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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말씀을 기억하고 (눅 2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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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기억하고 (눅 24:1-10)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5월의 첫 날,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께 나오신 모든 교우님들께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주일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부활절과 연결된 이야기를 계속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4절을 보면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은 근심했습니다. 
여인들이 근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라고 되어 있지요. 여인들은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기 위해 갔는데,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근심했습니다. 

여러분, 이들의 근심이 해결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없어졌던 시신을 찾으면 근심이 해결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신을 찾아서 참 다행이야>라고 말하면서 향품을 발라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신을 찾으면 여인들의 가슴을 내리 누르는 슬픔과 근심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건 참 해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이나 바르고 앉아 있는 것은 결코 참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슴 저미는  비극일 뿐입니다. 시신을 아무리 꽉 끌어안아도, 동굴 무덤을 향품으로 가득 채운다고 해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건 해결책이 아닙니다. 

진정한 해결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시신을 찾는 게 근심을 없애는 해결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아예 시신이 없어지는 것이 해결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더 이상 향품이 필요 없게 되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사실은 그 부활이 희망 사항이 아니라, 이미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시신이 없어졌다고 근심하고 슬퍼할 때는 이미 슬퍼할 이유가 사라진 후였습니다. 근심할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여인들은 근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심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왜 근심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왜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은 아닐까? 이미 어디론가 가셨기 때문에 무덤이 빈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이 극비였기 때문입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부활이 일어나기까지는 절대 그 누구에게도 부활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 번도 대해 말씀한 적이 없어서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못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은 결코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당신께서 부활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성전의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으셨을 때 유대인들이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8절을 보면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여러분, 여기서 사흘 만에 다시 일으켜 세울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21절을 보면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 때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실 것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코 부활은 극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공개된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을 한 군데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을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만 예고하신 게 아니라,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결코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부활이 여러 번 예고되었건만, 왜 제자들이나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빈 무덤을 보면서 부활을 생각하지 못하고, 시신이 없어진 것만 걱정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믿지도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성전 이야기에서 보면 요한복음 2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후였습니다. 그 전에는 부활에 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이게 너무나 아쉬운 대목입니다.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면서 근심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작부터 예수님께서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을 믿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이렇게 슬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믿었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모여서 이런 대화를 했어야 옳습니다. <걱정 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죽으실 것을 이미 말씀하셨고 말씀대로 죽으셨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도 말씀했으니, 그것도 믿고 기다리자.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하실 것이다>,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를 격려했어야 합니다. 

여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믿었다면 무덤에 가는 목적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이나 바르러 가는 게 아니라, 부활을 확인하러 갔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들어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대. 그리고 그 날은 돌아가신 후 제 삼 일이라고 하셨대. 오늘이 바로 그 날이야, 지금쯤이면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을 거야. 지금 가보면 무덤이 비었을 거야. 우리 같이 가 보자.> 이런 기대를 가지고 갔어야 합니다. 시신이 들어있는 무덤이 아니라, 빈 무덤을 보러 갔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여인들도 부활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않는 것>, 이게 그들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러기에 무덤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들도 바로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6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아멘.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게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살아나셨다.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뭐라고 하셨느냐? 뭐라고 하셨는지 잘 생각해 보라. 분명히 부활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 이런 말씀입니다. 

결국 여인들이 근심한 근본적 이유는 부활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다면, 그래서 부활을 믿고 기대했다면, 오히려 무덤이 빈 것을 보았을 때 <자, 봐라.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어. 무덤이 비어 있지 않느냐? 어서 가자. 이미 우리가 있는 곳에 가셨는지도 몰라.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 이러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결국 여인들이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근심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 오늘 설교의 주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본문의 표현대로 한다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6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말씀은 기억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장 깊이 접하는 시간은 예배 중의 설교 시간입니다. 한 주간을 살면서 적어도 삼십 분 정도 말씀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거의 설교 시간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 예배의 초점은 설교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교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시간이어야 할까요? KBS의 <아침 마당>이란 프로그램을 아시지요? 진행자 두 사람과 몇 사람의 게스트가 나와서 이런 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일종의 토크 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몇 가지 요소만 갖추면 성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적당히 유익한 정보, 그리고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적당한 유머, 그러면서 어느 정도 수준 있는 대화를 통해서 교양을 얻게 해 주면 됩니다. 그러면 상당히 성공적인 프로그램으로 정착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교는 어떻습니까? 적당한 정보와 재미, 그리고 약간의 수준 있는 이야기가 담기면 성공적인 설교가 되는 것일까요? 또 듣는 교우들도 설교를 들으면서 아침 마당을 시청하는 마음 정도로 임하면 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설교와 토크 쇼는 근본부터 다릅니다. 토크 쇼는 듣고 즐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유익한 정보를 얻었다면 머리에 기억해 두면 됩니다. 또 설령 잊는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아침 마당에서 들은 이야기를 잊었다고 해서 인생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강력하게 주문하십니다.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여러분, 우리는 그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밀 암호와 같습니다. 암호를 잊으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암호를 잊으면 작전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암호를 잊으면 인생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거기에 생명과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고구려 건국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주몽의 아들 유리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그에게는 이미 예씨 부인이 있었고, 그녀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주몽은 떠나면서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사내아이를 낳거든 그 아이에게 이르시오. 일곱 모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둔 유물을 찾아 나를 찾아오라고 하시오.> 여러분, 어찌 잊겠습니까?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 밑에 감취어진 유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예씨 부인은 주몽의 말을 가슴 깊이 아로 새깁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들 유리를 낳아 장성할 때까지 키웁니다. 그리곤 때가 왔다고 생각할 때 아들에게 말해 줍니다. 

여러분, 만약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 밑이라는 말을 잊었다면 어떻게 아들에게 말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기억했기에 말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기억하기는 했는데, 부정확하게 기억해서 <다섯 모난 돌 위의 오동나무>라는 식으로 말해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녀는 정확히, 그리고 깊이 남편의 말을 기억했고, 아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리는 아버지 주몽을 찾아가서 찾아낸 부러진 칼을 증거물로 보이고, 아들로 인정받게 되어,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예씨 부인의 가슴에는 남편이 남긴 말이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 중의 설교가 토크 쇼 정도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은 <재미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이 못 들어본 주제로 설교를 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가 제법 유식하다는 것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설교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도 마찬가지입니다. <심각한 이야기는 싫어. 너무 무거운 주제도 싫어. 듣고 앉아 있으려면 너무 부담스러워. 좀 가벼운 주제가 좋아. 재미까지 있으면 더 좋고. 그리고 기왕이면 삶에 유익한 정보도 얻으면 금상첨화지. 그저 가볍게 말씀하면 될 걸, 우리 목사님은 왜 저렇게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어. 얼굴까지 벌겋게 되어 소리를 지르니, 원 참 답답해. 빨리 안 끝나나?>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다 보면 설교가 재미있는 이야기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잊어도 상관없는 교양 강좌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은 잊으면 안 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일점일획이라도 흘리면 안 됩니다. 토씨 하나까지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 간절하게, 마음을 다해 집중해야 합니다. 국가의 미래가 달린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정예 요원들이 작전 지시를 받듯이, 암호를 전달 받듯이 잘 듣고 가슴에 한 자, 한 자 새겨야 합니다. 
제자들과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다면 근심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잊었기에 그들은 근심하고 슬퍼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기억하십시오. 거기서부터 우리의 신앙은 튼튼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그 상황에 적용하십시오. 제자들과 여인들은 부활의 말씀을 기억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에 바로 적용했어야 합니다. 그랬더라면 근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기억하는 이유는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에게는 근심 대신 평안이, 슬픔 대신 기쁨이, 절망 대신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말씀을 붙잡고 일어설 것입니다. 아무리 달콤한 제안이 들어와도 말씀이 금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제안을 거절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기억하고 적용하면서 살 때 비로소 성도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을 전해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들이 많지만, 저는 이 시간 강력하게 말씀드립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주십시오. 말씀을 기억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자녀들은 기억한 말씀으로 인해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말씀 때문에 죄악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 붙잡고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링컨도, 록펠러도 어머니께서 그들의 가슴에 심어준 말씀을 붙잡고 위대한 인생을 살아간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기억하고 적용하면서 사는 성도가 되길 원하고, 그 말씀을 우리 자녀들에게 심어줄 수 있길 기원합니다. 말씀에 담긴 은혜와 복이 우리와 자녀들, 우리의 다음 세대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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