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소망과 기쁨 (벧전 1:3-9)

첨부 1


부활의 소망과 기쁨 (벧전 1:3-9)  

  
부활의 주님 찬양으로 이 예배에 함께 동참하시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오늘도 변함없는 주님의 은총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산 소망과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산 소망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돌아갈 때는 이것을 증거 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겨지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사실은 기독교의 역사 내내 모든 성도들의 소망의 근거고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본문은 핍박을 당해서 도처에 흩어진 많은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을 강조하는 서신을 많이 썼습니다. 사도요한은 사랑을 강조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이라는 사랑의 편지를 썼습니다. 베드로는 소망을 강조하는 서신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소망은 부활의 사실과 그 의미에 기초한 소망이고 또 기쁨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소망의 메시지가 들려지고 참 기쁨의 감동이 있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먼저 소망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정말 소망이 있는 것일까요? 또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이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만이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참된 소망의 근원입니다. 부활만이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소망보다 또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소망이 끝나는 곳에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소망을 우리들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소망도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보면 양수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양수리에서도 특별히 북한강과 남한강이 함께 만나는 두물머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글자그대로 강이 두 개가 만나는 뾰족한 지역인데 물살이 험해서 사고가 많이 납니다. 오래전에 제가 지도하던 대학생 하나가 그곳에서 익사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3일을 그 아이를 찾는 일을 지켜본 일이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다 함께 있었고 안타깝게 기다리는 가운데 결국에는 이 아이를 찾았습니다. 그 아이를 확인한 어머니께서 정말 통곡하시면서 하시던 말씀을 잊지를 못합니다. 
“정말로 죽었다.” 
그렇게 통곡을 하시더라고요. 
그것이 바로 절망입니다. 

죽은 것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행여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마지막 소망을 붙들고 있다가 아들을 확인하는 순간 그것마저 놓을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이 사람에게는 절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 뿐만이 아니고 우리가 삶속에서 크고 작은 절망을 많이 체험합니다. 이 일은 꼭 이루어지면 좋겠다라고 끝까지 놓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시험에 실패할 수도 있고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건강에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정말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지막에 절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것을 몸소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과 더불어서 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메시야가 아니라면 도저히 이런 일은 할 수 없다는 확신가운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이분이야말로 구약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인류를 구원하실 분이라고 믿고 끝까지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처참한 듯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하던 현장에서 정말 맥없이 사람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저항 한 번 제대로 않고 끌려가서 가야바의 법정, 빌라도의 법정에 서셔서 사형으로 정죄가 되셨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반전이 일어날까 아마 소망했을 것입니다. 이때쯤이면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이들을 멸하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골고다에 끌려가서 높이 매달린 십자가에 만인이 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찢겨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이 내려져서 미리 준비된 돌무덤에 뉘여 지고 돌문은 닫혀 지고 말았습니다. 모든 소망은 거기서 끝나는 듯이 보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배신도 했고요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 물고기를 잡으러 간 절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자기가 그렇게 확신할 뿐만 아니라 이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인사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 소망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예수그리스도를 자기 입으로 부인했고 그리고 절망했던 한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소망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까?부활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소망과 기쁨을 이야기 한다면 반드시 우리에게도 같은 소망과 기쁨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사건은 베드로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비극에서 승리로 나아가는 길을 그는 보게 된 것입니다. 
그의 삶이 하루아침에 전적으로 달라졌어요. 배신자에서 순교를 마다않는 증거자로 변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하고 그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자신의 회복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쫓겨 가고 매일 매일을 죽음가운데 직면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믿음에 동참했다면 그들의 믿음 역시 부활의 사건 외에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베드로는 그것을 산 소망이라 그렇게 불렀습니다. 소망이 살아있다는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 가운데도 생수라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샘물에서 기르는 물인데 생수의 특징은 글자그대로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 원천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물입니다. 그래서 신선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샘물을 한 번 막아보세요. 아무리 무거운 돌로 막고 심지어는 콘크리트로 봉해도 어딘가 에서는 다시 터지게 마련이고요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새로운 물이, 신선한 물이 솟아나는 것이 생수입니다. 산 소망 역시 그러합니다.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어떠한 시험도 어떠한 괴로움도 위협도 그것을 막을 수 없게 베드로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그 소망을 베드로는 산 소망이라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 산 소망 뒤에는 우리를 사랑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사랑하신다 말씀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몸소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만인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어요. 그래서 원수들도 그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직접 못 박아서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서 무덤 속에 가두고 인봉을 하고 지키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렇게 증거 되어 확실한 사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다시 살아남은 놀랍게도 저희같이 연약한 사람들에게만 알리셨습니다. 

소망의 근원은 부활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성경에서 소망이라는 말,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소망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아주 강한 의미로 씁니다. 그냥 우리가 이게 이랬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을 쓸 때는 여기서 쓰는 소망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굉장히 강력한 단어예요. 
내일 모처럼 가족들이 벚꽃을 보러가든지 해서 소풍을 다 준비해서 밥도 싸놓고 여러 가지 준비를 다 해놓고 저녁에 9시 뉴스 끝에 일기예보를 보는데 불길한 소리가 들려요. 
“내일 비가 올 확률이 90%입니다.” 

기분이 언짢으시겠죠? 안 그러세요? 90% 그래도 포기하십니까? 
절대 포기 안 해요. 일기예보 틀린 게 한 두 번이냐 생각하고 내일도 틀릴 것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대개 일기예보가 가끔 맞기도 하네 하고 끝날 수도 있어요. 그거 대수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소망이라는 것이 그 정도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것이 손에 잡힌 것처럼 확실하게 믿고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실상을 잡은 것처럼 믿고 거기에 근거해서 행동도 하고 계획도 하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해요. 그래서 어떤 한 주석가는 이런 소망은 영원의 닻이라 영혼의 닻이라 영원의 닻이라 그랬어요. 

무슨 말이냐면 영혼의 닻을 내리고 거기서부터 행동을 하는 것이 어부가 배를 몰고 바다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으려면 처음 해야 되는 것이 정한 지점에서 배를 고정시키는 거예요. 그것이 닻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정이 되어야 그물을 펼쳐도 거기서부터 고기잡이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어요. 낚시를 펴도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둥둥 떠다니면 낚시에 물지도 않고 그물을 회수하기도 어려운 거예요. 영혼의 닻이 우리들에게 부활에서부터 오는 소망입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오늘을 계획하고 오늘을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근거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비록 쫓기고 잡혀서 핍박을 당하기는 했어도 이런 영혼의 닻이 든든하고 소망이 든든했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던 1세기에 그리스 로마 문화는 외형적으로는 인류역사에 그토록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문화였었어요. 아름다운 문화였습니다. 이것이 다시 르네상스가 회복되기까지 그와 같은 찬란한 문화가 이 세상에 없을 정도로 찬란했어요. 그 문화가 얼마나 찬란했으면 사실 오늘날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화로 칭송을 받습니까?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생명은 없는 문화였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이 시대의 로마문화는 망해가는 문화였어요. 죽음을 일면한 문화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거슬러 올라가면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도 그리스 로마 문화는 죽음의 문화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희랍비극은 어쩔 수 없는 아무도 어떻게 가늠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용감한 인간 몇이 저항하다가 비극으로 끝나는 얘기예요. 그것이 희랍의 비극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화고 그들의 신념이고 그들의 종교였어요. 

일리아드 오디세이 똑같은 이야기예요.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영웅으로 그리고, 소망 없는 역사의 순환 속에 빠지는 그런 문화였습니다. 특별히 1세기에 이게 사멸해가는 문화 속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들이 바로 핍박을 당하고 고난당해서 죽은 초대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주변의 어느 누구도 보여줄 수 없었던 생명의 소망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있었기에 서구문화가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유럽이라는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아직까지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기독교가 1세기에 죽어가는 문화에 새 생명을 불어넣지 않았더라면 아마 서구문화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문화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저희 딸이 이 예배를 같이 드리고 있는데요, 베트남의 오지에 가서 몇 달 동안 봉사를 하다가 얼마 전에 저희 집에 돌아왔어요. 
“거기서 제일 힘들었던 일이 뭐냐?” 그러니까 제가 예상한대로 화장실이었다는 거예요. 
“화장실이 어떻게 생겼느냐?” 그랬더니 저는 대충 저희 어렸을 때 쓰던 재래식 화장실 정도로 생각했어요. 저희 아이도 봤거든요. 그랬더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뭐냐고 했더니 사진을 보여주는데 바닥에 그냥 구멍하나 요만한 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좌우전후에 뭐가 막힌 게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제일 처음에 개가 오고 그 다음에 돼지도 오고 왔다 갔다 한대요. 그리고 저희 딸이라고 말씀드렸나요? 그래서 같이 간 아이들은 캐나다에서 온 애건, 미국에서 온 애건, 대부분 다 참거나 견딘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거기서 할 일 다 했대요. 그래서 너는 네 비전을 삼은 것을 하고도 남겠다. 아버지보다 낫다 그랬어요. 

그렇게 형편없는 오지인데 거기서 한국 비디오, 우리 드라마 같은 보고 또 거기서 같이 일하던 베트남 처녀는 한국에 그렇게 오고 싶어 한대요. 한국 가요도 알고 말이지요. 제가 사실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한국이 남의 나라의 일종의 꿈의 나라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그게 우리가 어떤 면으로는 문화수준이 높아서 그런 것 같아요. 감사한 일이에요. 그러나 그 처녀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생명을 보겠는가, 죽음을 보겠는가, 산 소망을 보겠는가, 자기 땅보다 더 한 암흑을 보겠는가,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한국 영화, 한국 가요, 대단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이 보여요.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가 늘 보는 드라마에 생명이 있습니까? 허무맹랑한 환타지가 아니면 잔인하고 비전 없고 앞뒤가 꽉 막힌 슬픔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산 소망은 죽음을 넘어갈 수 있는 비전을 줄 때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산 소망은 바로 죽음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역사를 가리키면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약속대로 보내셨고 그가 십자가에 높이 달려서 죽으시고 절망의 순간을 넘어섰지만 하나님께서 얘기를 거기서 멈추시지 아니하시고 무덤을 여실 때에 열린 소망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고요 누가 어떻게 부인하고 싶어도 그리고 이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책을 몇 권을 쓸지라도 부정될 수없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열리는 열쇠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성도들은 힘이 있었어요. 이것을 믿을 때에 그들에게는 주변에 아무리 강력하고 찬란한 문화가 이 모든 것을 부정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비롯되는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쫓기고 쫓겨 내려간 곳이 지하의 하수도였습니다. 로마나 고린도나 이런 고대의 대표적인 로마의 도시에 들어가 보면 지하하수도가 잘 발달되어서 거기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피신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거기서 모여서 예배만 드리고 피신해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역시 그들도 사람인지라 자기들의 신앙을 벽에다가 표현을 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물고기 표시도 거기서 발견된 것이고요 때때로는 예수그리스도를 그린 모습들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같이 다 그 비참하고 어려운 환경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묘사할 때에 자기네들같이 괴로움을 당하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예수그리스도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 손을 들고 부활하셔서 살아나시고 승리하신 모습의 예수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 이후에 천년이 지나면서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왔을 뿐만 아니라 정말 웅장한 성전을 짓고 그 성전 벽에 그린 벽화는 오히려 마리아의 품에 앉아서 죽어있는 예수그리스도-피에타라는 것을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는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셔서 승리하는 예수그리스도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맞아서 이 산 소망의 말씀을 드릴 때 우리 마음속에 살아나야 하는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이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다 그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새기시는 가운데 만물이 살아나서 부활이 아니고 오늘 저희들이 받아서 돌아가는 계란이 깨어나는 것이 부활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산 소망이 살아나는 그 부활을 다 체험하는 가운데 이 부활의 소망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선물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초대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런 초대교회에 비하면 10배, 100배, 1000배 강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작은 어려움을 당했다고 낙심할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께서 무덤을 깨치고 새 생명으로 승리하셨듯이 모든 염려나 불안을 주께 맡기시면 주께서 저희들을 살려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삼으실 줄을 믿습니다. 
이교도들이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새 생명이 초대교회에 있었듯이 저희들에게도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듯이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속에도 이와 같은 믿음과 산 소망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기쁨에 관해서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부활은 소망뿐만이 아니고 기쁨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세상이 줄 수없는 기쁨이고,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이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베드로는 바로 그 도망한, 그래서 흩어진 성도들에게 안위하고 격려하도록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면서 인사 끝에 바로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지난 주일에 열흘간 특별 새벽기도를 하면서 저도 몇 자락을 섬기는 가운데 저도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그 가운데 하루 본문이 <야고보서 5장 13절>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근심이 있는 자는 기도할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근심을 붙잡고 기도했어요. 그러나 너희들 가운데 늘 근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있으면 찬양하라 
그것이 야고보의 격려요 권고입니다. 
우리 마음가운데 근심이 있으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일을 많이 주셔서 우리들에게 기쁨이 있으면 찬양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이 베드로가 찬양하리로다. 그리고 너희들 가운데 기쁨이 있다. 
<6절>에 있고 <8절>에 있고 너희들이 잠깐 환란과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지만 잠깐이 잠깐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이 잠깐이 300년이 간 긴 세월이거든요. 300년 동안 오고 오는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붙잡히면 죽고 쫓겨나고 핍박을 당하고 그들의 신앙을 제대로 한 번 시원하게 고백도 못하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 나에게만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가운데에도 기쁨이 있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찬양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쫓겨 다니고 핍박가운데 두려움에 있는 성도들이 찬양할 수 있었겠습니까?여기 두 가지 비결이 있었다고 본문이 얘기해요. 

첫째는 너희들에게 확실한 받을 상급이, 유업이 있다. 하늘나라에 있고 또 너희들에게 약속되어서 확보된, 분명히 너희들의 것이 아니라고 확증된, 너희들이 기댈 수 있는 소망의 유업이 있다고 했습니다. 
<5절>에는 너희들이 살아가는 과정가운데 역경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두 손으로 덮으시는 보호가 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유업이 확실한 것을 알고 또 살아가는 가운데, 역경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시면서 보호하실 것을 믿었기에 이 둘이 그들의 기쁨의 근원이 된 것인데 이러한 기쁨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고 세상이 줄 수없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살아있는 지금 우리들에게 주는 큰 힘이 된다면 이 유업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우리들의 시야를 멀리 하면서 우리들이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게 됩니다. 사실 여기에 너희들을 위하여 예비된, 또는 너희들을 위하여 간직된, 이 말은 요즘 말로 번역하면 ‘예약된’ 이란 말이에요. 너희를 위해서 이것은 따로 떼어서 예약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확실한’ 그런 것이죠. 

여러분들이 혹시 무슨 공연을 보러 가시든지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또는 요즘은 주일날마다 야구장이 만원이라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서 표를 못 사서 못 들어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냐면 예약을 합니다. 예약을 하면 확실하잖아요. 그러니까 가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분이 좋아지죠. 안 그러세요? 왜냐하면 자기는 확실하게 들어갈 수 있고요, 확실하게 가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요. 

제가 아는 한 친구는 미국에 사는데 손님을 대접하려고 하면 예약을 해요. 예약을 할 때 저쪽에서 “당신 이름이 뭐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주저하지 않고 “KIM” “김”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이 사람 성씨는 ‘최’거든요. 왜 그렇게 얘기 하냐면 ‘최’라고 그러면 자꾸 묻는데요. 무슨 ‘최’냐고 두 번 세 번 묻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김’ 그러면 다 알아듣는대요. 그래서 그냥 쉽게 무조건 ‘김’ 그래놓고 식당에 나타나서 들어가면서 “김 왔어요.” 그리고 소리치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통한대요. 그래서 일이 간단해진다는 거예요. 똑똑한 거죠. 여기에 제가 보기에 영적비밀이 있어요. 

여러분 나중에 천국에 도착하시면 주저하지 말고 “주님, 내가 왔어요.” 하고 소리치면 그걸로 끝입니다. 여러분의 자리 다 마련되어 있고 여러분들이 누구냐 주민등록증 내놔라 왜 얼굴은 고쳐서 알아보지 못하냐 이런 일이 전혀 없을 거예요. 전혀 없습니다. 
천국에 딱 도착해서 주님 내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부활하시고 그 소망으로 살다가 지금 도착했습니다. 주님 나에게 약속된 유업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걸로 끝이에요. 

그런 소망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도 함께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들이 받는 이 유업은 세상이 확보해 줄 수 있는 어떤 보험이나 어떠한 약속보다 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4절>말씀에 썩지도 않고 더럽히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유업이라 그렇게 얘기해요. 하늘에서 간직하고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이 그렇게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시도 이것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긍심이 있게 하는 겁니다. 웬만한 일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이 낙담하고 절망하게 할지라도 결국에 부활의 주님께서 죽음도 극복하셨는데 이와 같은 작은 일쯤이야 라는 그런 든든한 마음이 있어야 정상인 것입니다. 그런 정상적인 마음을 간직하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끝으로 이 본문에 그 예수그리스도를 너희는 보지도 못했지만 참 믿고 사랑하니 대견하다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칭찬해요. 왜냐하면 자기는 본 사람이거든요. 

사도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를 3년이나 쫓아다녔고 그의 죽으심도 봤고 부활하시는 것도 봤고 마지막에 그를 회복시키는 따뜻한 음성도 들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자기보다 자기의 증거를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도 자기 못지않은 확신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실을 볼 때 오히려 사도베드로가 격려를 받는 이것은 복음의 능력이 아니면 있을 수없는 일입니다. 모든 증거는 대를 거듭하면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의 체험담은 여러분가운데 아마 한국전쟁을 체험하신 분들 그거 손주에게 얘기해봐야 알아듣지 못해요. 그런데 사도베드로의 증거는 2000년을 살아서 지금도 우리마음가운데 새 소망과 기쁨의 근원이 됩니다. 
이런 일을 놓고 참 있을 수없는 증거를 한 사람이 하나 있어요. 그게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입니다. 혹시 나폴레옹에 대해서 아시나요?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황제인데요, 이 나폴레옹이 일생동안 존경했던 자기의 영웅이었던 사람이 둘이 있었대요. 하나는 그리스제국을 펼쳐서 오늘날 서구가 완성되게 한 알렉산더고 알렉산더 대왕이죠. 또 한 사람은 게르만 민족이 북쪽에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프랑스의 근원이 되는 나라를 세운 샬렘왕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거기에 끼운 거죠. 그렇게 부족하지 않습니다. 알렉산더, 샬렘왕, 그다음에 나폴레옹. 

그런데 이 세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생사를 좌우하기도 하고 명령을 해서 세상을 바꾸기도 하고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 앞에 섰어야 했다 했어요. 
사실 대단한 알렉산더도 샬렘왕도 죽은 후에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특별히 살아서도 명령을 하고 호령을 하고 그것이 즉효를 보려면 그들 앞에 나타났어야 했다. 그러나 이 예수는 살아서도 그런 능력을 발휘하거나 그런 일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죽었다고 알려진 이후에 1800년 동안이나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똑같은 충성과 똑같은 권위와 똑같은 사랑을 받으니 이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그리스도시라. 

센티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이 예수를 믿었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우리가 바로 보지 못하는 이 예수지만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그가 죽음가운데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다시 한 번 들으며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산 소망을 기억하고 그분이 주시는 산 기쁨을 우리들이 간직하게 됩니다. 아까 초두에 예수그리스도가 죽으신 일, 예수그리스도를 죽게 하신 하나님은 그 죽음을 만방에 보이셨어요. 확실하게 드러나 보이게 십자가에 높이 올리셔서 죽이게 하셨어요. 그리고 하늘을 가리시고 온갖 여러 가지 기억할 만한 일로 예수가 확실히 죽으셨다는 것을 세상에 보이셨어요. 

그러나 3일후에 그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실 때 아주 연약한 여인들, 그리고 아직도 의심하고 있는 사도들에게 그 부활의 사실을 보이시고 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만약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같이 만방에 드러내는 사건이었다면 그 즉시 역사는 끝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에 만방에 알려지는 날은 더 이상 예수그리스도는 구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로 오시는 날 그렇게 하실 거예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부활하시는 날에 바로 그렇게 만방에 알려지셨더라면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그 일을 우리와 같이 연약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주일날 우리가 산 소망을 우리들 가운데 품고 이 기쁨을 누리게 될 때 이 산 소망과 기쁨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기꺼이 하는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의탁하신 일이시고 이 일을 통해서 죽어가는 심령, 그리고 소망 없는 마음에 그들에게도 산 소망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이 기쁨을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 신자가 존재하는 목적이고요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이 어려움을 다 디디면서 지나가는 인생, 주님께서 이와 같은 새로운 소망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고 이 기쁨으로 저희들을 다시 세워주셔서 저희들이 이전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 인근에 주의 부활을 다시 전하는, 그리고 산 소망을 전하고 참 기쁨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