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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 (욘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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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 (욘 1:1-2)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빌어주시는 평안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새벽, 아들 녀석과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제가 아들 녀석 등을 밀어주고, 아들 녀석은 제 등을 밀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목욕을 와서 좋겠다.’며 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막내 동생인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들과 함께 목욕실에 들어갔을 때 큰형이 막내 동생하고 들어오나 하였답니다. 아들 녀석에게 저를 누구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나빴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하려 들어갔는데 부자지간으로 보든 형제지간으로 보든 닮았다고 하니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 할아버지의 그 다음 이야기가 길었기 때문입니다. 그 할아버지의 아버님은 자기를 열아홉에 얻었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자라면서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형제간으로 보았답니다. 아버님의 친구들은 놀리느라고 아버지께 ‘네 동생 왔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네 동생 왔다’는 말을 무척 싫어하셨답니다. 아들과 함께 남들 앞에 서있는 것조차 꺼렸답니다. 이것이 아들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것으로 가슴에 맺혔습니다. 
결국 그 할아버지가 저와 제 아들을 형제 같다고 하신 것은 당신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종종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위로’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용기를 갖기도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실수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 ‘친근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이나 모세의 영웅적인 행동 속에서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실수와 연약한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에서 우리와 친근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 ‘요나’가 아닌가 합니다. 목사로써 저는 ‘요나’에게서 친근한 느낌을 갖습니다. 그는 예언자 중에 유일하게 불순종하여 도망쳤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바로 “요”(☞) “나(我)”입니다.

이제, 요나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해피데이 626’을 앞두고 요나의 사명에서 우리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들으려고 합니다. 

이제 그 요나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결과적으로 성경에서 자신을 보아야 하지만 우선적으로 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으로 시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습니다.

I. 임재

‘말씀이 임하였다’에서 ‘임하다[hy:h/하야]’는 ‘존재하다', 즉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요나는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요나하면 커다란 물고기를 연상하여 마치 동화 속의 인물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시대를 살았던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요나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던 네 명의 구약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요나에 대하여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요나의 아버지가 ‘아밋대’라는 것입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는 소개는 오늘 본문 말씀 외에 또, 한번 열왕기하 14:25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 말씀에 의하면, 요나가 살았던 곳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가드헤벨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5Km 지점에 위치한 한 마을입니다. 

요나가 살았던 시대는 여로보암이라는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 중에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이 두 사람이 나오기 때문에 두 번째 여로보암을 편의상 여로보암 II세라고 부릅니다. 요나가 살았던 시대는 북쪽 이스라엘에 여로보암 II세가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여로보암 II세는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 이래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풍성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우상숭배와 거짓신앙으로 가장 빈약한 시대였습니다. 경제적으로 가장 풍성하였지만 신앙적으로 타락하여 멸망으로 치닫고 있던 사회였습니다. 

그의 시대에 활동하였던 성경의 예언자는 호세아나 아모스입니다. 요나를 비롯하여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책망하는 말씀이 맡겨지면 가서 책망해야 했고, 그에게 위로의 말씀이 맡겨지면 가서 위로해야 했습니다.

가드헤벨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던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입이 되어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 전해야 하는 말씀이었습니까? 요나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자기 나라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른 나라 사람입니까? 

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2a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처럼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모스처럼 유다를 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언자 요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나라인 니느웨를 향하여 외치도록 말씀을 받았습니다. 


2.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니느웨라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큰 성읍 니느웨’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였습니다(왕하 19:36). 이곳은 티그리스강 상류 동쪽연안에 자리 잡은 앗수르의 도시입니다.

니느웨라는 도시가 실재하였을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846년 니느웨 유적이 발견되기 전까지 말입니다.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여 니느웨는 역사적인 도시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더욱이 구약의 나훔이라는 예언자가 예언한 그대로 홍수로 물이 범람하여 역사에 속에 묻혀있었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발굴 결과 도시 위로 6m나 토사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는 오랫동안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니느웨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그대로 구체적인 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오늘날 이라크의 ‘모술’이라는 도시입니다. 모술은 이라크에 파견된 우리나라 군인들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요나는 확실히 국제적인 인물입니다. 요나는 역사 안에서 역시 역사적인 도시를 향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한 자연인이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니느웨를 향하여 외쳐야 할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습니다.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자신이 감당하여야 할 사명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나라는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II. 명령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들어야 할 명령이 있습니다. 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2a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기 위하여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단한 이 말씀 속에는 세 개의 명령형 동사가 있습니다.

첫 번째 명령은 ‘일어나라’입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라[!Wq/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히브리어 ‘쿰’이라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솟아오르다’, ‘세우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요나는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그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또는 그의 능력이 어떠하든지 그는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그 사명을 위해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은 일어나야 합니다. 

때로 이것이 무척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내가 꼭 그것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평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결단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몸에 배어있는 습관을 내버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니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맡은 자는 그 말씀에 따라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요나에게 내려진 명령입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자기답게 하고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명령은 ‘가라’입니다.

여기서 ‘가다[&l'h;/하라크]’는 말 역시 아주 흔하게 사용하는 ‘걷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행동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나는 가야 했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요나는 가야 할 곳이 분명하였습니다. 그가 가야 할 곳은 니느웨였습니다. 

니느웨는 당시 세계를 지배를 하고 있던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그곳은 요나의 조국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의 심장입니다. 그곳은 요나의 생각에 굳이 가서 회개시켜야 필요가 없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요나가 가고 싶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은 가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오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여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은 많지만 가야할 곳으로 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린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정으로 일터로 사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요즘, 비오는 날이면 예배당 입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동우산비닐포장기라는 것입니다. 우산을 끼우고 잡아당기면 우산에 비닐이 씌워집니다. 긴 비닐, 짧은 비닐로 구분되어 있어 긴 우산과 접는 우산에 알맞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없을 때에는 비에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예배당 안으로 들고 들어와서 바닥이 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당 입구에 쌓아두어 뒤바뀌어서 마음 상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용하니 참으로 편리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는 대부분 비닐을 벗겨 두고 우산을 펼쳐서 쓰고 갑니다. 그래서 예배 후에 보면 자동우산비닐포장기 옆에 비닐이 수북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상입니다. 굳이 그 비닐을 집으로 가져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받은 은혜까지 예배당 입구에 그냥 쌓아두고 갈 필요는 없습니다. 받은 사명까지 그냥 두고 가서야 되겠습니까? 

자기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삶의 현장이 없는 사람은 몽상가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가는 현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바로 여러분이 가야 할 현자입니다. 여러분의 일터가 여러분이 가야할 현장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우리가 가야 할 니느웨입니다.

세 번째 명령은 ‘외치라’입니다.

여기에서 ‘외치다[ ar;q/카라]’는 말은 만난 사람에게 가서 ‘말을 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는 외쳐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 그대로를 외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감당하여야 할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은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외쳐야 합니다. 무엇이라고 외쳐야 할까요? 받은 말씀 그대로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외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주신 말씀이 아닌 것을 주신 말씀처럼 외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음에도 그대로 외치지 않는 사람은 역시 거짓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 말씀 그대로 외쳐야 합니다.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받은 말씀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외쳐야 할 말씀을 주시지 않았다면 외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신 말씀이 없는 데도 외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주신 말씀대로 외쳐야 한다는 것은 단지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말씀 그대로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치라는 말은 말씀을 듣고 일어난 사람이 삶의 현장으로 가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전하라는 말씀을 받은 사람은 가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행동을 명령받았다면 그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몸짓을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람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동하는 것을 머뭇거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일어나, 가서, 외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요나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일어나 가서 외쳐야 했습니다. 그가 일어나 가서 외쳐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III. 이유

우리 말 성경 2절에서 ‘외치라’는 말과 ‘상달하였다’는 말 사이에 히브리어 성경에는 ‘왜냐하면’[yKi/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그를 니느웨를 향하여 일어나 가서 외치도록 하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2b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상달하다[hl;[/아라]’는 말은 ‘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그 내용이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어떤 상황이 하나님께로 올라갔습니까? 그들의 악독[[r'/라]이 하나님께로 올라갔습니다. 니느웨의 죄악이 너무나도 많아 땅에 쌓이고 쌓여 마침내 하늘에 이르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까지 이르렀다는 표현입니다. 니느웨에서 저질러진 각종 악독으로 인해 부당한 억압과 박해를 당한 사람들의 억울한 호소가 하늘에 닿았습니다(창 4:10). 니느웨의 죄악으로 손꼽히는 것은 교만함(사10:13)과 잔인함(나 3:1,10,19). 그리고 극도의 이기주의(습 2:15)였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 니느웨를 향하도록 하신 것은 그들의 악독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이 악독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죄악을 보신 하나님은 그 죄악 가운데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악독을 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읽어야 할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악을 미워하십니다. 심히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죄악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미워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죄악에서 돌이켜 돌아올 수 있는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에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싫어하시지만 그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심판하기 전에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이를테면 여러분의 자녀가 좋은 일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매우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나쁜 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무겁게 되고 얼굴에는 그림자가 질 것입니다.

요나는 가서 심판을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요나는 죄악이 하늘까지 쌓인 니느웨를 위하여 일어나 가서 외쳐야 하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니느웨의 악독 때문에 생긴 하나님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하여 가야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세상의 죄악을 보시면서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옥 갈 백성이라고 아예 포기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일어나 가서 외칠 사람을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요나는 우리의 거울입니다. ‘요-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속죄의 절기에 요나서를 읽으면서 요나와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역시 요나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나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고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야 합니다. 

요나라는 거울을 통하여 새롭게 고쳐지고 세워져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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