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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라! (느 8: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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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라! (느 8:9-12)  
 
    
: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능력임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영원 안식얻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영원 안식얻네(439장 1절)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일 수도 있고, 미련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4). 십자가는 단지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사형 도구를 가리키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은 풍성합니다.
[보호 십자가] - 십자가는 ‘보호’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자들은 죄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쓰듯이 삶의 고통에 가림막이 되는 십자가입니다.
     
[소명 십자가] - 십자가는 ‘소명’을 상징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던 사람이 방향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빛 아래서 살아야 합니다.
     
[일치 십자가] - 십자가는 ‘일치’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교파와 제도를 넘어서 교회는 일치를 지향하여야 합니다.
     
[무릎 십자가] - 십자가는 ‘무릎’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하여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오히려 낮은 자를 섬기셨던 예수님을 닮아 우리는 세상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무릎 십자가를 세워야 합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말씀을 사모하고, 경청하고, 존중하였습니다. 에스라는 그들 앞에서 학사요, 제사장이요, 예배자로써 말씀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수많은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스라가 낭독하는 말씀을 백성들 사이에서 통역해 주었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적용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관찰할 뿐만 아니라 해석하고 마지막으로 적용하여야 합니다. 적용이 없는 말씀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습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분명히 알고 그 의미를 남다르게 해석한다고 해도 실제로 무릎을 꿇지 못한다면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무릎이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실천에는 그렇게 하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기준’이라고 부르겠습니다.

I. 기준

우리가 적용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을 무엇입니까?

9절 말씀입니다.
: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습니다. 백성은 잠깐 운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깨닫고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에게 울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그것은 이 날이 거룩한 날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바로 그 분의 거룩한 날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0절 후반절에서도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라고 하여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도 “오늘은 성일이니”라고 하여 그 날이 어떤 날인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9절과 10절과 11절에서 이어서 세 번씩이나 ‘성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통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거룩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거룩한 날에 알맞은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여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이유를 기준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무조건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어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여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약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약이 아닌 가짜 약을 진짜 약으로 알고 먹으면 나타나는 기대 이상의 효과가 있습니다. 아무런 효능도 없는 부재료나 소금물 등으로 만든 가짜 약이라도 진짜로 알고 먹으면 진짜 약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플라시보 효과’라고 부릅니다. 
     
독일의사협회가 최근 공개한 ‘플라시보 의학’ 보고서에 따르면 위장장애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게 가짜 약을 투여한 결과 59%에서 증상이 호전됐다는 것입니다. 가짜 약의 약값이 비쌀수록 플라시보 효과가 강하게 나타났답니다. 또 의사가 환자 자신의 상태를 잘 이해하고 있거나 자신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환자들에서 플라시보의 효과가 높은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약효가 없는 약을 먹고도 치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이것은 인간의 마음가짐에 대한 중요한 예는 될 수 있지만 믿음에 대한 예는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보다 있다고 하는 것이 더 편안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행복한 삶을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인생에게 주신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유가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밝히신 이유 때문에 행동하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때 하나님의 이유뿐만 아니라 또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10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0b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여기에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성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힘’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호자로 삼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뻐할 때 우리는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능력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기쁨을 기준으로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기에 앞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자신에게 제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하나님을 슬퍼하시게 하는 일이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예수님께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예수님은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이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를 아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원대로 되기를 거듭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이가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런 사람은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함으로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유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 의하여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II. 말 것

말씀을 적용할 때,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지금 여기에서 이유는 하나님의 성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슬퍼하다’[lb'a/아발]는 통곡하며 한탄하는 것입니다. ‘울다’[hk;B;/바카] 역시 통곡하여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것이나 우는 것이나 같은 말입니다.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는 것은 애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 애통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b)고 하였습니다. 골고다로 십자가를 지고 가신던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슬퍼하여야 합니다. 가슴을 찢으면서 슬퍼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눈물을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는 칠월의 절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쁘고 즐거운 축제일이 되게 하여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이유를 알기에 눈물을 닦고 하늘을 쳐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숙인 고개를 드시기 바랍니다. 

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10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0b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또 역시 성일이기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근심하다’[bx'[/아짜브]는 앞에서의 슬퍼하다와 같은 뜻의 말입니다. 본래는 ‘새기다’는 말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줄 정도로 걱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주름살이 지도록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11절에도 거듭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2. 근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노아의 홍수 직전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6) 한탄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근심하셨으나 우리에게는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니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심은 마음을 나눠지게 합니다. 근심은 에너지를 분산시킵니다. 근심하면 마음이 나눠져서 결국 절반의 마음으로 사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적용은 구체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강가에 있는 마을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했습니다. 그 마을은 강 상류에서 벌목한 나무들을 하류로 내려 보낼 때 중간에 거쳐 가는 마을입니다. 사람들은 벌목한 나무 끝에 자기 도장을 찍어서 내려 보냅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도장 찍은 나무 끝을 자르고 자기 도장을 찍어서 아래로 내려 보내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일에 “이웃을 사랑하십시오.”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아멘!”하였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의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역시 은혜를 받았다고 하였는데 남의 나무 끝을 자르고 자기 도장을 찍는 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의 나무 끝을 자르지 마십시오.”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아멘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교회에서 떠나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우리는 하지 말라고 하는 말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버려야 합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은 성도들에게 술과 담배를 엄격하게 금지하였습니다. 중국의 선교사들이 아편과 놀음을 금지하였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어긋나는 일이라면 버리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읽고 그 뜻을 살피는 것은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지금 마음에 생각나는 바로 그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뿐만 아니라 하여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할 것이 있습니다.


III. 할 것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손’까지”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거리는 1m도 채 안 되는 거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행동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1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0a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돌아가서 살진 짐승들을 잡아 푸짐하게 차려서, 먹고 마시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가서 잔치를 차려 배불리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하였습니다. 이것은 돌아가서 크게 잔치를 벌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1. 잔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앞에서 ‘슬퍼하지 말라’, ‘울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는 한마디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일이기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즐거워하는 잔치도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고 즐기고 축제하는 것을 죄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엄숙하고 침울한 종교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에는 가슴을 치며 슬퍼하며 애통하여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즐거운 일이 있다면 함께 먹고 마시며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더 큰 기쁨이 있다면 잔치를 벌이고 축제를 벌이는 것도 신앙의 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축제도 회복하여야 합니다.

 또 그들에게 명령되어진 하여야 할 적용은 무엇입니까?
     
다시 1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0a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잔치를 벌이되 혼자 먹고 마시지 말고 아무것도 차리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몫을 보내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12절 말씀에서 모든 백성은 돌아가서 먹고 마시며, 없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2. 나누어 주도록 하였습니다.
     
나눔은 구약과 신약이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 백성의 덕목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의 특징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는 것입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밭과 집이 있는 사람은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행 4:34-35).
     
나눔을 위해서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강제로라도 빼앗아 나누자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눔이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꼭 쥐고 있는 손을 펴서 아무 것도 없는 빈손을 벌리고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번 부활절 헌금을 정성껏 드려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하여야 할 적용이 남아 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조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정숙하다[hv;j;/하솨]는 말이나 조용하다[hs;h;/하싸]는 말은 모두 침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들은 백성이 감정적으로 흥분하여 울고불고 하여 난장판처럼 시끄러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백성을 조용히 시켰습니다. 
     
3. 조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을 믿고 입을 크게 열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시 81:10). 때로는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단 9:19)라고 ‘주여! 주여! 주여!’하며 부르짖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침묵하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 때가 어느 때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이유를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스라가 읽어 들려 준 말을 백성들이 밝히 알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레위인들이 통역하고 해석해 주었고 적용하여 주었습니다. 말씀의 생명은 적용 즉 실천에 있습니다. 
     
이번 주간은 사순절 마지막 주간인 고난주간입니다. 우리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더욱 실천합시다. 이를 위하여 입으로 먹는 것, 눈으로 보는 것을 절제합시다. 이번 주간만큼은 새벽기도를 꼭 합시다. 부활절 헌금을 드려 가난한 이웃과 나눕시다. 부활주일 오후 전교인 체육대회를 축제로 지냅시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승리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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