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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드신 손 (눅 24: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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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드신 손 (눅 24:50-53)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본문의 장면은 매우 특이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우시는 모습이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40일이 되었을 때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셔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셨습니다.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리우셨고, 사도행전 1장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제자들은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승천 사건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고(창 5:24),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들에 의해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 2:11).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천사의 도움도 없고 불수레와 불말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올라가심을 도와줄 천사나 다른 어떤 것이 필요없는 오직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님 자신의 권능으로, 또 만물의 머리로서 위엄스런 장면을 연출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하늘로 오르신 모습은 소박하면서도 장엄한 모습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곳은 하늘의 천군 천사가 주를 찬양하던 베들레헴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하고 모세와 엘리야까지 함께하던 변화산도 아니었습니다. 또 십자가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고 바위가 굴러나며 무덤이 열려 그의 신성을 보여준 그곳 갈보리 동산도 아니었습니다. 여러 시대를 통해서 신비스럽게 빛난 호화스런 영광이 있던 성전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단지 이름 없고 보잘것 없는 마을 베다니였습니다. 

본문은 구속주의 지상 사역이 끝나고 지금은 새 출발의 취임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마 28:18)이 하늘 아버지께로 가시는 숨막히는 모습을 숨을 죽이며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 앞에 높이 드신 예수님의 손은 오늘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드신 손! 그 손의 의미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축복하시기 위해 손을 드심 (= 복을 나누어주는 손)

50절=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예수께서 손을 드신 것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온 제자들에게 축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높이 들린 손은 주의 백성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손입니다.

여기 “데리고...나가사” 의 원형(엑사고)은 ‘인도해내다’ 라는 뜻으로, 사도행전에서 8회,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3회 사용된 것으로 보아 누가의 특징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은 70인역(LXX)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출애굽 사건’ 을 서술할 때 사용되었는데,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끌어내는 모습을 통해 또다른 의미의 출애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승귀(昇貴)의 단계인 승천하시는 자리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심으로써 그들 역시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하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승천하시는 예수께서 높이 드신 손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시는 축복의 손입니다. 손을 드셨다는 표현은 여기에만 나오는 것으로, 험난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의 사역을 맡아 고난의 길을 가야할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이처럼 놀라운 사실이 극히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여기서 승천 자체가 갖고 있는 이적성(異蹟性)을 강조한다기 보다는 승천은 당면한 역사적 사실로 전제하고, 오히려 주요 관심을 예수님 승천 이후의 ‘제자들의 행동 변화’ 에 두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복을 나누어주기 위해 권위의 손을 높이 드셨습니다. 주님의 축복은 마치 자신의 손이 빈 손이 되기까지 축복하심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존귀하신 분의 존귀한 손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복을 내려주시는 것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이 축복은 믿음으로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시는 복입니다. 

요즈음 한국 교회에는 교회 섬기는 일과 기도 생활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해서 물질 축복, 건강 축복, 자녀와 가정 축복, 출세 축복, 심령 축복 받았다는 간증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십자가와 그 고난 참여를 강조하는 분들은 축복 추구는 샤머니즘이나 신흥 종교의 기복 신앙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교적인 것을 경계해야 하겠지만,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특별한 은총과 축복을 약속했고, 또한 그 자녀들은 그런 축복을 간구하기도 하고 받기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축복의 영역은 전인적이며 전폭적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돈도 밥도 신령한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축복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교회의 성도들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훨씬 싱싱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높이 드신 주님의 축복의 손으로부터 현재와 미래의 복이 충만히 부어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그 손은 못자국이 선명히 드러난 손이었음 (= 거룩한 상처를 가진 구속의 손)

하늘로 올리우시던 예수께서 높이 드신 손은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바로 그 손이었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자세히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에는 주님의 손의 못자국이 선명히 드러났을 것입니다. 주님이 드신 손은 거룩한 상처를 가진 구속(救贖)의 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에 관하여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39절). 

예수님은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과 도마에게 매우 실감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십자가에 달려 손 발에 대못으로 찔리시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못자국과 창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신비스러운 상처를 가지게 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장엄한 현장에서 하늘을 향하여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행 1:10). 그들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손은 십자가에서 대못에 박혔던 바로 그 손이었고, 그 상처는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신 영광의 상처이었습니다.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이 대통령으로 재임(1829~37)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1830년 조지 윌슨(George Wilson)이라는 사람이 어느 우체국에서 강도질을 하다가 그곳의 직원을 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소되어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판사는 그를 교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했습니다. 

지금은 교수형에 처해지더라도 곧 바로 처형하지는 않습니다. 감옥에서 여러 해를 살다보면 감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판결이 되면 몇 주, 길어야 몇 달 내에 사형을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앤드루 잭슨이 그를 사면하는 사면장에 서명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에게 주어진 합법적인 권한이었고, 또 모든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사면장이 조지 윌슨이 구금되어 있는 감옥에 당도했습니다. 간수는 그에게 대통령의 사면장을 보이면서 그가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감옥을 나가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지 윌슨은 대통령의 사면을 거부한 것입니다. 아울러서 그는 감옥도 떠나지 않겠다고 우겼습니다. 아마도 세상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간수는 상관에게 그대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지 윌슨의 태도는 그 당시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대법원에 상고되었고, 그곳의 결정으로 그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 당시 다수 견해를 따랐던 대법관 존 마샬(John Marshall)은 유명한 판결 이유를 밝혔습니다. 

“사면장은 종이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 가치는 사면 받을 사람의 승낙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만일 그것이 거부된다면 사면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손의 못자국을 바라봅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내신 주님, 모진 수욕과 고통을 견뎌내시고 묵묵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대못에 박히시고 창에 찔리신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사랑을 바칩시다.


3. 지금 그 손으로 철장을 잡고 다스리심 (= 홀을 휘두르시는 손)

계 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많은 제자들 앞에서 축복의 손을 들고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님은 지금 그 손으로 철장을 잡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제 재림하셔서 홀을 휘두르시는 손으로 모든 원수들을 무릎 꿇리시고 심판하시며,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면류관을 하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손은 전지 전능하신 왕의 손입니다. 제자들을 축복하시던 그 손에는 지금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위해 홀(Sceptre)이 들려져 있습니다. 성경은 1,000년 전에 이미 이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 2: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예수님이 잡으신 철장은 섭리(攝理)의 홀로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섭리하십니다. 주님의 손에 잡힌 철장은 미래의 심판과 영원한 통치의 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계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 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계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영국 역사에서, 카누트 대왕은 원래 덴마크의 임금 스웨인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그는 부왕을 따라 영국을 정복한 공로를 인정받아 나이 겨우 21세 때 영국의 왕으로 모셔진 사람입니다. 그는 형의 죽음으로 2년 후에는 덴마크의 왕을 겸했고 10년 후에는 바이킹들의 횡포를 제압하고 노르웨이의 왕까지 겸하여 대해상(大海上)제국을 건설한 인물입니다. 

이런 왕에게 왜 아부하는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주변의 사람들은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임금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그에게 아첨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신하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흉용한 바다를 향하여 명령했습니다. “바다여 잔잔하라!” 
바다가 미쳤다고 잔잔해지겠습니까? 이에 카누트 대왕은 신하들을 둘러보면서 말했습니다. 

“보라. 나는 바다에게 잔잔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바다는 꼼짝도 않는다. 내가 어떻게 감히 절대권의 소유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고 명령했더니 그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잔잔해지지 않았던가. 따라서 '오직 유일한 임금님은 예수님뿐이시다' 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단지 그의 종에 불과한 사람이다. 왕도 아닌 내가 왕관을 쓴다는 것은 외람된 일이다. 따라서 나는 이 시간부터 이 왕관을 쓰지 않겠다.”

이렇게 자기의 왕관을 예수님께 반납한 이후 그는 단 한번도 왕관을 쓴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의 왕관은 어느 교회당에 걸려 있는데, 그 왕관 밑엔 청동의 팻말이 붙어 있고 그 팻말 속엔 “여기 1032년 카누트왕께서 그의 신하들에게 겸손을 가르친 것이 있다”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손은 홀을 휘두르는 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권세 앞에 절대 복종하는 겸손의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교훈합니다.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나폴레옹이 패망하게 된 워터루(Waterloo) 전투에 관해 나폴레옹 시대의 위대한 시인인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격전이 있던 날 아침, 작달막한 키의 전제 군주 나폴레옹은 싸움이 벌어질 벌판을 바라보며 그의 사령관에게 그날의 작전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 보병을 배치하고 저쪽에는 기병을, 그리고 이쪽에는 포병을 배치할 것이요. 날이 저물 때 쯤에는 영국은 프랑스에게 굴복돼 있을 것이며, 웰링톤 장군은 나폴레옹의 포로가 될 것이요.” 

이 말을 듣던 사령관 네이(Ney)장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들은 나폴레옹은 작달막한 그의 몸을 쭉 펴서 키를 늘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장군은 나 나폴레옹이 친히 계획을 세웠다는 것과 나폴레옹이 승패를 주장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라오.” 

빅토르 위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미 워터루 전투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께서 비와 우박을 퍼부었으므로 나폴레옹의 군대는 계획한 작전을 하나도 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전투가 벌어진 그날 밤에 나폴레옹은 웰링톤 장군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는 영국에 굴복하고 말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손아귀에 쥐고 있는 듯이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우리는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완벽한 계획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전혀 쓸모없다는 것을 나폴레옹은 그 당시에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나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워터루 전투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던 웰링톤 장군은 이베리아 반도를 횡단하다가 포도주 단지(團地)가 있다는 정보를 받자 선발대를 보내 포도주 단지를 완전히 훼파한 후 그 길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네이장군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늦게까지 포도주를 기울이다가 다음 날 무력하게 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술의 영향력은 이렇게도 클 수 있음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계 초강대국 바벨론의 절대 군주 느부갓네살에게 엄히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 4:31-32=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승천하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가신 그대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행 1:11). 
승천하시면서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던 주님은 지금도 섭리의 손을 들어 자기 제자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십니다. 온갖 좋은 것들이 주님의 못박혔던 손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옵니다. 

아프리카의 왕이 '빅토리아' 여왕을 방문하기 위하여 런던에 왔습니다. 여왕은 그를 마차에 태워 온 런던을 돌면서 그에게 런던시의 놀라운 광경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이 궁전에 돌아왔을 때 아프리카의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왕 폐하, 나를 몹시 괴롭히고 있는 의문이 있습니다. 저의 백성은 폐하의 백성만큼이나 건장합니다. 폐하의 군사들 중 두 사람이 한꺼번에 저에게 달려들어도 저는 맨손으로 때려눕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폐하의 나라는 위대하고 우리는 왜소합니까?” 

그때 빅토리아 여왕은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모든 차이를 만드시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삶을 변화시키십니다.” 

놀라운 그리스도의 손! 베다니에 모였던 제자들은 열흘 후에 주님의 못자국난 손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축복을 실제로 받았습니다. 오순절에 모여든 무리들 앞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한 가운데 설교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못자국난 그 손은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시려고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사랑의 깊은 흔적을 지닌 그 손은 이제 곧 최후 심판의 홀을 휘두르는 손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마라나타! 주님이 속히 오십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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