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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자녀다운 자녀 (삼하 18: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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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다운 자녀 (삼하 18:28-33)

어느 초등학교 2학년이 쓴 시가 있습니다. 
  
엄마가 있어 좋다. / 나를  이뻐해 주셔서. / 냉장고가 있어 좋다. /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 나랑 놀아주어서. /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의 이 시를 통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아버지가 없는 현대를 대변하는 정말 씁쓸한 시입니다. 아이의 짧은 시지만 이 시에 보면 시대를 대변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들의 애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늘 시간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이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없는 것입니까? 가정을 책임지고,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이 한 시도 아버지를 편하게 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아이와 함께 있어주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어려서 철이 없을 때에는 다만 내 중심으로 아버지의 빈자리를 원망도 하고 섭섭해 하기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철이 든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내 중심으로 내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부모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철이 더 나야합니다. 

이제는 부모가 나를 알아주기만을 기다리는 자식이 아니라 내가 부모님을 알아주는 자녀다운 자녀가 되어야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모다운 부모를 바라기 이전에 자녀다운 자녀가 먼저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아는 자식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자식 되게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훌륭하게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다운 부모가 훌륭한 자식을 만들 수 있듯이 자녀다운 자녀가 아름다운 부모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세운 아버지 상만큼 여러분의 존재는 평가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격하시키면 내 자신이 격하됩니다. 아버지를 높은 분으로 높이는 순간 내 존재의 위치도 높아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높이는 순간 내가 가장 존경받는 분의 자녀가 되는 것 아닙니까? 반대로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분으로 평가하는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사람의 자녀가 되니까 얼마나 형편없어지는 것입니까? 

우리는 어머니 이미지에서 사랑을 배우고, 은혜를 배우고, 자비를 배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이미지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공의와 질서를 배웁니다. 이렇게 배운바 대로 평생 살아가는 것에서 그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집 나간 아들의 아버지로 소개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소개하시는 그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아버지요. 좋은 아버지입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내놓으라고 떼써서 집을 나가버립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왜 돈을 주어서 집을 나가게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갑니다. 그것도 나중에 줘야할 유산을 미리 다 줘버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안 주면 못나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산을 줘서 집을 나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정도 되는 아들이라면 얼마나 망나니였을까를 생각합니다. 도저히 유산을 안 주면 안 될 정도로 못 되게 굴었을 것입니다. 막말을 하며 아버지를 협박했는지도 모릅니다. 답답한 것이 이렇게 천하에 못된 자식을 그냥이라도 내 쫓을 만한데 왜 재산까지 주어서 내 보내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이 돈 다 없애도 좋다. 뭐 돈이 대수냐? 제발 다 없애도 좋으니까 자식다운 자식이 되어서 돌아만 와라.'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아들을 날마다 기다립니다. 꼭 돌아올 줄로 믿고 기다립니다. 살아서 그것도 자식다운 자식이 되어서 돌아 올 줄로 믿고 기다리는 거기에 아버지의 본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아들은 아버지를 못 알아봐도 아버지는 아들을 멀리서도 알아봅니다. 

예수님의 비유지만 정말 아버지의 마음을 기가 막히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동네 소문인들 좋게 났겠습니까? 아주 나쁜 자식이라고 온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 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자식을 둔 아버지는 좋은 소리 듣겠습니까? 하지만 그 아버지는 그 모진 소리들마저도 당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내가 못나서 자식을 저래 만들었다. 다 내 잘못이다. 아들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애비 잘못 만난 죄다.’아버지가 잘못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모두가 당신 잘못인 것만 같습니다. 오늘 우리 부모들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아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두 번 불효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는 것과 남겨진 아버지를 욕먹게 하는 이중적인 불효요, 두고두고 불효거리입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마음의 그게 아니었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이 자식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욕을 먹더라도 그 아들을 기다려 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 온 아들을 보고“내 아들이 돌아왔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잔치를 베풉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려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참으로 훌륭한 아버지로 대표적인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본래 목동이었지만 사울 왕에게 발탁되어서 충성된 장군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사울 왕을 위해 충성을 했지만 사울왕의 시기를 받아서 쫓겨나야 했고 광야를 헤매며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운데서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배반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사실은 굳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아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악당들과 작당을 해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배반한 불효자입니다. 아들의 배반을 알고 맘이 아픈 아버지 다윗은 왕의 보좌를 내 놓고 광야로 피난길을 떠납니다. 그러는 가운데도 늘 아들의 소식이 궁금합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아들은 계속적으로 전쟁을 하고 있었고 어느 날 전쟁 중에 그 아들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오늘 통곡을 합니다. 33절에 보니까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버지 다윗의 자식을 위한 통곡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천하에 죽일 놈이요. 못된 아들이요, 패륜아라고 했겠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자, 어떻게 다윗이 피난의 길을 가야 했습니까? 아들을 야단칠 수도 있고 아직 더 왕의 자리를 지키고 싶은 야망이 있을 법한데 왜 다윗은 왕의 보좌를 내려놓고 피난을 가는 것입니까? 다윗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이 사건을 받아들인 겁니다. 아버지로서 부끄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압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일이 있은 후에 나단선지자가 책망하면서“너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나 그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책망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패륜도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죄 때문에 아들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배신한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윗은 그 아들을 죽일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입니까? 자, 그 상황에서 아들을 죽여서 해결하겠습니까? 내가 죽어서 해결하겠습니까? 다윗의 입장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압살롬을 죽이면 자기는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됩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면 자식을 아버지 죽인 아들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피난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순전한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한편의 드라마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배반한 악한 아들이 있고, 그 악한 아들을 더 악한 아들로 만들지 않으려고 어디 가서 자신이 죽더라도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아버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착한 아들로. 회개한 아들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왕위가 탐이 나서 순리적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아버지를 죽여서라도 그 왕위를 탈취하려했던 패륜아들, 압살롬을 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자식 된 모습이라고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오로지 부모가 남길 재산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압살롬 같은 자녀들, 그 재산에 눈이 어두워서 아직도 살아갈 날 많은 부모님을 잘 모시지 않아서 외롭게 하고, 병들게 하는 압살롬 같은 자녀들이 오늘 우리들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특별히“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하는 부분에서는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아버지의 심정, 부모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언제라도 회개하고 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참 아들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던 다윗의 마음이 진정한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오늘 우리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왜 오늘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까? 자녀답지 않은 압살롬의 욕망 때문에 아버지가 이렇게 곤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자녀다운 자녀가 되지 못한 것 때문에 부모님이 여전히 불행하고 있다면 이것보다 더 큰 불효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아버지로, 어떤 어머니로 생각하든지 여러분이 세워 놓은 그 부모님의 위상만큼의 내 존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나의 자녀 됨의 정도가 부모님을 세운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님이 계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자녀다운 자녀가 되지 못할 때 우리의 부모님의 존재가치도 불행해지고 말 것입니다. 효도하고 싶다면 먼저 자녀다운 자녀가 되십시오. 그래야 부모님들도 부모다운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답지 않은 자녀위에 부모다운 부모는 없는 것이고, 부모다운 부모는 자녀다운 자녀가 될 때에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의 부모는 내가 자녀다운 자녀인가,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행복하실 수도 있고, 불행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도 부모님께 부모다운 부모가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철부지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철이 나야하겠습니다. 내가 자녀다운 자녀가 먼저 되어야 부모님이 부모다운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여러분들의 부모님을 떠올립시다. 그리고 부모다운 부모가 되어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자녀다운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모님들로 부모다운 부모가 되게 하는 길은 내가 먼저 자녀다운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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