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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제자가 되는 길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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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제자가 되는 길 (마태복음 8장 18-22절)


< 천박한 영성을 주의하십시오 >

 한 여 집사가 오래 전에 겪은 일입니다. 그녀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기독교 동아리를 통해 알게 된 같은 학년의 한 청년과 5년간 친밀한 연인관계로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자매는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청년의 절교편지가 왔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고 자존심도 상해 이유도 묻지 않고 자신도 절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보내고 많이 울었습니다. 이별의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가끔 이별의 이유를 살폈지만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떤 일의 이유를 찾는데 세월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를 모르면 하나님의 뜻으로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녀가 20년쯤 지난 후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그 기억을 완전히 정리했습니다.

 둘은 5년 동안 공원벤치나 캠퍼스의 조용한 곳에서 밤늦게까지 사랑의 밀어를 나눴지만 둘 다 신실한 청년들이었기에 선을 지키느라고 한 번도 손을 잡아보지 않았습니다. 만약 둘이 결혼했다면 육체적인 교감이 죄스럽게 느껴져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어색했을 정도로 정신적인 교감의 강도가 강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격차이나 의견차이로 정신적인 교감의 둑이 무너지면 오히려 더 쉽게 불행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더 좋은 지금 남편을 주셨다고 해석하고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정리한 것입니다.

 가끔 보면 신실한 성도들 중에 부부생활을 차원 낮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무조건 선하고 육신은 무조건 나쁘다는 사상은 기독교의 진리가 아니라 이단들이 좋아하는 플라톤 사상에 근거한 이원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후 성경은 그 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4-25).”

 건전한 정신생활과 건전한 육신생활을 다 중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육신이 나쁜 것이 아님을 알려준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님의 몸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란 진리를 기독교에서 그토록 중시하는 이유는 이원론으로 인해 기독교의 진리가 훼손되고 영혼이 멸망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성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잘 따르려면 성과 속을 잘 나눠야 되는 줄 압니다. 교회를 위해 가정을 잘 외면해야 십자가를 잘 지는 것인 줄 압니다. 그렇게 분리로 영성을 증명하려는 영성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진짜 깊은 영성은 귀신 들린 창녀에게도 손을 내밀었던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은 무조건 깨끗하고 육신은 무조건 더럽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건전한 육신적인 삶은 영혼의 건강을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천박한 영성을 분별해 잘 피하십시오. 천박한 영성이 무엇입니까? 병들었을 때 “나을 줄 믿습니다!”고 하면서 병원에 가지 않고 병을 키우는 것이 천박한 영성입니다. 교회봉사는 열심히 하면서 가정에서 남편과 자녀를 굶기는 것도 천박한 영성이고 산에 들어가 기도해야 기도발이 먹히고 기도하는 맛이 난다는 것이 천박한 영성입니다. 주일에 ‘운전기사가 일하는 죄’를 짓지 않게 버스를 안타겠다는 것이 천박한 영성이고 추석에 불신자 가족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신앙을 증명하려는 것도 천박한 영성입니다.

 성경은 피곤해도 남편이 요구하면 남편이 응해주고 아내가 요구하면 남편이 응해주라고 권면합니다(고전 7:4). 귀찮고 힘들어도 같이 천국을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세상에 구원을 줄을 던지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가족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도 사랑하십시오. 남편을 외면하면서 교회 생활을 잘하지 말고 남편도 살펴주면서 교회생활을 잘하십시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라는 말은 세상과 단절하며 살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밝게 만들라는 말입니다.

< 참된 제자가 되는 길 >

 신앙생활을 할 때 예수님의 영성을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참된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1.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직후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유 기적을 보고 떼 지어 몰려들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군중들과 분리시키려고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18절).예수님은 제자들이 칭송하는 군중에게서 떨어져 있기를 더 원하셨습니다. 진리는 군중에게서 떨어져야 내면에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혼자 있어도 진리로 활활 타오를 줄 알아야 진짜 진리를 가진 것입니다. 또한 군중의 칭송과 다수의 시선이 없어도 조용하고 꾸준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진짜 성도의 매력입니다.

 그때 한 서기관이 나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19절).” 당시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적대했지만 본문의 서기관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제자의 길이 쉽지 않음을 알려주려고 말씀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절).” 이 말씀은 제자의 길이 영광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임을 깨우쳐주시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이 빠진 신앙은 기복주의와 영적인 사치가 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들릴 때 “아! 부담된다!”라고 하면서 수군거리거나 부담 없는 교회로 가버리면 인생의 부담은 더 커집니다. 부담되는 말씀도 잘 들어야 불행이 예방됩니다. 십자가의 부담이 없으면 좋은 것 같지만 그러면 부활의 축복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부담도 지려고 해야 참된 복도 주어집니다. 참된 친구란 사람이 다 떠나는 상황에서 자신을 찾아주는 친구이고 참된 제자란 사람이 다 십자가의 길을 회피할 때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제자입니다.

2. 내일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서기관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 중 또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절).”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죽은 자를 죽은 자끼리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22절).”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는 윤리나 도덕도 모르는 종교란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 가정과 효성을 중시했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장사를 남에게 맡기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면 그 제자는 놀라운 기적과 군중들의 추종을 보고 호기 있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가 제자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안 되겠다 싶어서 제자가 되겠다는 자기 발언을 취소하고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다가 바로 마음을 돌려서 떠나기가 민망하니까 핑계거리를 찾아 “주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하소서”라고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돌아가신 부친의 장례를 외면하라는 말씀에 강조점이 있지 않고 십자가를 피하려고 믿음의 길에서 후퇴하면 안 된다는 경고의 말씀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예수님의 말씀은 과거의 큰 상처가 있어도 다 잊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라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아픈 과거가 더 이상 새로운 아픔을 낳지 않게 하십시오. 과거의 상처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

3. 주님만 바라보며 사십시오

 예수님이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자기를 잊고 주님만 바라보며 살라는 뜻도 있습니다.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잘 잊을 줄도 알고 자기 기분도 잘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관련이 없는 주변인들에게 기분 나쁜 영향이 미치지 않게 하십시오. 참된 믿음의 능력은 나쁜 것을 끊을 줄 아는 능력이고 남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능력입니다.

 자기감정대로 살지 말고 자기기준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겸손히 자기를 잊고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십시오. 좋은 방향으로 스스로 바꿀 수 있다면 다 과감히 바꾸십시오. 마음과 생활습관도 바꾸고 필요하다면 자주 만나는 사람도 바꾸십시오. 전도를 결단하고 성도다운 말과 행동을 보여주십시오. 물론 행동의 모범을 보여준다고 해서 저절로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말로 적극적으로 권하고 과감히 그의 팔을 붙들고 교회로 오십시오.

 자신을 완벽하게 만든 후 남편을 감동시켜 전도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행동이 좋게 보이면 얼마나 좋게 보이겠습니까? 행동이 부족해도 과감히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교회로 나오십시오. 혼자만 잘 믿지 말고 부족한 허물이 있어도 가족들이 잘 믿도록 지혜를 짜내고 노력도 하십시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영혼구원에 힘쓰면 무너진 것들이 회복되고 마음의 상처도 아물어질 것입니다.

< 아비의 심령을 가지십시오 >

 전도할 때는 영혼구원이란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하지 마십시오. 자기 목사님의 말씀이 너무 좋고 자기 교회가 너무 좋아서 자기 교회에 오면 영혼에 유익이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 교회로 이끄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교회성장을 주목적으로 삼고 전도하면 부작용이 많이 생깁니다. 영혼이 교회로 올 때 ‘아비의 심령’을 가지면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감을 “내가 먹이고 살펴야 할 영혼이 늘었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주인의 심령’을 가지면 “일꾼으로 삼고 헌금할 가능성이 있는 한 명이 늘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비의 심령을 가진 목자는 영혼구원이 우선이지 자기 교회로 이끌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주인의 심령을 가진 목자는 자기 교회로 사람을 이끌려고 그토록 안달하고 자기 교회에서 나가면 아주 싫어하다 못해서 상처까지 입고 더 나아가서 저주까지 합니다. 300명 이하의 교회가 선한 힘을 발휘하려고 숫자적인 성장을 위해 애쓰는 것은 필요하지만 대형교회가 초대형교회를 만들려고 숫자적인 성장에 연연하는 것은 자신들은 ‘영혼에 대한 부담을 가진 모습’이라고 주장해도 남들 보기에는 ‘영혼을 도구화하려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확장과 선한 영향력의 확장이란 목적을 위해 영혼이 쓰임 받기보다 하늘나라의 확장이란 명목으로 교회확장 및 교회리더의 확장을 위해 영혼이 사용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은 좋지만 사람의 도구가 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교회가 커졌어도 ‘분립’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성장’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영혼을 하나님의 도구보다는 사람의 도구로 삼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식입니다.

 교회리더의 권력욕과 명예욕과 물질욕이 과하게 느껴지면 주의하십시오. 그때는 그 교회를 떠나주는 것도 그 리더를 위하는 길이 될 수 있고 자기 영혼도 아끼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남아 있으면 같이 망하게 됩니다. 교회가 커서 부담이 적은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누군가의 도구가 되면 인생 전체가 마이너스가 됩니다. 적절한 부담을 질 때 오히려 인생 전체의 부담이 줄어듭니다. 또한 그때 인생의 객체가 아닌 인생의 주체로 살 수 있고 어디서든지 잘 쓰임 받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힘들어도 자녀를 많이 낳고 잘 키워서 쓰임 받는 인물이 되게 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반면에 자녀로부터 뭔가 얻을 것을 바라고 많이 낳는 것은 복된 일이 아닙니다. 선진국에서는 자녀를 많이 낳으면 정부 보조금이 많아집니다. 그런 보조금을 탐내서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가족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또한 노후대비용으로 자녀를 많이 낳고 키우는 것도 복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됩니다. 자녀를 통해 뭔가를 얻으려는 부모는 대개 더 얻지 못합니다.

 교인 늘리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을 늘리면 얻을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교인을 늘리는데 주력하면 ‘교인의 의미지분’은 작아지고 ‘주인의 권세지분’은 커집니다. 결국 교회의 지나친 외적인 성장추구는 교인에게는 의미와 보람을 주기보다 오히려 빼앗아갈 때도 많습니다. 결국 언젠가 그 성장의 탑은 부작용으로 우수수 무너집니다. 또한 5년 혹은 10년 혹은 2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의미와 보람을 소리 없이 빼앗긴 사실을 각성한 교인들에 의해 리더 자리에서 배척되고 쫓겨나고 심지어는 고발까지 당하면서 말년이 비참해집니다.

 그런 무너짐의 필연적인 수순을 감지한 지혜로운 목사는 교회성장의 은혜를 교회분립의 은혜로 발전시킵니다. 그런 아비의 심령을 가진 목사를 보면 교인들의 기쁨과 보람은 커집니다. 자녀들을 잘 키워서 인물로 만들려면 부모가 돈도 들이고 에너지도 쏟아야 합니다. 그처럼 아비의 심령으로 교인들을 잘 키워서 인물로 만들려면 돈도 들고 에너지도 들기에 아비의 심령을 가진 목자는 교인이 자기 교회로 찾아오면 좋아하면서도 부담을 가집니다. 교인으로부터 뭔가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고 오직 뭔가를 줄 생각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주인의 심령을 가진 목자는 교인이 많아질수록 부담감을 가지기보다 좋아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주인의 심령을 가진 목자는 끊임없이 교회성장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일시적으로는 그 뜻을 이룰 수 있어도 언젠가는 폭삭 무너집니다. 결국 교회가 커지는 것이 기뻐할 일만은 아닙니다. 교회가 커지면 주인의 권세는 커지는 반면에 교인의 의미는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만큼 작아질 수 있습니다.

 아비의 심령을 가지면 교인 수 늘어나는 것에 목을 매지 않고 교인 수를 늘리겠다고 교회성장 세미나를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왜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교인 수를 무리하게 늘리려는 과정에서 기복주의, 신비주의, 물질주의, 외형주의를 따르면서 교회와 교인의 질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소수의 길을 선택해서 인물이 되어 다수를 살리려는 참된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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