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축제에 참여하라! (느 8:13-18)

첨부 1


하나님의 축제에 참여하라! (느 8:13-18)    
  
:13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4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16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17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예수 부활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활절 새벽, 온 성도들이 하얀색 옷을 입고 촛불 예배를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촛불은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부활의 상징입니다. 또 흰 옷은 모든 죄에서 벗어난 부활 성도를 상징합니다. 
     
중부 유럽에는 부활절 행진이 있습니다. 주로 도시에서 시골로 가는데 맨 앞에 꽃으로 장식한 십자가를 세우고 찬송하며 행진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합니다. 행진은 온 세상에 부활의 기쁨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부활절 상징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은 달걀입니다. 달걀은 죽은 것같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생명이 계속되고 있기에 부활의 상징으로 제격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이 되면 달걀을 주고받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부활은 세상에 생명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좀 생소하지만 돼지고기를 부활절의 상징으로 여기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인도와 유럽에서 돼지는 행운과 성공의 상징이랍니다. 영국에서는 성탄절에 ‘산돼지 머리’를 식탁에 내놓는다는데, 부활절에 여러 나라에서 햄을 먹는 것과 같은 이유랍니다. 
     
부활절을 상징하는 것으로 백합꽃이 있습니다. 1882년, 화초를 재배하는 해리스(W. K. Harris)라는 분이 백합을 미국에 퍼뜨렸는데 꽃이 처음으로 피는 시기가 부활절이라 ‘부활 백합’으로 불렸습니다. 백합은 모양과 형태가 아름답고, 특히 흰색은 청순함과 우아함으로 부활의 감동을 더해주는 좋은 소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징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상징이 본래 드러내려고 하였던 의미를 잊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따르는 전통이라면 죽은 상징입니다. 상징을 통하여 그 너머에 있는 실체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말씀을 사모하고, 경청하고, 존중하였습니다. 에스라는 학사요, 제사장이요, 예배자로써 그들 앞에서 말씀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말씀을 백성들 사이에서 통역해 주었고, 해석해 주었고 적용해 주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하여야 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 음식을 먹고 이웃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깊이(深化)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I. 심화

13절 말씀입니다.
 :13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백성들은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잔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백성을 대표하는 각 가문의 어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함께 학자 에스라에게로 갔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다시 모였습니다. 13절에서 ‘밝히 알다’는 말은 12절에서 모든 백성이 ‘밝히 알다’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12절에서 ‘밝히 알다[@yB/빈]’는 구별하는 정도로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13절에서 ‘밝히 알다[lk'c;/싸칼]’는 매우 지적으로 깊이 아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보다 더 신중하고 이지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1. 깊이 알기를 원하였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성경공부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말씀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쉽고 재미있게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깊이 연구함으로 신앙의 깊이를 더해 갈 수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행 17:11).
말씀의 깊이를 더해 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바랍니다.

말씀의 깊이를 더해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4절 말씀입니다.
:14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에스라와 백성의 지도자들이 하였던 일은 율법에 기록된 것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보다[ax;m/마짜]’는 말은 발견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깊이 관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기록에서 그들이 하여야 할 무엇을 발견하였습니다.
     
2. 기록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동안의 관습으로 굳어진 것을 걷어내고 성경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지식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듣는 것입니다. 
     
오래전, 어려운 신학 책들을 손에 놓지 않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선배의 대답은 “성경은 너무 어려워서 성경에 관한 신학 책을 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게 성경은 쉽고 신학 서적은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참 후에야 성경은 쉬운 책이 아니며,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더 한참 후, 그 어떤 신학적인 참고 서적보다 성경 말씀 그 자체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느헤미야서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말씀을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 구약성경의 레위기(레23:23-43)나, 신명기를 읽다가 그들이 하여야 할 일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읽었고 거기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아는 성경 지식이 아니라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여야 할 일을 발견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II. 실행

그들은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깊이 공부하다가 발견하여 실천에 옮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15절 말씀입니다.
: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에스라와 지도자들은 율법의 기록에서 초막을 짓도록 하라는 말씀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산에 가서 올리브 나무 가지, 들올리브 나무 가지, 소귀나무 가지, 종려나무 가지, 참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책에 있는 대로 초막을 만들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초막[hK;s/쑤카]은 오두막입니다. 산이나 들에서 자라는 풀로 지었으니 우리식으로 하면 초막이라고 부릅니다. 
     
초막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은 백성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6절 말씀입니다.
 :16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그래서 백성들은 나가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지붕 위와 마당과 하나님의 성전 뜰과 수문 앞 광장과 에브라임 문 앞 광장 할 것 없이 어디에서나 저마다 자기의 초막을 만들었습니다. 
     
1. 초막을 지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풀로 집을 짓고 살려갔다는 말은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초막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유대인들이 매년 꼭 지켜야 할 삼 대 절기는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입니다(신 16:16). 그중에서 세 번째 절기인 초막절은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이 광야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유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광야에서 함께 계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경험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은 가을의 포도 수확이 끝난 다음 광야로 나가 풀로 지은 초막에서 지냈습니다. 
     
이제, 광야 사십 년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 칠십년을 지나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그들은 그동안의 고생과 그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초막을 지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역사적 기억은 매우 중요합니다. 역사적 기억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념물을 세우기도 하고 기념식을 하기도 합니다. 역사를 잊으면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역사를 잊는 것은 그 가운데서 일하신 하나님을 잊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데로 초막을 짓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17절 말씀입니다.
:17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마치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돌아왔던 사람들처럼 초막을 세우고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안타깝게도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렇게 축제를 즐긴 일이 없었습니다.
     
2. 초막에 거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초막절이 되면 광야에 나가 초막을 짓고 이레(칠일) 동안 지냅니다. 요즈음은 자기 집 대문 앞에 초막을 세우고 그 속에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가족들과 더불어 절기를 보냅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곳의 집들의 지붕이 대부분 슬래브 식으로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지역이기도 하지만 그 위에 초막을 짓기 위한 구조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고급 아파트는 테라스(terrace)나 베란다가 있는 구조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곳에 초막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레 동안이나 초막에 거하였다는 것은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여러 날 동안 불편을 감수하며 광야의 생활을 회상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직접 어려움을 겪어보지도 않았고, 조상들이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세대는 불행한 세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셨던 일을 경험적으로 기억하기 위하여 절기를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들은 초막을 짓고 그곳에 거하면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18절 말씀입니다.
: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에스라는 첫날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이레 동안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칠 일간 절기를 지킨 다음 팔 일째 되는 날 규정대로 성회를 열었습니다. 이 때 성회를 열다[hr:x;[} 또는 tr,x,[}/아짜라 또는 아쩨레트]는 말은 집회를 가리킵니다. 그들이 모두 다 같이 한 장소에 함께 모였다는 것입니다. 
     
3. 성회를 열었습니다.
     
같은 경험이나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어야만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함께 고생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 정이 느껴지고 감이 통합니다. 남들이 모두 보리밥도 없어서 굶었던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쌀밥 먹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되기가 힘듭니다. 감정적으로 경험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없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축제는 바로 이런 공동의 경험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초막절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가정의 소중함과 신앙 공동체의 소중함을 감사합니다.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모두에게 주시는 기쁨을 나누며 교제하는 것은 공동체를 살리는 힘이 됩니다.
     
모든 교인들이 교회적인 축제를 통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회복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기록된 말씀을 읽고 그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서기관들은 지적인 깊이는 있었는데 영적인 깊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축제에 대한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합니다.


III. 축제

구약의 율법이 정하고 있는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을 넘어서 우리들이 지켜할 축제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조차 무교절은 유월절과 겸하여 지키고 있습니다(눅 22:1).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초막절은 농사를 지어 거두어들인 수장절과 같이 지키고 있습니다(출 34:22). 유대인들은 칠칠절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기념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칠칠절은 오순절로, 성령이 강림으로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야 할 절기는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5장 7절 말씀입니다.
고전 5: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습니다. 여기에서 ‘희생되었다[quvw/뒤오]’는 말은 제물로 바쳐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희생 제물인 양으로 바쳐졌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게 하심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되심으로 율법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율법의 시대가 가고 은혜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것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1. 예수님은 중심이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 사순절 기간 중 마지막 주간인 수난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눅 22:19). 애굽에서 양을 잡아 그 피를 바름으로 죽음이 넘어갔던 것을 기억하는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으로 돌아가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양의 희생적 죽음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구했던 것같이 십자가의 대속적 피 흘림이 인간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십자가는 삶의 중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은 다시 살아나심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a)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심으로 인간을 의롭게 하신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삽니까?
     
고린도전서 5장 8절 말씀입니다.
고전 5: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이러므로 명절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명절은 예수님이 유월절 양이 되신 명절입니다. 여기에서 ‘명절을 지키다[eJortavzw/헤올타조]’는 ‘절기를 지키다’, ‘축제를 거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새로운 유월절 축제로 지켜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축제를 지킵시다.
     
부활은 처음부터 교회의 중심이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켰던 유일한 절기입니다. 다만 2세기 후기에 이르러 부활절을 언제 지키느냐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으로 돌아가심과 유월절 즈음에 돌아가신 것이 연결되어 유대인의 유월절에 맞추어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 부활절은 달력으로는 유대교의 유월절과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절은 죄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일 년 단 한번 부활절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매 일요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죽음을 이기신 부활을 축하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2:8, 막 2:28, 눅 6:5). 예수님 때문에 안식일의 개념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개념을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을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신 유월절로 지킵니다. 우리는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을 주님이 부활하신 날, 주님의 날, 주일로 지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축제 참여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활 주일은 주님의 날 중에 주님의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이 아니라, 이 날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이를 축하하는 기쁨이 우리 모두의 공동 경험입니다. 그래서 매 주일을 축제로 지내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