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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구약의 부활사상 (요 11:23-27)

첨부 1


본문 : 요한복음 11:23-27 
제목 : 구약의 부활사상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서론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보게 되면 구약과 신약을 잘 조화시키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신약의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세기에 마르키온(Marcion)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은 다른 신이며 구약의 신은 물질의 세계만 창조한 신이고 신약의 신은 영계까지 창조한 신이기 때문에 구약의 신은 열등한 신이고 신약의 신은 우등한 신이다.” 

19세기에도 이와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이라는 사람은 구약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행습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신약만이 신앙과 행습의 기준이 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에는 악기가 많이 동원되어 예배를 드렸지만 그것은 구약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습이 될 수 없고 신약시대에는 악기를 썼다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예배드릴 때 악기를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캠벨주의라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약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 구약과 신약은 다르거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구약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부활에 관한 내용이 신약에만 있고 구약에는 없거나 있어도 희미하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의 목적은 구약성서에서도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대화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 11:23)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4) 이 대화는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이 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르다가 이 신앙을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그 당시에 구약성경을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Ⅰ.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소망”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교회의 위대한 스승이 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유대인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당시에 최고 학자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구약성서를 정통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를 믿고 이전에 배웠던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버렸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다 믿고 있었습니다. 단지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되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14-15절은 사도바울이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행 24:14-15) 

바울이 가진 소망이나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가진 소망이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데 소망의 내용은 언젠가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천년정도의 간격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바울은 “a resurrection of both the righteous and the wicked.” 의인과 악인의 한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통해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믿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또 믿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증거하다 지금 이렇게 재판장 앞에 서게 되었다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6-8절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행 26:6-8) 

여러분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죽은 사람도 능히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는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셔서 영생하게 하신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 소망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2-23절에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계속 변론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 26:22-23) 

여러분 선지자들과 모세라고 하면 구약성경 전체를 통칭해서 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통칭해서 증거하는 내용을 바울이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메시야가 올 것이다. 둘째, 메시야는 수난당할 것이다. 셋째, 메시야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 것이다.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바울이 우리에게 요약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약성서와 다른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행 28:20) 로마의 형제들을 불러 지금 이렇게 매인바 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것은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소망인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고 성도들도 메시야의 뒤를 이어 부활하게 된다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3절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유대인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 17:2-3)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고 부활할 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용한 성경은 신약성경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은 아직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무엇이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지 않았으며 메시야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나사렛 예수님이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야이시고 우리를 위해 수난당하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차이인 것입니다. 


Ⅱ. 구약성서가 증거하는 부활신앙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증거한 것을 보면 구약성서가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짧은 시간에 다 증거하기 어려울 만큼 부활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부활을 다 공부하려면 날을 새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16:10) 

다윗이 주의 거룩한 자는 썩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 30-31절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아 시편 16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0-31) 다윗이 말하는 주의 거룩한 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고 그 메시야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부활하실 것을 가리켜 예언한 것입니다. 
 
시편 17편 13-15절은 메시야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믿는 성도들도 부활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3-15) 

여러분 이 세상에는 세상으로만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배부르고 자식들 많고 또 돈 많이 벌어 자식들에게 유산 남기면 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악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 그런 악인들의 가르침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악인의 사상에서 건짐 받는 것은 무엇이냐? 다윗은 세상을 넘어서서 부활하여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뵙는 것을 소망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만 소망을 둘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중에 부활하여 주의 얼굴을 뵙고 영생을 누리며 사는 소망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구약성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이 어느 책이냐고 물으면 보통 창세기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욥기라고 말합니다. 이 욥기에서도 부활의 소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욥 14:14) 

욥은 자기 인생을 싸우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사는 동안 참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 놓이기를 기다리겠나이다.” “놓이기를”이라는 말은 앞으로 다가올 변화라는 뜻입니다. 욥은 부활을 가리켜 앞으로 다가올 변화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싸우는 동안 욥은 자기 몸에 변화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부활을 기다린 것입니다. 

욥기 19장 25-26절에도 그 기다림이 확신이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5-26) 

우리말 성경에는 가죽이 썩으면 영혼이 나와서 하나님을 뵐 것이라는 의미로 기록된 것 같지만 이것은 정확한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 밖에서라고 번역된 말은 현재의 육체가 아닌 다른 육체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영어성경에는 ‘out of the flesh’라고 되어 있지 않고 ‘in my flesh’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육체를 입고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육체의 부활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부활의 확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사 26:19) 사람이 죽으면 티끌로 갑니다. 어떤 분은 무덤에 매장되고 또 어떤 분은 화장되지만 둘 다 티끌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하면서 구약시대에 화장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장례는 매장을 해야 맞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에는 화장을 하려고 해도 기계가 없어서 못했습니다. 또 구약시대에는 땅이 넓었기 때문에 매장으로 충분했고 화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도 매장당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보면 땅 위에 버려진 시신도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이 발전해서 화장도 하고 하는데 결국 티끌로 돌아가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티끌에 거하는 자들 보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면 모두 일어나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단 12:2) 여러분 우리 믿는 자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자도 부활합니다. 믿는 자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고 안 믿는 자의 부활은 사망의 부활이라 합니다. 안 믿는 자는 사망의 부활을 해서 지옥에서 고통 받을 몸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티끌 가운데 거하다가 생명의 부활을 해서 천국에서 영생하며 하나님과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구약 성경 모두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기독교는 나쁜 사람을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Ⅲ.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이유 

그런데 왜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이 말씀하셔도 사람들이 믿지 않느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합리주의(Rationalism) 때문입니다. 합리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부활이 자기의 이성에 맞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다 나왔지만 부활은 배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공부해봤자 얼마나 알겠습니까? 박사학위를 따도 자기 영역에 관해서만 조금 아는 것이지 뭘 얼마나 알겠습니까? 아주 작은 영역에서는 합리주의가 타당해도 큰 영역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보다 아래에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 위로 올라가 계시를 비판하게 되면 인간의 이성은 창녀와 같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합리주의 때문에 부활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무지(Ignorance)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에 존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게 된다는 것도 모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망의 부활을 해서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난당하게 된다는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무관심(Indifference) 때문입니다. 무관심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거나 말았거나 생명의 부활이 있거나 말거나 본인과는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넷째, 적대감(hostility)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반대편에 서서 적대감을 가집니다. 그 적대감 때문에 부활의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육체는 시간이 흐르면 쇠약해집니다. 제가 처음 우리 교회에 왔을 때는 저보고 젊은 종이라고 부르시더니 이제는 아무도 그렇게 안 불러줍니다. 거울을 보면 머리가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주변머리가 다 어디 갔냐는 생각도 듭니다. 이처럼 세월에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권사님들도 제가 처음 올 때는 다 처녀 같았는데 이제는 조금씩 주름살이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확실한 예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기 있으신 분들은 예외 없이 모두 한번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인간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금세이고 또 하나는 내세입니다. 금세와 내세 이외에 다른 세상은 없습니다. 그런데 금세에서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까? 그런 유한한 소망이 무슨 소망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내세에 부활의 몸을 입고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성,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영광스러운 생명의 부활의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증해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첫 열매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첫 열매이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서 큰 수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고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도 없고 죄 사함도 없고 영생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 앞에는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잠깐 여행 온 것인데 조금 배고프다고 너무 좌절하지 마시고 조금 괴롭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조금 어려운 일이 있다고 우울증에 걸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지금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업으로 약속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고 소망찬 인생을 살아가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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