서도 인류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보다 큰 영혼이 어디에 있고, 이보다 아름다운 영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위대한 승리의 상징입니다.

• 빈 무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빈 무덤 앞에 섰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을 가두어놓았던 돌문은 이미 굴려졌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은 생명을 가두거나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빈 무덤은 그들의 생각이 그릇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춤의 왕>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습니다.

어리석게도 그들 좋아 날뛰지만 나는 생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다.
네가 내 안에 살면 나도 네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살련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 너 인도하련다 

빈 무덤은 사랑이 무력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빈 무덤은 죽음으로 얻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상징입니다. 죽지 않으려니 문제지, 죽기로 작정하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사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님은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이 참으로 힘찹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교회가 사는 길은 다른 것 없습니다. 이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예수를 향해 살아나야 합니다. 숫자의 신화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돈과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예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쉽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리고 교회는 삶을 속박하고 억압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반란을 꿈꿔야 합니다. 지금 눈물 흘리는 이들 곁에 다가가고, 지금 살맛을 잃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벗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생명의 춤을 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 아름다운 봄날 주님의 신명에 지펴 멋진 생명의 춤을 추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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