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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갑오개혁(1894년)과 기독교의 [주일]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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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1894년)과 기독교의 [주일]
갈2;11-21

 2016년 현재 전 세계에 설치된 에어컨은 9억대 가량입니다. 2030년엔 16억 대가 되고, 2050년엔 25억대가 된답니다. 아시는 것처럼 에어컨이 기후변화를 일으키는데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크린썸머홀리데이’는 세상을 바꾸는 복음과 같다는 자부심을 갖으셔도 되겠습니다. 이 자부심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는 수고에 대한 보상이 되시기 바랍니다.

구약성서에는 두 개의 안식일 지침이 나옵니다. 하나는 출애굽기 20:8-12인데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십계명에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 출애굽기의 십계명을 ‘원 십계명’이라 부릅니다. 출애굽기가 말하는 ‘안식일 규범’을 보면 10절에 그 방법에 대해서 말합니다. 누구나 차별을 두지 말고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냐면 ‘하나님이 그러셨으니까’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잘 지킨다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무조건 토요일엔 창조주 하나님의 처신을 본받아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일 하지 않는 겁니다.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짐승에게라도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식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신명기 5:12-15에도 출애굽기와 같은 십계명의 틀 안에 안식일 규범이 등장합니다. 거룩하게 지킬 뿐만 아니라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어떻게 지키는가 하면 출애굽기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날은 일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인이나 종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 같이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는 왜 그래야 하는 이유가 출애굽기와 다릅니다. 신명기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출애굽’에서 시작됩니다. 종살이하다가 자유를 얻어 애굽을 나온 것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은 다르지 않지만 그 이유가 달라졌죠?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역사는 ‘창조’와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안식일의 출발을 그래서 하나는 창조에 하나는 출애굽에 두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시대에 이르러서 유대인들은 이 안식일의 근거를 또 바꾸게 됩니다. 이제 이들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에 안식일의 근거를 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안식일의 근거를 설정하는 겁니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기다림이었습니다. 그게 신약시대의 유대인들이 믿었던 안식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엣세네파 같은 경우는 자기의 재산을  팔아 공동체에 모두 바치고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선택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입장에서 이렇게 해야 옳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장차 올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의 재물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겁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엣세네파가 안식을 잘 지키는 방법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삶’그게 곧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이었죠. 그것이 진정 새로 오실 그이를 기다리는 자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34년경에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스테판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배척에 의해 돌에 맞아 죽고 예루살렘의 있던 헬라파유대인들이 안디옥으로 건너갑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렇게 덜 보수적인 이들에 의해 서기 35년경에 세워집니다. 덜 보수적이라는 말은 덜 유대적이라는 말이고, 이는 이방인에 사고에 대해, 이방인의 삶에 대해 너그럽다는 뜻입니다. 할례를 꼭 받지 않아도 되고, 음식을 가려먹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비유대인에 대해서 관용적이었습니다. 바울도 회심 이후에 안디옥에서 이런 그의 새로운 신앙관으로 공동체를 바나바와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이방인들과 밥을 같이 먹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누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자리를 떠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거부감을 갖게 된 바울은 안디옥을 떠나 고린도로 가서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이때가 서기 49년 무렵입니다. 이때까지 예수를 믿는 기독교 공동체라 할지라도 회당에서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사건을 경험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시작하면서 유대교와는 다른 몇 가지 운영체제를 정합니다. 그것이 세례와 성만찬 그리고 바로 주일입니다,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는 겁니다. 이때 비로소 수 천 년 동안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러면 바울이 안식일을 주일로 날짜를 바꿀 때에 과연 그 주일의 의미는 뭐였을까요? 만약 에수시대의 유대인들처럼 ‘다시 오실 메시아’를 생각하고 주일을 만들고, 그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모두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뭘 했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재산을 팔아 공동체에 바치고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해야 했을 겁니다. 물론 바울에게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주일의 근거를 거기에 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뭘까요? 유대인과 이방인 이라는 신분제의 폐지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주인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신분제의 폐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평등을 지향하는 가운데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안식 즉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개념입니다.

우리나라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양반과 상놈이 구별되고, 상놈은 양반에 의해 먹고 살고 죽고 사는 게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894년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흥선대원군이 등장하면서 개혁을 단행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신분제 폐지]입니다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주자학을 바탕으로 운영되던 사회체제가 실학으로 변환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신분제 폐지는 바울이 안디옥 교회를 나와 고린도교회를 세우면서 시작되었고, 대한민국의 신분제 폐지는 1894년의 갑오개혁과 더불어 출발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엊그제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을 담당하는 고위공무원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출발이 다르다. 그러니 공부하고 돈 벌고 애쓴다고 어찌 같아지나? 잘난 사람은 잘나고 못난 사람은 영원히 못나게 되어 있으니 차라리 신분제를 공고히 하고, 잘난 사람들 1%가 개돼지 같은 99%의 백성들을 먹여 살리면 되지 않느냐. 지난 번 지하철 도어 스크린을 고치다가 열차에 치어 죽은 아이를 자꾸 내 아이처럼 생각하라는데 나는 내 아이처럼 생각이 안 든다. 자꾸 그걸 내 아이처럼 생각하란 말은 위선이다. 왜냐하면 내 아들은 절대로 태어나면서부터 스크린 도어나 고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오늘 기독교인이 거룩하게 지키려는 안식 또는 [주일]은 과연 어디서 출발했습니까?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주일의 본래 뜻을 이루어가고 있습니까? 고린도교회를 시작하며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던 바울의 마음으로 돌아가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 차별을 음습하게 희망하고 있는 못된 자기욕망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의 주일을 지키는 이들에겐 세상을 보는 통찰과 자기를 살피는 성찰이 수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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