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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은 축복의 장 입니다 (시 12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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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축복의 장 입니다 (시 128 :1-6) 


스코트 월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에서 가장 이혼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몇 번 이혼을 했을 것 같습니까? 무려 스물여섯번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한번도 결혼 못한 노총각들이 들으면 속된 말로 환장할 얘기입니다. 한번은 이 스코트 월프의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의 인생에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스코트 월프의 대답이 참 인상적입니다. 

"내가 처음부터 다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나는 한 아내와 더불어 살고 싶네. 내 인생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정이 없었네." 

스코트 월프가 자녀를 얼마나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가정생활이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엉망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살고 있는 남편과 아내에게 감사하십시오! 바꿔봐야 별 수 없지 않습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함께 지낼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은 추석을 앞드고 이제 고향으로 가거나 아니면 고향으로 찾아올 가족들을 생각하여 "가정은 축복의 장(場)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가정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무엇보다도 얼마전 있었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50년만의 남북이산가족상봉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전 세계적으로 참 새롭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서로 얼싸안고 만남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에서 우리는 오늘날 잃어가는 가정의 의미와 그 소중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1) 가정은 부모 자식간의 애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이 전 세계 시청자들을 울렸습니다. 50년만에 이루어진 부모와 자식 간의 만남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백발이 다 된 아들에게 밥을 떠먹여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상봉의 감격에 겨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노모가 들것에 실려 나가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모는 들것에 누워서도 한사코 아들 곁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치매로 말문을 닫았던 어머니가 아들과 맞닥뜨리자 불현듯 그 이름을 부르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어느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올까봐 50년 동안 이사 한 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위암 말기 환자가 되어 간신히 아들과 재회했습니다. 생명이 얼마남지 않은 어머니의 노구를 안고 통곡하는 늙은 아들의 모습에 참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엠불런스 속에서 안타깝게 혈육을 상봉하는 장면도 이어졌습니다. 

거동조차 할 수 없어 마지막날 새벽에야 병원에서 가까스로 아들을 만난 어머니는 "못 가, 나하고 살아"라며 절규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했고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가는 아들 손을 잡고 할 말을 잊은 채 눈물만 흘리시던 팔순의 어머니의 모습에선 더 이상 할 말을 잊었습니다.  

가장 인상깊었던 상봉은 '가족상봉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한다'는 당국간 협의사항 때문에 워커힐 호텔을 떠나지 못했던 양한상 씨가 남북간 극적 타협으로 마지막 날 새벽 어머니 김애란 씨를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큰 아들의 방문이 믿기지 않는 듯 늙은 어머니는 "네가 한상이구나…학교 갔다 온다더니 이렇게 50년만에 왔구나…"라며 50년 세월의 한을 씻어냈습니다. 50년의 기다림에 비해 너무도 짧은 40여분의 만남을 끝내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던 양씨 손에는 김할머니가 '한번도 만나지 못한 북쪽의 며느리에게 전해달라'며 앙상한 손가락에서 빼내 건네준 반지가 꼭 쥐어져 있었습니다. 

남북이산가족상봉 내내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온 것은 없었습니다. 그 부모가 많이 배웠든 많이 배우지 못했든, 능력이 있든 그렇지 못하든 부모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그것도 지척에 혈육을 두고 살면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수도 없이 많지 않습니까?. 이러한 분단과 이별의 슬픔을 생각할 때 우리는 너무도 안일한 삶을 살아오고 있지 않았나 되돌아 봅니다. 

백발이 다 된 늙은 아들의 입에 음식을 집어 넣어 주는 노모의 애정이 어디 이산가족뿐이겠습니까? 우리의 부모들은 모두 이러한 애정으로 우리를 키우셨고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50여년을 그리움에 사무쳐 살아온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절한 사연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늘 곁에 살면서 따뜻한 사랑을 나누며 살지 못하는 우리의 빈약한 가정이 부끄럽지는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추석에는 부모 자식 간의 애정을 깊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형제간의 사랑도 확인하시고 서로서로 맘을 열고 삶을 나누시며 서로를 위해 진심어린 기도를 나누는 복된 명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 

(2) 소중한 가정에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자꾸 남북이산가족얘기를 장황하게 얘기하는 것을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가정얘기, 생명 없는 가정 얘기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번 남북이산가족 상봉은 그야말로 가정의 소중함과 가슴 벅찬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의 상봉과 이별 만큼 가정에 대해 가장 강하고 진실하게 증거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남북이산가족 얘기를 나누려는 것입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은 상봉의 기쁨만큼이나 이별의 아픔이 큼을 보여주었습니다. 50여년의 세월이 단 몇일, 단 몇번, 단 몇시간으로 보상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다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산가족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7시43분부터 시작된 생이별은 통곡 속에 8시로 예정된 승차시간을 넘겨 북측 가족이 버스에 오른 뒤에도 계속됐습니다. 북측 오빠는 남쪽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울지 말아요, 자네가 울면 내가 집에 못가요"라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버스에 오른 오빠의 체온을 한번이라도 더 느끼려 유리창에 손을 대고 '석별의 눈빛'을 교환하던 여동생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남편과 헤어진 뒤 50년 동안 고생 고생하며 두 아들을 키운 남한의 아내는 떠나는 북한의 남편을 위해 열여섯 살 때 찍은 결혼사진과 함께 북쪽 부인용 시계를 준비했습니다. 그러고는 북한의 남편에게 말합니다. "이제는 세상 무슨 일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신산(辛酸)했으면, 그리움으로 마음이 얼마나 닳고 닳았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어떤 이별의 장면이 슬프고 감동적이지 않았겠습니다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별장면이 있었습니다.  

워커힐 호텔에서 김포공항으로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인 8시 15분. 창밖으로 어머니 김봉자 씨 손을 꼭 붙잡고 있던 북쪽 이영수 씨는 "오마니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외친 뒤 갑자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훔쳐가며 부르느라 노랫말이 중간중간 끊겼지만 어머니는 이내 아들의 노래를 알아듣고 다음 소절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이어받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버스 안과 밖에서 함께 부른 모자의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 버스는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출발했습니다.  

구구절절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별장면들이 연출되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비행기로 50여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내 혈육을 두고 50여년동안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바보스럽고 미련했다는 생각에 화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이념이나 체제 그리고 힘있는 사람들의 욕심으로 인해 서로를 그리면서도 반세기동안 만나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 쉽고도 안일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가족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명절에 모두 함께 모이는 가족, 가정의 소중함과 의미를 깊이 되새기시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가족구성원들은 서로의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가정이 소중한 줄 알고 가정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축복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서로간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무책임하게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서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가정이 흔들리게 됩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리게 됩니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이제는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아버지학교'가 생기고, '아버지와 가정' 이라는 잡지도 나오고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가정의 소중함이 재발견되어 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성도들이 앞장서서 앞장서서 가정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몸으로 실천 할 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일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받는 길입니다. 

가족 상호간에 가정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은 중요한 만큼 힘든 일입니다. 남편으로서의 책임, 아빠로서의 책임, 아들로서의 책임, 형제로서의 책임, 적어도 가정에서 남자가 해야 할 일이 네가지는 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로서의 책임, 엄마로서의 책임, 며느리/딸로서의 책임 등… 부모로서의 책임이 있다면 마땅히 자녀로서의 책임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이 서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평화는 깨어지고 불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 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가정의 평화는 여성들에게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괜히 여성들에게 가정 평화의 책임을 지우려고 하거나 또는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인정해 줌으로 여성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집안에 며느리가 잘 들어오면 부모와의 관계, 형제 자매와의 관계가 모두 원만해 진다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크고 절대적이기에 여성의 가정에서의 역할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때 가정이 든든히 서게 됩니다. 특별히 신앙생활하는 아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온유와 인내로 자신을 역할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들이 온유하고 지혜로울 때 불신남편들도 주께 돌아오게 됩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문제아로 남아있던 자녀들이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에 변화되어 정직한, 사랑스런 자녀가 됩니다.  

고대 히포(Hippo)의 감독이었으며, 서방기독교의 거목(巨木)이었던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머니는 어버지를 주로 섬겼나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위해서 아버지를 구원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나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몸소 행동으로 당신에 관해서 전했나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행동으로 당신께서는 어머니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어머니는 당신을 위해 아버지를 얻었나이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선행과 온유와 인내는 결국 불신남편을 주의 자녀로 변화시켰으며, 그의 방탕했던 아들인 어거스틴을 기독교의 큰 거성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정은 땅 위에 세워지지 않고 아내 위에 세워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잉거솔(Robert Gcreen Ingersoll 1833-1899)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데는 열 명의 남자가 필요하지만 한 명의 여성이면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남자들고 잘해야지요. 모쪼록 가정의 구성원마다 서로의 역할을 잘 감당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는 가정들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중심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1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본문에서 3절을 보면 행복한 가정, 축복된 가정의 모습이 보입니다. 표준새번역으로 봅니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상에 둘러 앉아 있는 네 아이들은 올리브나무의 묘목과도 같다" 시인은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집안을 다스리는 그 아내를 결실있는 포도나무와 비교합니다. 식탁에 둘러앉은 행복한 자녀들은 피어오르는 감람나무의 싹에 비교합니다. 하나의 건강하고 소박하고 세상에 물들지 않은 생활의 기쁨과 활력이 표현되어 있는 시입니다. 나아가서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축복으로 이해했습니다. 시인의 믿음은 아내와 자녀를 통하여 한 인간이 갖는 기쁨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어떤 가정에 이런 축복을 주십니까? 1절과 2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봅니다. 
"1주님을 경외하며, 주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복을 받는다. 2 네 손으로 일한만큼 네가 먹으니, 이것이 복이요 은혜이다" 

주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형통의 복, 가정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역사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의 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 자리 잡았던 인류최초의 가정인 아담의 가정이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요,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가정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그리고 동시에 부부간에도 바른 교제가 지속되는 가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의 가정은 바로 하나님이 중심이 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그 명령에 불순종하므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부부간에도 인간적인 갈등의 독소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중심에 계신 가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복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주인이 될 때,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가정의 불화나 다툼은 세상적인 것이 그 중심에 서게 될 때 발생합니다. 얼마전 우리는 모 그룹의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을 보았습니다. 같은 형제끼리 그룹을 승계하기 위해 암암리에 경쟁하는 모습이 치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모두 물질과 명예가 그 분쟁과 다툼의 근본원인이었습니다. 물질이 가정의 중심에 서게 될 때 가정은 무너집니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닙니까?  

형제투금(兄弟投金)이라는 고사를 아시지요? 우애가 깊던 한 형제가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주웠답니다. 나루터에서 배를 잡아타고 강을 건너던 중, 갑자기 형이 주운 금덩이를 강 깊은 곳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아우가 묻습니다. "어째 그 귀한 금덩이를 던지십니까?" 아우의 물음에 형이 답하기를, "내가 금덩이를 주운 순간 내 마음 속에는 그 금을 혼자서 차지하려는 욕심이 생겼다. 너만 없으면 내가 이 금을 혼자서 차지할 수 있을텐데, 라는 못된 생각이 생겼다. 그래서 이렇게 금덩이를 강물에 던진 것이다" 그러자 아우도 말하기를, '저도 형만 없었다면 금을 혼자서 차지할텐데, 라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형이 금을 강에 던져 버리니 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라고 고백했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가정의 형제 갈등은 물질 때문에 오기도 합니다. 부모가 물려줄 유산 때문에, 내가 물질에 대한 부담을 적게 하기 위하여. 금덩이를 강물에 던진 형제처럼 과감히 세상적인 욕심,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비우세요. 평안이 옵니다. 욕심을 버리세요. 행복이 옵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으로 바로 설때에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늦은비와 이른비를 때에 따라 내리실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은 뒷전이고 세상이익만 쫓다보니 하늘의 축복을 놓치게 되지 않습니까? 정리하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약한 실수나 이해타산에 얽매여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화내며 미움의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족과 친지 사이에 아직까지 풀지 못한 감정의 골이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저는 주름진 얼굴을 맞대고 상봉의 기쁨을 나누는 이산가족을 지켜모며 가족의 소중함 아래에서 용서받지 못할 그 어떤 실수나 잘못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서로 용서하세요. 가족 상호간에 막힌 담을 허무세요. 뜨겁게 사랑으로 안아줍시다. 이번 추석 명절은 그런 의미에서 참 소중한 만남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추석명절이 이산가족 상봉의 그 뜨거운 감격과 연이어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이 민족에게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신 하나님께서 이 명절에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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