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인생의 나침반 (창 12:1-9)

첨부 1


인생의 나침반 (창 12:1-9)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선생님이 해 주신 말씀입니다. 
한 이발사가 손님 면도를 하다가 조느라고 면도날로 손님의 머리를 깎기 시작했습니다. 소금장수가 소금을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이발사가 조는 것을 구경하느라고 리어카를 끌고 냇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며느리가 밥을 푸다가 소금장수가 냇물로 들어가는 것을 구경하느라고 밥솥 옆의 먼지를 푸기 시작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식사를 하다가 며느리가 먼지를 푸는 것을 보느라고 숟가락을 콧구멍으로 가져갔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자기 일을 남의 일을 참견하다가는 자기 일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인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직까지 기억합니다. 

우리는 소모적인 논쟁에 몰입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이야기를 하느라고 바쁩니다. 아무개 교회가 어땠다더라, 아무개가 어땠다더라, 뭘 개혁해야 된다느니, 이것이 필요할 수도 있고 재미있을 수도 있고 관심을 끌 수도 있지만 남의 일에 우리의 시간과 정열을 몰입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정말 해야 되는 일, 정말로 필요한 일에 소홀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의 일에 간섭하기 전에 내 일부터 잘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잘 믿는 것입니다. 내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나대신 해 줄 수가 없고 내 평생의 사명이요 과제입니다. ‘내 평생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서리라’ 

아브라함의 삶은 이방인 문화속의 섬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섬.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사귈만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교류할 수 있는 신앙의 동지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은 이민살이와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교회가 하나도 없는 나라에, 불신자들이 가득한 땅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내셨습니다. 

이방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간섭하기 시작했다면 한도 끝도 없었을 것입니다. 못마땅한 것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느냐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배필을 찾을 때 절대로 가나안 여자 중에서 찾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하란에 가서 배필을 찾아오라고 당부한 일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문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땅에 가나안 사람들이 거하였더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지켰습니다. 만일 주위 환경에서 자신의 신앙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든가 도울 수 있는 여건을 찾았다면 그는 분명히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기대할 수가 없었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지켰습니다. 

그에게 현저한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이 아브라함의 삶에 변함없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면 오늘 본문 4절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라는 구절입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별을 좇아 간 것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그것이 누구와 대비되느냐면 그의 조카 롯과 대비됐습니다. 

성경에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은 아브람을 좇아갔다고 했습니다. 가는 방향은 똑같지만 동기가 달라요.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간 것이고 한 사람은 사람을 좇아 간 것입니다. 성도님들 중에도 똑같이 교회에 나오시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교회를 다니는 분이 있고 사람을 좇아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쫓아다니는 사람은 church goer,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될 수 있지만 아직 성도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눈으로 봤다고 하는 사람은 이단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마음속에 들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줄 모르고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어요. 성경 말씀에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얘기에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예배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또 섬김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바른 삶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personal relationship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좇아가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그럼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분이 계실 텐데 늘 듣는 건 아닙니다. 제 일상생활에서는 적게 듣습니다. 노후대비를 한다든가 펀드에 가입할 때 그럴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참 좋겠는데 그럴 때는 그냥 평소실력으로 해야 되는 것이고 설교를 준비할 때나 예배를 인도할 때나 성도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는 마음속에 무엇이 들립니다. 

이건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머리로 듣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듣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이 느껴지고 뭔가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동시에 활기가 차고 기쁨이 솟아나고 용기가 솟아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고 제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난 것을 가지고 설교를 할 때에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을 가지고 기도를 해줄 때 사람이 감동을 받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습니다. 떠드는 아이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떠오르는 말씀을 전하면 듣습니다. 또 이것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때 귀담아 듣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될 존재라는 것을 여기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차피 믿는 사람이 처음부터 믿는 것이 아니었다면 안 믿는 사람이 영원히 안 믿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고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면 누구든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안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믿는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제가 지어내는 말을 하는 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차이가 있어요. 머리에서 지어내는 말을 하면 사람들이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는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거기에 뭔가 그 소스가 내 자신이 아닌, 나보다 더 크시고 나보다 더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럼 목사님은 의심할 때가 없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실지 모르겠는데 당연히 있지요. 의심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의심을 통해서 완성이 됩니다. 마치 강철이 불을 통해서 강철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참된 믿음은 자신의 의심과 씨름을 한 결과로써 내 믿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데일리라는 사람이 ‘의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그 믿음이 반도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 자신이 씨름을 한 문제들, 제가 씨름했던 의구심, 또 씨름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해답을 얻은 것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전해 드릴 때 그것이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모두가 조금씩은 의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전 세계 만 팔천 명을 표본으로 조사해봤는데 전 세계인의 51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제일 많이 믿는 나라가 브라질, 인도네시아, 터키 순이고 제일 안 믿는 나라가 프랑스, 스웨덴, 벨기에 순이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프랑스와 스웨덴 사람들을 얄밉게 생각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51라는 수치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앞으로의 추세는 어떻게 될 것이냐?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냐, 줄어들 것이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예를 들면 오랜 세월동안 여성학자들, 페미니스트들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생리적인 차이 이외에 남자와 여자 간에 차이는 그건 차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대해서 아무도 대꾸를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심리학과 유전학,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정말로 선천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의외의 장소에서 해답이 온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지지론이 신학과 철학에서 오는 게 아니고 유전자학 ․ 고고학 ․ 역사학 쪽에서 오고 있습니다. 

최근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의 진화심리학자 에킨스 박사가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인류는 한 언어를 사용하다가 흩어져서 다른 언어들이 파생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건 이미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언어가 혼동이 되어서 그 이전에는 한 언어를 쓰다가 여러 언어가 발생했다고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았는데 언어 진화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해서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음소가 줄어든다는 사실에서 착안했다고 합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에요. 유전학자들이 인간의 유전자를 추적해 보았더니 모든 인류는 한 어머니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한 어머니. 그 말은 우리가 다 일가친척이라는 얘기인데 이건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지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전학자들은 그 한 어머니를 누구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이브라고 부릅니다. 성경이 이미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람이 믿지 않았는데 유전학 쪽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학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의심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고 여기에 대해서 믿는 사람들은 뭐라고 변증할 말을 찾지 못했는데 성경말씀이 과연 옳다는 증거가 과학, 고고학, 이런 학문 쪽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학술이 발달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게 아니고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심하는 이유는 많이 알아서가 아니고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충분히 알수록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경말씀이 옳다는 것을 신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련하기 때문에 의심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아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충분히 더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주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이 늘어날수록 만드신 분의 섭리를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을 이해할수록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무지함 가운데 방치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다만 이런 모든 것은 신앙의 타당성을 변증해 줄 수는 있지만 우리를 직접 믿도록 도와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믿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interiority of our soul, 우리의 영혼의 내면에서 은밀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신앙에 대한 타당성을 납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사랑하고 그리고 따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과 대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의구심, 나의 번민, 이런 것을 사람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상담에 한계가 있고 친구에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서 나의 의구심이든 나의 질문이든 나의 원망이든 나의 번민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여쭈어야 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이까.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나는 왜 살며 무엇을 위하여 살며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나이까.’ 그건 누가 대신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부모가 자식에게 많은 것을 주고 또 도와줄 수 있지만 이 문제만큼은 부모가 대신 찾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찾아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에요.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다고만 말하고 있지 어떻게 좇아갔는지는 말하지 않아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아요. 들었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설명을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해 봤기 때문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또 신앙에는 이와 같은 실존적인 면이 있습니다. 누가 설명을 한다고 해서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이미 여러분이 하고 계실 확률이 높습니다. 다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뿐이지요. 예수님 말씀에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남의 일에 간섭하고 남에 대해서만 말하는 한은 그렇게 할 수가 없지요. 골방의 경험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들어야 됩니다. 거기에서 믿음을 얻습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들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