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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예수님의 효성 (눅 2:41-52, 요 19:25-27)

첨부 1


예수님의 효성 (눅 2:41-52, 요 19:25-27)


일반적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대개가 그 부모가 그 자식을 낳게 됨으로써 시작됩니다.
하지만 때로는 조금 특별한 경우의 부자나 모녀 관계도 생길 수 있습니다.
어릴 때 그 가정에 입양이 되어서 양부모의 밑에서 자라게 된 경우라든지, 혹은 부모 중 어느 한 쪽을 사별하고 계부나 계모를 모시게 되는 경우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회는 전통적으로 이 후자의 경우들을 항상 삐뚤어진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친부모를 모신 자식들보다는 양부모나 계부모를 모신 자식들의 효도가 못할 것이라는 편견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됩니다.
그래서 '콩쥐 팥쥐' 등 우리나라 옛날이야기에 보면 항상 악역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계모였고 자연히 그 새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으레 긴장과 갈등의 반복으로 이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선입견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고쳐야 할 것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친부모자식의 사이와는 무엇이 달라도 다른 점이야 있겠지만,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란 말도 있듯이 자기가 키운 자식을 진정으로 아끼는 양부모나 계부모들도 있으며 또한 그들을 친아버지 친어머니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사랑하고 효도하는 자식들이 실제로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런 경우에서 부모를 모셨던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요셉과 마리아를 육신적 부모님으로 모시기는 하셨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오직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되시고 탄생하셨으므로 그들의 친자식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 땅에 계셨던 동안 일종의 '양부모(養父母)'를 모시고 사셨던 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육신적 부모에 대한 효성에서 역시 조금도 흠이 없는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양부모님에게도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충실히 다하셨던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는 이 시간에 자식된 자들로서 부모 앞에서 꼭 기억하고 지켜야 할 두 가지 효도의 원칙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자식이 행해야 할 효도의 기본이며 필수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한 가지 사건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원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41절로 52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41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해마다 "유월절"을 포함한 정한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무는 남자 아이가 12세가 되어 율법적으로 성년이 될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의 성전 행사에 이때부터 정식으로 참석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절기 행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별 걱정도 하지 않고 그저 "동행 중에" 즉 다른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 중에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그냥 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평소의 생활과 행동을 통해 그 부모에게 신임을 받고 계셨음을 암시해 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에도 부모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자녀들은 어쩌다 하루저녁 좀 늦게 들어온다 해도 그 부모에게 그리 큰 염려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났을 때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고 동행 중에 찾지 못하게 되자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서 예루살렘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을 아이 예수님을 찾아 다녔으니,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완전히 '실종 소년'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얼마나 속이 타고 걱정이 되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결국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선생들" 즉 랍비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과 이야기하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라고 했으니 그 자리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피차 의견을 나누는 토론과 같은 분위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듣는 자"가 다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으니, 어린 예수님의 말씀이 그 모든 랍비들을 압도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런 모습은 그를 찾느라고 사흘 동안 애를 태웠던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너무나 태평스럽게만 보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즉 '왜 우리 속을 이렇게 태웠느냐'라고 나무랐던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의 그런 행동은 어린 자식으로서 부모 앞에 변명할 여지가 없이 잘못된 것처럼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왜 저를 찾아 다니셨습니까? 내가 있을 곳이 있다면 당연히 내 아버지 집인 성전에 있을 줄로 생각해 보지 못하셨습니까?"라고, 참으로 천연스럽게 대답하셨습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탄생하셨으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이때까지는 아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는 50절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49절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들에게 증거하신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물론 '요셉과 마리아와의 자식이라는 관계'도 분명히 가지고 계셨지만, 그보다는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것임을 그들에게 천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모친 마리아는 "마음에 두었다"고 즉 기억해 두었다고 했습니다.
당장은 분명하게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마리아도 차차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로 하여금 당신을 그저 '자기 자식'으로만 여기도록 놔두지 않고, 그 육신의 부모에게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려 주신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참된 효도였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자식 된 우리들에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은 먼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부터 지키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사람 사이의 관계가 평등함'이 날이 갈수록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고 좋은 일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원리가 오늘날의 이 자유로운 민주 평등의 사회를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해 왔습니다.
대통령과 일개 소시민도 서로 평등하고, 옛날에는 위아래를 지키던 형제지간도 이제는 평등하게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모든 인간관계가 다 평등할대로 평등해진다 하더라도 딱 한 가지 결코 평등해질 수 없는 관계는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사람에게 주신 부모자녀의 관계란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대등한 '횡적(橫的) 관계'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는 관계였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종적(縱的) 관계', 다시 말해서 자식으로서는 분명히 '부모에게 순종하는' 관계였고 '부모의 아래에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소위 '현대식' 부자와 모녀들은 부모와 자녀가 '서로 친구 같은 사이'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랜드'(friend)와 '대디'(daddy)를 합쳐서 소위 '프랜디'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물론 부모자녀가 서로 친구처럼 아무 스스럼없이 완전히 터놓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최후까지 지켜져야 할 마지막 '수직관계'마저 이제는 완전히 '수평관계'로 바꾸어 버리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가정과 나라를 망치게 만들 망조이며 비극 그 자체인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식 된 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잘나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오로지 '사람이 아래에 있는 종적 관계'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다 보니 자연히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런 가장 기본적인 종적 관계까지 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직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 남게 되고, 그 관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바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것밖에 없으니 그 원리가 부모자녀 관계에까지 침범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 무엇보다도 이 관계부터 바로 설정해야만 부모 앞에서도 바른 자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아들이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천명하신 어린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버지 어머니께서 이제부터는 저를 알아 모십시오."라고 하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본문 51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참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는 그 육신의 부모 역시 '순종하여 받드시며' 섬기는, 진정한 효자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바로 세우는 것, 즉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이 곧 자식이 부모에게 진정 효도할 수 있는 기본이며 필수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자식이 불효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원리 또한 스스로 본을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상에서였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부터 27절에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면을 상상해 볼 때 인간적으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바로 그 십자가 밑에 모친 마리아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식이 그런 비참하고도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죽어가게 되는 것을 두 눈을 뜨고 보아야만 하는 어머니보다도 더 괴로운 사람은 세상에 다시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마지막 3년의 공생애 기간 중에는 집을 떠나 사셨지만 그전까지의 30년 동안은 나사렛에서 사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요셉으로 말하자면 예수님 탄생 때부터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시던 해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던 사건까지에만 언급이 되며 그 이후로는 항상 마리아만 나타나는 것을 볼 때에 아마도 일찍 죽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요셉의 사후 그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동생들을 돌보는 가장으로서 집안을 꾸리며 30세까지 사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동생들이 이제 장성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에게 모친을 모시는 일과 집안일을 넘겨주시고 공생애 사역에 나서게 되셨던 것입니다.
하여튼 몸소 30년 간 모시고 사셨지만 지난 3년 동안은 거의 만나지 못했던 육신의 모친 마리아를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 위에 달린 상태에서 만나게 되셨던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그 같은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자식 된 도리를 생각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부활은 하실 것이지만 이제 곧 육신적으로는 완전히 이별하게 될 모친 마리아를 예수님께서는 걱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모친 곁에 서 있던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요한에게 마리아를 당신 대신 어머니로 모셔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모친을 대신 봉양할 '양아들'을 새로 만들어 주셨던 것이며, 그래서 바로 그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런 지극한 효성이 바로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실로 말로 표현할 길조차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계셨고 또 실로 중차대한 사역을 완성하시는 중에 계셨습니다.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자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이제 완성하려 하시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처럼 고통스럽고도 중차대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 중인데 그 와중에 모친의 생계와 노후를 걱정하시면서 이를 위해 제자에게 당부하시는 것은 일견 어울리지 않는 장면처럼 보일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든지 "다 이루었다"와 같은 십자가상의 다른 말씀들에 비해서 볼 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와 "보라 네 어머니라"는 말씀들은 그 고통의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시기에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들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같으면 그런 역사상 최고최대의 사역에 당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는 그런 상황에서는 당신의 어머니의 신변에 대한 걱정 정도는 잠깐 덮어 두더라도 전혀 상관없을 것처럼, 아니 오히려 당연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모친이요"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하시고 또 충실히 이행하신 예수님이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공적 사역을 당신의 모친에 대한 사적 의무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변명으로 삼지는 않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정도로 성부 하나님을 충성을 다해 섬기시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 십자가상에서조차 모친에게 할 수 있는 효도를 최대한으로 끝까지 다하셨던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효도의 기본이요 필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 중에는 바로 이 점을 악용하여 불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려다 보니 효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들 핑계하는 것입니다.
주일 하루와 수요일 저녁과 금요일 밤까지 교회에 나가고 그 외에도 구역모임이니 전도회 활동이니 하면서 워낙 자주 모이다 보니 시간이 없어서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는 변명은 참 그럴듯하게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께 십일조와 작정한 헌금을 바쳐야 하니 부모님께는 용돈을 제대로 드리지 못한다고 둘러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못하는 일을 두고 다른 사람을 핑계 삼는 것도 못난 일인데,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어이없게도 하나님까지 자신의 불효에 대한 핑계거리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소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 중에 많이 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7장 11절부터 13절에 "11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13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라고 정곡을 찔러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고르반"이란 히브리말은 '어떤 물질이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졌음'을 서약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불효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부모를 물질적으로 섬기지 않는데 대한 변명으로 이 서약을 악용했습니다.
즉 "내가 부모님께 드려서 부모님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돈이나 물질이 있었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갖다 바치느라고 부모님께 드리지 못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그야말로 신실한 부모라면 어떻게 대꾸조차 못할 핑계를 대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교묘한 변명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라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불효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분명히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바로 당신께서 몸소 십자가상에서까지 본을 보여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자리에서도 당신의 어머니에 대하여 효도하실 수 있었다면, 우리 자식들에게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이지 자식의 불효에는 그 어떤 변명도, 핑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피곤해도, 자식이 부모를 잘 모시지 않으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조차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무를 저버려도 될 만한 이유는 결코 될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하늘 아버지께 충성을 다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육신의 부모님께 정성을 다해 효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의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문제에 있어서 날이 갈수록 더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부터 믿지 않는 까닭에 세상의 부모도 받들어 모실 줄 모르고 오히려 제 친구처럼 여기는, 정말 버릇없는 자식들이 점점 더 늘어만 갑니다.
혹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불효의 핑계거리로 삼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외식적 교인들마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말세를 향한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효 역시 사람이 스스로 더욱 타락하며 망해가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이루어지는 이 인간사회에서 그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부모자녀의 관계가 타락하고 썩어 간다면 그 결과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효도 문제만큼은 예외가 되어도 상관없으실 분처럼 보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친아들도 아니셨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애의 목적은 그 중차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완수하시기 위한 것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만큼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바로 가르치시고 또한 바로 보여 주신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자식 된 저와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먼저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자식'이 되어야 부모님께 진정 효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무를 면제시키거나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육신적으로는 요셉과 마리아를 부모로 모셨던 우리 예수님의 말씀과 본을 따라서, '하늘 아버지를 믿음으로써 세상 부모 역시 더욱 공경하는' 자녀,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하여 봉양하는' 아들딸이 되심으로써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의 축복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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