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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 (욜 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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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 (욜 3:12-17)

요엘서는 언뜻 읽으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읽어보면 쉽지 않은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엘서가 어려운 이유는 요엘이라고 하는 사람과 요엘이 살던 시대에 관하여 정확한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엘서는 역사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요엘서가 언제 기록되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기 기록설과 후기 기록설로 나눠져있습니다. 전기 기록설은 B.C. 800년경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이고 후기 기록설은 B.C. 400년경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주장이든 상관없지만 저는 요엘서를 공부하면 할수록 요엘 선지자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이고 요엘서는 B.C. 400년경에 기록된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러나 B.C. 800년경에 기록되었다 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연구할 때에는 항상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구약의 예언은 구약시대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를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가 되면 메시야가 올 것이고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질 것이며 이방인들도 구원받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24절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행 3:24) 사무엘 때부터 모든 선지자들은 베드로가 말하는 이 때 즉 신약시대가 올 것을 예언했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구약의 선지자들은 구약의 용어를 가지고 신약시대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용어는 그들이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용어를 가지고 신약시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구약의 용어가 신약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묵상하면서 구약의 예언서를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엘이 예언하던 시대는 메시야를 기다리던 구약시대의 끝자락으로 백성의 영적인 상태는 저조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에 전대미문의 메뚜기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에게 메뚜기 재앙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앞으로 이스라엘에 더 큰 재앙이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라는 것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결국 A.D. 70년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에 임하였습니다. 로마의 장군이었던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백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살육하고 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팔아먹고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 완전히 파괴됨으로 여호와의 날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요엘은 B.C. 400년경 당시 유다 백성에게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줄 누가 아느냐고 예언했습니다. 회개하면 메뚜기 재앙을 거두시고 물질의 축복도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성령을 보내주시는 영적인 축복도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요엘이 활동하던 B.C. 400년부터 여호와의 날인 A.D. 70년 사이에는 470년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이 470년 동안 유다 백성은 이 축복을 모두 받았습니다. 메뚜기 재앙은 물러가고 물질의 축복은 회복되었으며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영적인 축복도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한대로 여호와의 날은 결국 임했습니다. 요엘 3장은 성령의 축복과 여호와의 날이 실현되는 시대에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Ⅰ.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이란 무엇인가?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욜 3:2) 하나님께서 만국 즉 이방 사람들을 모두 모아 여호사밧 골짜기로 내려가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열국은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욜 3:12) 

이 말씀도 열국 즉 이방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오면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또한 여호사밧 골짜기는 판결 골짜기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욜 3:14) 

판결 골짜기는 영어로 ‘valley of decision’라고 되어 있습니다. ‘decision’은 결정이라는 뜻의 단어인데 ‘valley of decision’을 왜 판결의 골짜기로 했을까요? 그 이유는 결정하는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었다면 결단이라고 했겠지만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판결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사밧 골짜기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역사상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역대하 20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여호사밧 골짜기는 예루살렘 동편과 감람산 사이에 위치한 브라가 골짜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유다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 세 나라(암몬, 모압, 에돔)가 연합군을 형성해서 공격해왔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이 이길 수도 없고 힘도 없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성가대를 앞세워 전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을 하는데 성가대를 앞세우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가대를 앞세워 나가니까 모압과 암몬과 에돔이 서로 자기네들끼리 싸워 모두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고 그 골짜기의 이름을 찬송의 골짜기라는 뜻의 히브리말로 브라가 골짜기로 붙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 어디에도 이 골짜기는 브라가 골짜기라고 나와 있지 여호사밧 골짜기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라가 골짜기는 예루살렘 동편과 감람산 사이에 위치한 크지 않은 골짜기입니다. 이 작은 골짜기에 열방 모든 사람들을 모아 재판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도 열방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재판하기에는 좁을 것입니다. 그랜드 캐니언도 안 되는데 브라가 골짜기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여기 앉아 재판하신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 골짜기를 지상의 어느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시도는 모두 헛된 것이며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도 헛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호사밧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이냐? 여호사밧은 유다의 한 왕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일반 명사로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골짜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열방 모든 나라 사람들의 죄를 국문하시고(2절) 심판을 내리신다고(12절)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요엘 2장과 3장에 예언하신 그 시대로부터 이방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하시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방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진리를 몰랐습니다. 빛을 받은 나라는 오직 이스라엘 한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창조자시라는 것을 문서 계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았지만 이방 나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허물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 사람들은 자기들의 양심에 기록된 희미한 빛에 따라 심판받을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심판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세계 모든 족속들에게 빛을 전파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시고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고 이방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방 사람들도 이 메시지를 받고 빛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30-31절의 바울의 설교는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이 신약적으로는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0-31) 

신약 시대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계시와 빛이 임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이방인이었는데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받으면서 우리에게도 빛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방인에게도 책임이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한 이방인의 구원과 심판이 요엘 3장에서 말하는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만국과 열방을 심판하는 그 웅장한 언어에 합당한 진리인 것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동일한 말씀을 했습니다.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행 14:15-16) 

이제는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가 사도들을 통해 증거되었기 때문에 이 명령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라도 국문하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의 신약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Ⅱ.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욜 3:1) 여호사밧 골짜기에 심판은 “그 날”(in those days)과 “그 때”(at that time)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엘 3장 1절에서 말하는 “그 날” 혹은 “그 때”는 언제를 말하는 것이냐? 언제냐면 그 앞에 있는 요엘 2장 28-32절까지의 사건이 있었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8)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욜 2:32) 
 
사도 베드로가 확증시켜 주기를 이 시대는 오순절날 성령이 임한 신약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6) 그러니까 요엘 2장 28-32절은 사도행전 시대에 오순절날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요엘 3장 1절에서 바로 “그 날”과 “그 때”에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요엘 3장 1절에 관한 주석들을 보니까 “그 날”과 “그 때”를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한다는 것은 요엘 2장 32절 말씀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욜 2:32) 그러니까 유대인들 가운데 택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부은바 되고 구원이 임하는 신약시대를 말하는 것이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사건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은 신약시대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대가 세상을 향해서는 심판의 시대도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 12:31)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은 하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신약 시대에도 계속되는 심판이고 이 심판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모두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Ⅲ.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의 원리는 무엇인가? 

요엘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심판하시는 분명한 원리 4가지가 나와 있는데 이것을 구약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요엘 3장 1-3절까지는 심판의 근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방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서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신약적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대하였느냐가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런 것이 무슨 심판의 근거냐고 이야기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을 어떻게 대했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그 자녀들의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미워하는 것은 그 부모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면 자식도 사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학대하는 것도 예수님을 학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세상을 살면서 환난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 2:34) 

사람들이 패하고 흥하는 것은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돈이 많거나 지식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패하고 흥하는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며 사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사느냐 이것이 사람이 흥하고 패하는 기준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그대로 갖고 있으면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죄를 용서받게 되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사람이 죄사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둘째, 요엘 3장 4-8절은 심판의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 너희의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욜 3:7-8)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자기가 저지른 죄와 심판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저지른 죄와 심판 사이에는 형평성도 있습니다. 남을 노예로 삼은 사람은 자기도 노예로 팔려가고 남을 속인 사람은 자기도 속고 남을 때린 사람은 자기도 맞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도덕적인 성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조금 지었는데 많이 심판하지 않으시고 죄를 많이 지었는데 작게 심판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특징입니다. 
 
셋째, 요엘 3장 9-15절은 하나님의 심판은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열방이 모두 모여 칼과 창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적해도 요엘 11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주의 용사들을 내려오게 해서 물리치겠다고 하십니다. 주의 용사들이란 천사들을 말합니다. 천사는 한 명만 와도 위력이 대단합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침공했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 가운데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사 한 명을 보냈는데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을 하룻밤사이에 모두 송장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열방이 아무리 핵무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넷째, 요엘 3장 16-21절은 심판과 동시에 기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계속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큰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강포를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 (욜 3:16-21)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에게 피난처와 산성이 되시고(16절) 구원받은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 되며(17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8절). 또한 영생하는 생명을 주시고(20절)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니(21절)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결론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불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노아시대에는 물로 심판받았지만 앞으로는 불심판이 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불심판이 오면 하늘도 큰 소리로 떠나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최후 심판의 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열방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 중에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여 심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없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도 목사지만 목사들이 잘못하는 것이 너무 많아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잘못했다고 해서 예수님과 싸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잘못하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따라서 지옥에 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목사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어떻게 모두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목사도 성공하다 보면 교만에 빠질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잘못한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심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없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김으로 16-21절에 약속된 모든 축복들을 다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시고 하나님께서 축복이 되시며 영생도 주시고 원수도 갚아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는 이 축복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입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런 은혜와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대라는 것을 깨달아 은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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