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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권세있는 교사 (마 7: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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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있는 교사 (마 7:28-29)


* 오늘은 5.18 기념주일이면서 스승의 날이라 교회교육주일로 지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벼농사도 잘 짓고, 보리농사 잘 짓고, 채소농사도 잘 짓고 여러 가지 농사를 잘 지어도 자식농사 잘못 지으면 다 소용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자녀교육이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으면 무엇합니까? 아무리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면 무엇합니까? 자식교육 잘못시켜서 잘못되면 다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가정 뿐만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나라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참으로 우리 교회에 많은 기관이 있지만 교육기관만큼 중요한 기관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얼마나 크고 중대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교회는 많은 선생님들이 매주일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생님들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고 우리 온 교회 성도님들이 힘을 합치고 기도로 뒷받침하고 밀어주어야 바른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교사는 두말 할 것도 없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우리 어린이와 청소년은 심성이 백도화지와 같습니다. 그기에 어떤 물감을 가지고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수억의 비싼 작품이 될 수도 있고 하나의 휴지조각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참으로 훌륭한 선생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가르쳐야 거기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올 줄 믿습니다. 

그러면 과연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될 것인가? 가르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육'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가르친다. 길들인다." 또 하나는 '교육'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니까 이북에서는 어린이들이 유치원에서 아주 예쁜 옷을 입고 나와서 똑바로 서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수령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며 또 무엇을 외웁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그것을 보고는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야! 이북 사람들 교육한번 똑 소리나게 잘 시켰구나! 그런데 그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사육'입니다. 서커스 하는데 동물사육사가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동물들을 얼마나 길을 잘 들였는지 호랑이를 길들여 가지고 강아지같이 만들었습니다. 

무서운 호랑이를 길들여 가지고 누우라고 하면 눕고, 구르라고 하면 구르고 앉으라 하면 앉고, 입을 벌리라고 하면 벌려서 사육사가 호랑이 입에다가 머리를 넣고 말이죠. 참으로 말을 잘 듣습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고 호랑이의 야성을 없애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로 만들어 놓는 것, 이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육'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부적으로 주신 재질을 개발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러니까 이북에서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서커스 사육사가 호랑이를 강아지로 만들어 놓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이 자기네들이 원하는 인간상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북보다는 조금 낫지만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박세리는 골프만 치면 돈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아이를 앉혀 놓고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면 영어, 수학, 국어 가르치고 이런 것을 잘 못하면 이 학생은 벌써 싹이 노랗다. 그러고 낙제점수를 받으면 종아리를 맞아야 되요. 골프를 치는데 영어, 수학, 국어가 문제입니까? 

요사이 십대 가수들 방송국에 출연을 해서 춤추면서 노래를 하는 것 그것이 우스운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작사를 하고 작곡을 하고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자기네들이 계획을 세워 가지고 하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일본에서도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모르고 중국에서도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놀라운 '예술'입니다. 대학에서 공부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각자 소질이 있습니다. 그것을 개발하는 것이 '교육'이지 노래부르는 아이, 운동하는 아이, 그림 그리는 아이도 영어, 수학, 국어. 무조건 그것도 잘 하여야 된다고 하니 정말 딱한 노릇입니다.

그런 것은 '교육'이 아니고 '사육'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그래서는 안되겠다! 해서 입시제도부터 바꿔야 되겠다! 영어, 수학, 국어를 못해도 뭐 특기 한 가지 잘하면 특차로 대학에서 받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점점 '사육'에서 '교육'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죠! 

그런데 '기독교교육'은 일반 '세상교육'과는 또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오늘 선생님들께서는 이 말씀을 꼭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본문을 읽어봅시다. 2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옛날 성경에는 '권세 있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예수님이 무엇을 가지고 가르쳤습니까? '노래'로 가르쳤습니까? '시청각교재'로 가르쳤습니까? '영화'를 가지고 가르쳤습니까? 무엇으로 가르쳤어요? 

"말씀"입니다!!! '기독교교육'은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에게 '기독교영화'를 보여주면 안 된다. 뭐! 프로잭터 같은 것도 필요 없다. 노래도 가르치면 안 된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가르쳤는데 무리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무엇으로? '말씀'으로 가르쳤는데, '기독교교육'은 '말씀' 이상 없습니다. 이것을 철저히 머리에 넣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느냐면 어린아이들에게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말씀'을 가르치면 안되고, '말씀'을 가지고 동화를 만들어서 가르치고, '말씀'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서 가르쳐야 되고, 말씀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서 가르쳐야 되고, 말씀을 가지고 재미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가르쳐야 되고, 다! 옳습니다. 

참으로 좋은 방법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말씀은 없어지고 동화를 가지고 가르치고 말씀은 없어지고 노래만 가지고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부산에 '서부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학생들이 지금은 아니지만 한 때 이 만 명이나 될 때가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주일학생' 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주일날이 되면 동대신동 일대의 교통 순경들이 '서부교회' 앞으로 다 모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이 만 명이나 쏟아져 나오니까? 교통사고라도 나면 큰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근처에 있는 다른 교회 주일학교를 담임하는 교사가 하도 기가 막혀서 자기 교회 나오다가 안 나오고 서부교회로 간 아이에게 물어보았어요. 너! 왜? 우리교회 나오지 않고 '서부교회'로 갔느냐? "예 '서부교회'에 가면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시는데 선생님교회는 동화만 들려주어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 안되고 동화를 가르쳐야 재미가 있어서 어린이들이 나올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재미로 말할 것 같으면 텔레비전을 보면 더 재미가 있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텔레비전에서는 얼마나 재미있는 만화영화를 합니까? 그래도 재미있는 만화영화를 보지 않고 교회로 나오는 어린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 학생들은 무엇 하려고 교회 나올까요? 말씀 배우러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다이나마이트가 터질 때 나오는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 마음의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무기가 있으니 말씀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야 무엇이 되는 것이지? 프로그램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프로그램을 가지고 가르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프로그램을 하되 말씀이 위주가 되어야 합니다. 프로그램이 위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왜! 놀랐느냐? 여태까지는 이런 것을 배워 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놀란 이유입니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서기관'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서기관'은 '구약시대'에 있어서는 제사장의 자녀 중에서 어려서부터 택합니다. '신약'에 와서는 '바리새인'의 자녀도 '서기관'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서기관은 한 마디로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인쇄기가 없어서 성경책을 어떻게 했느냐? 전부 손으로 베껴서 성경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나 베끼면 성경이 엉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책을 아무나 베껴서 필사하는 것이 아니고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만 성경을 베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육을 어떻게 받았느냐 하면 다섯 살 때부터 서기관 교육을 시킵니다. 무슨 교육을? 글 쓰는 교육입니다. 

몇 살 때까지 하느냐 하면 열세 살 때까지 그러니까 팔년 동안을 이 아이들은 밥만 먹고 나면 글쓰는 것만 가르칩니다. 팔년 동안을 연습을 하는데 기가 막히게 잘 씁니다. 그리고 열세 살 때부터 필사를 시작합니다. 

열세 살 때부터는 '배움의 아들'이라고 해서 성경을 기록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고 고등교육을 시킵니다. 율법에 대한 고등교육을 열세 때부터 삼십 세까지 고등교육을 받고 정확히 기계같이 쓰는 것입니다. 

삼십 세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자격을 줍니다. 그래서 '랍비'라 그러고 혹은 '율법사'라고도 하고 '서기관'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경에 관하여는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쓰는데 있어서도 기계 같은 사람들이고, 성경에 관해서도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이고, 가르치는데 있었어도 아주 능숙한 사람들입니다. 

이 '서기관'들이 '랍비'들이 가르친 것을 집대성해서 책을 만들어 낸 것이 지금의 탈무드라는 책입니다. 여러분 탈무드 책 다 읽어 보셨죠? 유대인 랍비들이 성경교육을 한 것은 기가 막힙니다. 탈무드 책만 읽어도 은혜가 됩니다. 이렇게 이 사람들은 권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르친 것을 배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삼십 세까지 책상도 짜고, 문짝도 짜고, 장롱도 고치던 목수가 삼십 세가 되어서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 보았더니 목수 아저씨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놀랬다는 것입니다. 왜? 놀랬느냐?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것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랐느냐? 성경기자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우리는 서기관들만큼만 가르쳐도 굉장할 것 같은데 예수님이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권세' 있는 자가 가르치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서기관들은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은 대단히 권위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서기관중에 '교법사'라고 '랍비' 라고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가말리엘' 입니다. 이 바울사도가 '가말리엘' 이라고 하는 랍비에게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큰 자랑거리입니다. "내가 가말리엘 문하생이다." 이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랍비는 아주 권위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권위가 있느냐? 하면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전하는데 예수를 죽이고 나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제자들이 더 열심히 전한다 말이죠! 

그래서 공회에서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내일 회의를 열어 가지고 처단하자. 그래서 공회를 열어 가지고 하인들을 시켜서 감옥에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어 오라고 해서 감옥에 가보니 감옥을 지키는 군사도 지키고 서있고 자물쇠도 그냥 채워져 있는 것을 열고 들어가 보았더니 제자들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 달려와서 감옥을 지키는 군사도 그대로 있고 자물쇠도 채워져 있었는데 감옥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빨리 가서 잘 찾아보아라.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자들이 성전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하고 있느냐? 빨리 잡아 오라! 잡아와서 모두 죽이자. 이놈들 때문에 안되겠다. 온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미혹되겠으니 우리 야고보를 목잘라 죽이듯이 죽이자!" 옳소! 만장일치로 결의될 순간에 '교법사' 가말리엘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 내 말을 들으시오! 과거에도 유다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백성을 미혹해서 많은 사람들이 따르더니 그가 죽고 나니 따르는 사람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드다'라는 사람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따르더니 그가 죽고 나니 다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많은 사람이 따르다가 '예수'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사람에게서부터 나왔으면 가만히 두어도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면 여러분들이 이 사람들을 다 죽여도 이 도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하다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니 이 사람들을 죽이지 맙시다."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많은 공회원 회원들이 그 권위에 눌렸습니다. 

아! 옳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매 때려서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보내 주게 되었습니다. 이 서기관들의 권위가 정말로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권위 있는 서기관들보다도 예수님께서는 더 잘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더 잘 가르쳤느냐? 서기관들은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지만 예수님께서는 '권세'를 가지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권세'를 가지고 말입니다. 

'권위'하고 '권세'하고는 어떻게 다를까? 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면은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더러운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여기에서 '권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권능'을 가지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권세'를 가지고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은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고, 제자들은 권능을 가지고 나가서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쳤습니다. 예수님은 '권세'있는 자와 같이 가르쳤습니다. 

'권위'라는 것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을 하고, 굉장한 전문가가 되었을 때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위는 없었습니다. 아니 목수를 하는 사람이 나와서 가르치는데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서기관들이 권위가 있지요? 그러면 '권세' 있는 사람이 가르쳤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선 '권능'부터 생각을 해 봅시다. 

'권능'하고 '권세'하고 같은 단어가 아닌가 싶어서 제가 원어를 찾아보았습니다. 오늘 '교육주일'이니까? 좀 어려운 말을 좀 쓰겠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권능'이라는 말은 원어를 찾아보니까 '도나미스'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powerful work, 아주 '힘이 넘치는 일', 이것이 '권능'입니다. 이 '권능'은 무엇을 하는데 쓰이는가 하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데 사용합니다. 

기도하면 병마가 떠나고 능력이 생기는데 이것이 '권능'입니다. 귀신이 들려 가지고 야단을 치는데 온 식구들이 다 달려들어도 붙들어도 감당을 못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가서 "꿇어앉아!" 명령하니 꿇어앉습니다. 이것이 '권능'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마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 그러면 사단이 물러갑니다. 이것이 바로 '권능'입니다. 

이것은 제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주신 거와 마찬가지로 부족한 목사지만 '하나님의 종'이라고 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권능'입니다. 


그런데 '권세'는 '권능'하고 또 다릅니다. '권세'가 무엇인가 헬라어를 찾아보았더니 '에두시안'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authority라고 합니다. '권세'라고 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누구로부터 위임받은 것입니다. 

'권능'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고 내가 그것을 사용해서 아주 힘이 넘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세'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커다란 짐차가 있지 않습니까? 영화 같은데 보면 커다란 짐차가 빵빵거리면서 운전을 하는데 운전기사도 얼마나 덩치가 큰지 얼마나 난폭하고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에게 잘못 걸렸다간 큰일이 납니다. 그런데 그런 차가 운전을 하면서 가는데 체격도 조그만 사람이 볼품도 없고 이런 사람이 호각을 불면서 호르륵! 호르륵! 손가락으로 까딱 까딱하면서 덩치 큰 차를 부릅니다. 그러면 제 까짓 것이 무엇인데 나를 불러 하면서 그냥 갑니까? 아닙니다. 오라면 가야 됩니다. 

그렇게도 덩치가 큰 사람이 꼼짝도 못하고 교통경찰에게로 옵니다. 왜 그렀습니까? 교통순경이 '권위'가 있어서 그럽니까? 애시당초에 '권위'라고는 없습니다. 그러면 '권능'은 있습니까? 

이 사람은 능력도 없어요. 덩치도 크고 베테랑 경찰도 아니고 초년병입니다. 그런데, 왜! 호각만 불면 덩치가 큰 사람들이 꼼짝을 못합니까? 그 교통경찰은 그런 '권세'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훈련을 받은 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가지고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고,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 인간들의 심리를 속속들이 다 파헤칠 수 있는 그런 막강한 말씀을 가지고 가르쳤더니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 세상학교에는 이렇습니다. 교육대학을 나와야 되고, 사범대학을 나와야 됩니다. 그래가지고 국가고시에 합격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의 선생님들은 어떻습니까? 그런 것들은 필요 없습니다. 교회학교교육은 '권위'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요사이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서도 주일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선생님들께 배워서 목사가 된 분들이 많습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권세'를 가지고 가르치면 왜 그렇게 굉장한 역사가 일어나느냐? '권세'를 가졌다고 그래서 순경이 신창원을 잡아서 "너는 사형이다"하고 쏘아 죽일 권한은 없습니다. 그저 보내는 겁니다. 어디로 보내는 겁니까? 검찰청으로 말입니다. 법원으로 말입니다. 주일학교교육원 무엇이냐?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권세'를 받아 가지고 아이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면 됩니까? 

예수께로 데리고 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리니, 그가 너희 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을 생각나게 해 주시리라 너희를 진리가운데 인도해 주시리라". 아하! 맞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우리 교인들을 성령께로 인도하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권세'있는 교사입니다. 우리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내가 가르치면 얼마나 가르치겠습니까? 그런데 우린 학생들 마음속에는 누가 계십니까? 유명한 선생님이 와 계십니다. 그 선생님이 누구십니까? '성령님'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도 유명한 선생님이 우리 어린이들 마음속에 다 와 계시는데도 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방법을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이 '권세'있는 자와 같이 가르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령님' 그 분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데 어떻게 하면 그 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을 목사가 하는 일이고, '권세'있는 교사가 하는 일입니다. 

내가 가르치면 얼마나 가르치겠습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너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와 계신다는 것을 확신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신다고 그랬는데 기도하다가 생각나는 말씀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의지대로, 내 생각대로, 내 지식대로 행하는 것은 바리새인이요.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진리로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거스릴 때 '성령의 소욕'을 쫓으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힙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놓으면 진짜로 가르쳐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예! 바로 '성령님' 이십니다. 그러니까 '권세'있는 교사는 자기가 무엇을 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안드레가 와! 보라. 내가 무엇을 말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직접 와서 예수님을 보아라. 

그것이 최고의 교사입니다. 그것이 '권세'있는 교사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에게로 와서 배우라. 어떻게 하면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는다. '성령님'에게 어린이들을 인도하여 맡기는 것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권세'있는 교사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지요. 

권위 있는 '랍비'들은 지식적으로 가르치는데 기가 막히죠. 그러나 그것은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세'있는 교사가 되어서 그 청중들을 말씀을 가지고 성령의 가르침에 갖다 맡겼습니다. 

'성령'이 그 때 감동을 시켰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소질을 개발해 가지고 그야말로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교육'은 그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의 마음속에 '영성'을 내가 개발하고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영성'을 '성령님'에게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 선생님들 내가 하려고 하지 마세요. '성령님'께 맡기세요. "와! 보라. 네가 아무리 말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와서 예수님을 직접보라! 직접 너희 속에 있는 '성령님'과 교제를 하고 직접 그 '성령님'에게 배워 보라."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권세 있는 교사 예수님을 본받아 좋은 교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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