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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 앞에 선 세 사람 (요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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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앞에 선 세 사람 (요 20:1-18)


한 여인이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갔는데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본인은 이 사실을 모르다가 우연히 병실 밖에서 가족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자기가 암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충격과 슬픔을 느꼈지만 그런 마음으로 계속 지낼 수는 없단 생각에 여인은 계획을 세우고 움직였습니다. 

평소 만나고 싶었지만 미뤄두었던 만남을 가졌습니다. 마음 속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편지를 써야 할 사람에게는 편지를 썼습니다. 갚을 돈이 없나 살펴서 있으면 갚고, 지키지 못한 약속이 없나 살펴서 다 정리를 했습니다. 유산도 정리하고, 평소에 부담이 있었던 선교사님들에게 선교 헌금도 보내고, 유언서도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병세가 나빠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좋아지는 게 아니겠어요? 이상하다 싶어 다른 병원을 찾았는데, 오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인생 정리하느라 돈도 많이 쓰고 했는데, 억울하지 않으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온화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제가 지난 몇 달처럼 인생을 진지하게 산 적이 지금껏 없었어요. 앞으로 남은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에 삼 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부활주일입니다. 우리들은 부활 주일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즉 ‘소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개념 안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개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은 돌아가실 때의 육신을 그대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몸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오랜 시간을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지만 예수님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거하시는 몸으로 변화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마지막 때가 되면 홀연히 변화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과 같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죽었다가 지금과 같은 모습 그대로 살아난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는 모습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야 그래야 진정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변화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바울은 생애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과 기독교를 박해하던 그가 예수님과 교회를 세우고 이끄는 일에 온 몸을 바쳤습니다. 

변화된 대표적인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실 때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모두가 예수님을 위해 순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도망했던 사람들이 거짓을 꾸미기 위해 화형장과 단두대의 이슬로,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찬송하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명하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사흘째 되는 날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석회석으로 되어 있는 땅에 동굴을 파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시신은 안에 모신 후에는 입구를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무덤의 입구를 막는 돌은 장정들이 몇 사람이 힘을 모아야 굴릴 수 있는 크기의 돌입니다. 무덤 입구를 막는 돌문을 작을 돌을 고여 놓기 때문에 안에서는 절대로 열 수가 없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갈지 모르니 경비병을 두어 무덤을 잘 지켜 달라고 요청을 해서 경비를 삼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하였을 때 경비병들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막았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2절에 보면 그녀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을로 뛰어 내려가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전했습니다.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나이가 젊은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무덤 문이 열려 있었지만 그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제자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베드로가 힘겹게 뛰어와 열린 무덤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제 서야 요한도 베드로를 따라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무덤 안에는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곳에 예수님을 위해 입혀 들였던 세마포가 누에벌레가 누에에서 몸만 빠져 나온 것같이 그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면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을 그대로 두고 갔을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수상태였다면 깨어 돌 무덤 문을 열수도 없었을 뿐더러 열었다 하더라도 벌거벗은 상태에서 왜 수의를 두르지 않고 갔겠습니까? 더군다나 수의가 뱀이 허물을 벗듯이 그렇게 나올 수가 있습니까?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본 베드로, 요한, 막달라 마리아의 반응이 각각 달랐다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이성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요한입니다. 그는 무덤의 상황을 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그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죽은 후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는데 무덤 안을 돌아 본 후에는 예수님이 부활을 그대로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 정황을 살펴보니 예수님께서 분명히 부활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상황을 인식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다음은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보다 베드로가 더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믿었을 것일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24장 12절에 보면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놀랍게 여겼다는 말은 이상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세마포가 그대로 놓여 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한 쪽에 머리를 쌌던 형태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베드로에게는 아직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로는 조금 부족함을 느낀 것 같습니다. 더 많은 것을 확인하기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 같기는 한데 확신을 가지고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감정을 중심으로 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 화끈하게 믿을 것 같지만 그들은 상황에 따라 또 그 만큼 의심이 밀려오는 신앙입니다. 상황과 분위기를 잘 탑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당신의 부활하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또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떠난 후에도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부활하신 것 같지만 그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무덤을 떠날 수 없어 안타까움을 가지고 무덤에 울면서 더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울면서 예수님의 무덤을 다시 한 번 더 들여다보았습니다. 여인 혼자 외딴 곳에 있는 무덤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정서상 쉽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다시 무덤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 만큼 예수님을 사모했고, 안타까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께서 누워계셨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있었습니다. 천사는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사람들이 내 주님을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뒤에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마리아가 뒤를 돌아 보았으나 예수님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나의 주님을 옮겼다면 어디 두었는지 내게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다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시니 그 때서야 마리아는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는 다시 마을로 뛰어 내려가 제자들에게 ‘내가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믿지는 못했지만 그 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해 결국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상황과 모습이 각각 다르지만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소생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을 소유할 몸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변하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활을 믿는데 부활을 누릴 수 있는 모습으로의 변화된 삶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우리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각각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던 간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죽음 이후에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에 대한 믿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만들어 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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