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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연을 느끼고 누리십시오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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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느끼고 누리십시오 (로마서 1장 18-20절)


< 계시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

 어느 날, A 부흥사가 부흥집회를 마치고 자는데 새벽 4시에 숙소로 한 여자가 전화했습니다. 부흥사가 “왜 이 시간에 전화했느냐?”고 하자 그녀가 말했습니다. “성령님이 강하게 전화하라고 계시해서 전화했습니다. 목사님의 병을 위해 안수해드리겠습니다.” 부흥사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별다른 병이 없습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성령님이 그런 계시를 주셨다고 해서 부흥사는 “지금은 자는 시간이니까 아침에 봅시다.”라고 한 후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침에 만나자 그녀는 대뜸 자기의 안수부터 받으라고 하면서 자기가 2달 전 20일 금식기도 중에 신유은사를 받고 한 병자를 안수해서 고쳤다고 했습니다. 그 후 부흥회 광고를 볼 때 갑자기 성령님이 “저 부흥사의 병을 안수해서 고치라!”는 계시를 주셔서 그 얘기를 자기 담임목사에게 하자 담임목사가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쳐서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부흥사는 그녀에게 참된 계시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한 것을 깨닫고 같이 성경을 보자고 한 후 마태복음 28장 18-19절을 읽자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 말씀을 읽고 부흥사는 병 고치는 권세를 비롯한 모든 권세의 원천이 예수님이라고 한 후 이런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오전에 담석증 수술을 하는 성도가 있어 수술 전에 기도해주었는데 최종 검사 때 담석이 사라져버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한 집사가 일하다 다리를 삐어서 또 기도했는데 그 집사는 점점 더 아프다고 해서 그때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오전에 권세가 임했으면 오후까지도 있게 하시지 왜 반나절 안에 기도응답이 되게도 하시고 안 되게도 하시나요?” 그때 권세의 원천이 사람이 아님을 깊이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누가복음 10장 20절을 읽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 구절을 읽고 부흥사가 말했습니다. “귀신들의 항복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증거는 아닙니다. 믿음이란 성령 안에서 평안하고 감사하며 상식도 존중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계시라고 하면서 새벽 4시에 여러 집으로 전화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때 그녀는 새벽 4시에 그 부흥사의 숙소 연락처를 알려달라면서 여러 성도를 전화로 깨웠던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도 그런 태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잘못된 영을 받았을까요?” 그때 부흥사가 말했습니다. “자매님!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스스로 과시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면서 때로는 은사 표현도 절제하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건전한 신앙생활은 제쳐놓고 병 고치는 능력을 스스로 과시하고 다니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그 말을 해주고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7장 15-27절을 읽자고 했습니다. 그 구절들을 요약하면 대략 이런 예수님의 말씀들입니다. “신앙은 열매로 알 수 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간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해도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셨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구절을 다 읽은 후 부흥사가 말했습니다. “자매님!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것은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 고치는 아니라 집을 지은 기초입니다. 보이는 능력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영성과 능력을 추구하다가 기초와 기본에서 이탈하고 또한 말씀에서 벗어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계시로 여기면 사탄에게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때 그녀가 어떤 깨달음을 얻고 그 다음부터 자기가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자랑을 그쳤다고 합니다.

 잘못된 계시의 남발은 교회도 망치고 가정도 망치고 자기 영혼도 망칩니다. 그래서 신앙을 바로잡아주는 신학도 중요한 것입니다. 계시와 능력과 은사를 오해하면 수많은 양떼들을 희생시키는 교주의 충실한 도구는 되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물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인물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면 은사와 능력을 과시하고 선전하는 사람이나 집회를 반드시 멀리하고 참된 계시가 무엇인지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 자연을 통해 얻는 교훈 >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특별계시는 성경을 말하고 일반계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일반적인 통로를 말합니다. 본문 19절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은 일반계시를 뜻합니다. 일반계시의 3대 주된 통로는 자연, 역사, 그리고 양심입니다. 특히 자연만물을 보고 깊이 묵상하면 그 광대함과 신비함에 놀라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20절). 그처럼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어떤 영적인 교훈을 얻습니까?

1. 불신을 핑계할 수 없다는 교훈

 자연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표지판과 같습니다. 그 표지판을 무시하고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때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과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한시속 80킬로미터 표지판이 있는 도로를 100킬로 이상으로 달리다가 경찰에게 걸렸습니다. 그때 경찰에게 “저는 그 표지판을 못 봤어요.”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운전자는 표지판을 잘 보고 그 안내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인터넷 회사 직원이 인터넷 수리를 위해 목사 집을 찾았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성구가 새겨진 액자가 벽에 붙어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여기 사는 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서 보는데 즐겨찾기 목록에 있는 홈페이지가 대부분 기독교 관련된 홈페이지인 것을 보면 이분은 “믿음이 좋은 분이겠구나!”라고 짐작합니다. 바로 그때 그 방에서 로만 칼라가 있는 옷을 보면 특별히 그 직원에게 그 집 주인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대략 목사라고 짐작해서 알게 됩니다.

 자연을 하나씩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아도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은하계의 수많은 별들을 비롯한 수많은 광대하고 신비한 자연이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고 신비한 사람의 인체나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의 신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처럼 자연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계시가 충분하게 있기에 누구도 불신에 대한 핑계를 할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교훈

 자연 속에 담긴 무수한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을 생각하면 각 사람에게 존재하는 차이란 것이 별로 큰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 먹고 잘 살지만 어떤 사람은 당장에 먹을 양식조차 걱정하며 삽니다. 그것만 보면 차이가 큰 것 같지만 물질 외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을 볼 수 있는 생각과 시야가 있으면 물질의 차이는 별로 큰 차이가 아니고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임을 느끼게 됩니다.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은 몇 미터 떨어진 용변기에 앉기 위해서도 온 몸이 떨리고 땀이 범벅이 되고 용변을 볼 때도 극도의 인내로 참으며 엄청난 사투를 벌인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 말을 하려면 몸 전체의 힘을 목에 싣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야 간신히 띄엄띄엄 그 말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기 시에서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똑같이 축복해주시는 ‘평등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더 축복하시고 하나님을 위해 힘써 헌신한 사람을 더 축복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에게 주신 것을 내게 주시지 않았다.”고 하며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생각하지 말고 “저 사람에게 주시지 않은 것을 내게 주신 것도 많다.”고 하며 하나님을 공평하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행복의 기회와 가능성을 동등하게 주시지만 행복의 열매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3. 자연과 교류하며 살라는 교훈

 인도에서 간디만큼 유명한 비노바 바베란 선각자가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가 한 말 중에 평생 잊지 못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은 붓다(Buddha)보다 위대하다!”란 말이었습니다. 고타마 붓다가 많은 장소와 많은 스승을 찾아다녀도 얻지 못한 깨달음을 보리수나무 뿌리에 앉아서 얻었으니까 붓다를 깨닫게 한 자연이 더 위대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잘 깨닫지 못합니까? 진지하게 자연을 바라볼 시간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만 진지하게 바라봐도 그 안에서 위대한 정신과 시와 음악과 그림의 원천을 얻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그처럼 자연 속에 숨겨진 신비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 영혼이 교만하게 되지도 않습니다. 자연을 볼 줄 알면 자기도 볼 줄 알게 됩니다.

 또한 자연의 순수함을 느끼면 영혼의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고 자연을 보면서 깊은 영적인 교훈도 얻습니다. 그러므로 가끔 자연으로 나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하라!”는 명령에는 주일성수는 물론 “일터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은 분주한 마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성도는 자연현상과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작은 생물 하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만물이 각자의 소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과 하나도 그냥 생기지 않고 해와 비바람과 미생물들이 함께 협력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 인식을 하면 만물이 친구처럼 느껴지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이 경탄을 잃어버리면 하늘도 잃어버리기 쉽고 자연을 바라보는 눈이 왜곡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왜곡되기 쉽습니다. 자연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볼 때 하나님의 경이로운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삶이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습니다.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자기 존재도 당연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경이로운 손길로 자신을 붙들고 있음을 인식하십시오. 자신을 실패작으로 여기지 말고 자신의 현실도 실패작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자신에 대한 경탄을 회복하십시오. 자연에 대한 경탄은 하나님에 대한 경탄을 통해 결국 자신에 대한 경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찾고 자연 안에서 뛰노는 것도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중요한 일부분입니다.

< 자연을 느끼고 누리십시오 >

 어떤 사람은 1년에 한번 여름 가족캠프에 와서도 말씀집회와 기도집회를 해야 신앙이 크게 자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가족캠프에서는 같이 밥상을 대하고 건전하게 쉬고 즐기고 자연을 느끼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말씀공동체이고 밥상공동체입니다. 성도가 같이 식사하며 교제하고 즐기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살면서 안식하는 삶도 일만큼 중시하면서 쉬는 것이나 노는 것도 잘할 줄 알아야 통전적이고 균형 잡힌 인격이 형성되어 인물이 될 가능성도 커집니다.

 예수님은 영성이 없다고 여겼던 세상적인 사두개인들보다 영성이 깊다고 여겼던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을 더 싫어하셨습니다. 영성이 깊어지는 것을 외골수적으로 깊어지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영성은 균형 잡힌 모습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자연에 나와서는 마음껏 자연을 즐기고 자연을 주신 하나님을 느끼십시오. 그처럼 자연 및 형제와 어울리면서 믿음이 주는 평안과 평화를 누릴 줄 아는 삶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느끼고 경탄하는 삶과 감각의 지수를 높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삶이 빡빡하고 힘겹게 느껴질수록 자연을 찾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내십시오. 사람에게 왜 외로운 감정이 생깁니까? 외로움은 혼자 있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자기 존재 의미를 실감하지 못해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때 자연을 보며 경탄을 회복하면 자신에 대한 경탄도 회복되면서 외로운 감정이 사라집니다.

 영어로 ‘자연’과 ‘당연’은 같은 nature란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사실상 무신론적인 세계관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자연은 ‘당연’이 아닙니다. 자연은 ‘우연’도 아닙니다. 쌀 한 톨도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고 우리가 당한 현실도 우연히 생긴 현실이 아니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만남도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실을 실감하면서 믿음 지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해 경탄하는 삶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삶은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느끼려면 자연에 대해 경탄하면서 창조의 신비를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자연을 통해 창조의 신비를 느끼고 말문이 막히는 체험을 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했습니다. 동시에 대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느끼고 자신이 겸손해지는 체험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꿈과 비전은 오히려 커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인물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말씀사역을 통해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에게도 세계를 꿈꾸게 하는 길을 열어주고 싶습니다. 이제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사역이 발전해서 <월새기 영어판>을 발행해 1불에 공급하면 27000명의 한인 선교사들에게는 큰 영적인 무기가 주어지는 셈이 되고 땅 끝까지의 세계선교도 멋지게 이뤄질 것입니다. 그런 큰 비전을 이루려면 세계를 보는 넓은 시야는 필수적입니다. 그런 시야를 얻으려면 기도도 많이 해야 하지만 가끔 여행도 하고 자연으로 나가서 하늘과 별과 산과 바다를 보면서 자연을 느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번 가족캠프가 자연을 느끼며 하나님 안에서 형제사랑과 교제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은 평소에 꾸준히 잘하기로 결심하고 가족캠프를 할 때는 놀고 쉬고 즐기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자연을 통해 신비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형제 사랑을 나누는 것도 예배생활과 기도생활의 중요한 일부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최상의 통로지만 자연을 느끼고 누리며 형제와 평화롭게 어울려 지내는 삶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작은 통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균형 잡힌 믿음을 위해 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누리는 삶을 정죄하는 바리새인처럼 되지 말게 하소서!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하고 영성이 부족하면서 영성이 있는 척 하려고 남의 믿음과 누림을 정죄하는 데 바빴던 저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즐겁게 뛰노는 어린아이의 심령이 평생토록 제게서 사라지지 않게 하소서!” 그런 겸손한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그가 있는 자리와 그가 당한 현실은 하나님의 임재와 손길을 체험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늘 떠나지 않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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