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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흔들리지 않는 소망 (요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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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소망 (요 20:1-8)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시체가 수습되었고, 이제는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고, 무덤을 방문해서 그분을 기억하는 것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을 애도하기 위함입니다. 애도란 미래가 없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래가 생겼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희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일어서는 부활

영어단어 중에 knock down(넘어졌다) 이라는 말과 knock out(완전히 쓰러졌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knock out을 복싱 경기에서 KO패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1라운드는 갈릴리 중심의 홈경기였습니다. 1라운드는 예수님의 승리였습니다. 2라운드는 예루살렘, 즉 어웨이 경기였습니다. 2라운드에서 예수님은 knock down되셨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KO패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knock out되지 않으셨습니다. 3라운드, 즉 부활의 소식이 새벽 여명을 깨운 것입니다. 그는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1라운드 같은 순간도 있지만 2라운드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도무지 돌파구가 없는 것 같은 상황, 사방으로 막혀 있는 상황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2라운드에서 백기를 듭니다. KO를 인정해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고, 인생은 정의롭지 않다거나 모순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생이 2라운드에서 끝나지 않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경기에는 3라운드가 있습니다. 죽음이 있지만, 부활이 있습니다. 어둠이 있지만, 빛이 있습니다. 좌절이 있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지막 승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지금 당장은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지느니라” (잠 24:16)라고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knock down되어도 knock out되지 않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재앙의 유무가 아니라 재앙 후에 어떻게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3라운드를 믿습니다. 

빅토 프랭클의 예

빅토 프랭클이라는 유태인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나치의 감옥에 수용되어 있으면서 사람은 어떤 고통 가운데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통조차도 의미가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수용된 사람들 중에서 동일한 환경에서도 삶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부류가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빵 한 조각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빅토 프랭클은 이런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해도 마지막 한 가지는 절대로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유입니다.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말입니다. 나치의 감옥에서도 여전히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만난 한 여인에 관해서 전해줍니다. 그가 만난 한 젊은 여성은 고통의 운명이 자신을 내리치는 현실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 직면하기 전에 그녀는 인생을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었으며, 삶의 영적인 의미와 무관하게 살고 있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창문 바깥에 있는 한 그루의 밤나무를 가리키면서 두 개의 꽃 봉우리를 피운 이 나무 한 그루가 고독 속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친구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혹시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나무가 어떤 말을 했는지 그녀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난 지금 여기에 있다. 난 지금 여기에 있다. 난 생명이다. 난 영원이다. ("I am here--I am here--I am life, eternal life." pp. 89-90) 문득 들어서는 이해하기 싶지 않은 말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오히려 생명의 박동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프랭클은 고통은 감당하기 싫은 삶의 현실이지만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심지어 고통이 없이는 누구도 절대로 온전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고통의 순간에도 희망할 수 있고, 그렇게 살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람은 소망할 수 있습니다. 소망은 분명히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내적인 실재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고통 가운데에서 절대적인 소망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활-흔들 수 없는 소망

희망이라는 단어, 소망이라는 단어는 가장 기독교적인 단어입니다. 소망이 없는 인류 가운데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을 믿으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도, 살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은 희망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중에는 실제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희망을 해부해 보면 희망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Erikson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인간의 발달 가장 초기에 생기는 심리적인 힘이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소망은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갓난아이가 배가 고파서 울면 엄마가 소리를 듣고 젖을 물려줍니다. 용변을 해서 찝찝한데 엄마가 달려와서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울기만 하면 마술 같은 일이 생겨납니다. 부모의 적절한 돌봄을 받는 아이는 부모를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엄마가 결국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줄 것을 믿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지금 현재 배가 고파도, 기저귀가 불편해도 엄마가 곧 다가와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소망이란 좌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좌절하면서도 잘될 것이라고 바라보는 힘입니다. 소망이란 현재 좌절하지만,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소망한다는 것은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에 대한 신뢰로 인해서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 최근에 어떤 엄마에게서 자신은 자녀가 좌절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좌절을 배우지 않고, 좌절하면 낙망하고 포기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녀가 좌절을 배우고, 즉 인생을 배우면서, 좌절의 경험 속에서도 소망하는 것을 배우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에게 주어야 할 사랑은 좌절하지 않도록 미리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부모는 자녀를 믿어준다는 신뢰를 주는 것입니다. 

인간 발달 가장 초기 단계에 꼭 생겨야 하는 내적인 힘이 소망인 것처럼, 기독교 역사의 시작은 소망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제자들은 소망을 잃었습니다. 그를 메시야로 기대하던 사람들도 모두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이 있습니다. 다시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바로 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은 결국 세상은 늘 세상의 방식대로, 힘의 논리대로 움직인다고 믿고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고 단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 사건은 최후 승리자가 예수님이심을, 그리고 그를 보낸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부활 신앙은 하나님께 소망을 거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 46) 은 그가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경험하면서 힘겨운 십자가를 견디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늘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를 지켜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십자가를 이길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1: 4: 16) 라고 고백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소망하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바라보는 힘입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시작된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의 핍박에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소망인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소망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 외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요한입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예수님 옆에 앉아 있던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은 오늘 본문 8절에서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요한은 베드로가 빈 무덤에 들어가고 난 후에 그곳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보고 믿더라” 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빈 무덤을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사랑받은 사람에게는 믿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에게는 소망하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소망을 두고 계십니까? 현대인들은 사라질 것에 희망을 겁니다. 인기에 희망을 걸고, 돈에 희망을 걸고, 성공에 희망을 걸고, 자식에 희망을 겁니다.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 내가 육체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인기는 사라지고, 성공도 끝이 나고, 자식도 뜻대로 되지 않고, 돈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소망의 대상이 아닌 것에 소망을 거는 현상을 일컬어서 “금송아지 신드롬”(golden calf syndrome) 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예배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이 만든 우상에 소망을 둔 것입니다. 소망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면 안에서 경험되는 “미래를 기대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누구도 이 소망을 흔들 수 없습니다. 

부활의 도전

그렇다면 오늘 부활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도전을 줄까요? 예수 신앙은 곧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곧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의 무덤이 아니라, 텅 빈 무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 소망을 가지고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2라운드에서 경기가 끝났다고 하는 사람에게 3라운드가 있음을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부활의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요 20: 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보면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아직 낫은 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몸은 온갖 상처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여전히 손에는 못 자국이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영광의 상처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우리를 위한 상처의 흔적이 그래도 남아 있었습니다. 

리가 부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의 상처가 어디 있느냐?” 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겪은 상처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손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못 자국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발에는 사랑의 못 자국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머리에는 사랑의 가시 자국이 있습니까? 만약 아무런 상처가 없다면 이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수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영광만을 누린 것이 아니라, 이웃들을 위한 부활의 수고를 감내했습니다. 부활의 메시지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으니까 이제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는 수준에만 머무른다면 그분의 부활은 반쪽 부활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을 던집니다. 부활의 도전은 단순히 부활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처럼 이웃을 위해서 사랑의 수고와 고통을 겪으며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부활 후 제자들의 삶에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소망 가운데에 사는 삶이 곧 부활임을 삶으로서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사십에서 한 대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수없이 많은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율법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에서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 (고후 11:30) 

그는 로마에서 결국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들도 죽음을 택하는 자리까지 내려가면서 결국 부활을 맞보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 소망을 잃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률 1위인 국가입니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살기 위해서 애쓰지만, 사실은 자신들을 비참한 감옥에 가두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닌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우리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습니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섬김을 실천하며, 세상에는 비록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세상에는 소망이 있음을 당당하게 삶으로 증거 해야만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방식을 과감하게 선택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우리의 소망임을, 십자가가 곧 부활의 길임을 증거 해야만 합니다. 우리 함께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소망의 대사가 되어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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