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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 (롬 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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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 (롬 10:5-15)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의와 유대인들의 자기 의를 대비시켜 언급한 바 있습니다(롬10:3). 유대인들의 자기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을 잘 지켜 행함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인한 의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다시 살려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모든 사람의 대속의 구원자로 믿고 그를 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의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언급합니다. 

먼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5절에서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합니다. 여기서 모세가 기록했다는 것은 레18:5의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신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면 살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함으로 살려면 그 중 어느 하나도 어김이 없이 완벽하게 다 지켜 행해야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다 죄인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규례와 법도를 완벽하게 지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의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에 따른 의가 아니고 믿음으로 인한 의를 세우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6절 이하에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에 비해 믿음으로 인한 의가 얼마나 쉬운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6-7절을 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하게 행하기 위해서는 그의 뜻을 온전히 알아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에도 올라가 봐야 하며 무저갱에도 내려가 봐야 할 터이니 마음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며 누가 무저갱에 내려갈 것인가 하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시고 하늘과 무저갱 즉 지옥까지도 다 자신의 주권 아래 두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일어나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늘나라와 지옥에 관한 하나님의 뜻으로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그의 말씀을 깨달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복하는 것이 되겠지만 사도 바울은 본문 6절에서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라.” 합니다.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고 반문하는 것은 그럴 필요 없이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이미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우리 가운데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본문 7절에서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합니다.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반문하는 것은 그럴 필요 없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곳에 내려가셨다 살아 올라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를 모시고 그를 통해 배우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 바로 자기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임을 힘주어 말합니다. 본문 8절에서 의도하는 뜻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우리의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울 것이 없는 일입니다. 본문 9절을 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리고 이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의 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의 의 대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의 의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별개의 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한 내용이며 그가 우리를 구원해 가시는 과정의 하나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도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확신하는 사람은 입으로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마음속에 확신하는 것은 입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 받은 바 구원을 전하고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참으로 구원의 확신과 감격과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본문 11-13절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렇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한 사도 바울은 이제 주제를 바꾸어 그런 구원을 얻은 사람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본문 13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려면 그를 믿어야 합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부르는 것은 헛일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그가 누구이며 그 안에 주어진 복된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들으려면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의 전도자를 보내시고, 보내심을 받은 이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며, 전함을 들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믿고, 믿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며 과정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쓰임을 받는 이들, 그래서 복음 들고 온 세상을 향해 나아가 전하는 이들의 모습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찍이 말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들어봅니다. 사52:7의 말씀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해방될 일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알린 전령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이 예언을 줄여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인용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사역의 소중함을 말한 것입니다. 

전도나 선교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응답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가족, 친지, 이웃을 향한 우리의 책임을 다하며 우리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믿고 구원받은 이들은 누구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좋은 사람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이 사역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전도와 섬김의 동기를 부여해주고 기회를 만들어주며 훈련을 시키는 일은 곧 하나님나라의 사역입니다. 이런 사역에 무관심한 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이런 사역에 동참하고자 하는 청년이 많은 교회는 복 받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선교의 빚을 진 교회입니다. 이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를 그 어느 교회보다도 크게 인식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래서 일찍이 청년대학생들을 방학 때마다 <비전 트립>에 내보내곤 했습니다. 태국, 네팔, 몽골, 중국, 러시아 등 여러 선교지에 보내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으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심과 그의 복음이 살아 움직임을 보고 체험하며 믿음의 깊이를 더하게 하고 섬김의 지평을 넓히며 선교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교육을 시행해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청년대학생들이 자비량으로 이 <비전 트립>에 참여했습니다.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하며 돈을 아껴 모아 이 훈련에 참여하는 청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로 이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많아 교회로서는 늘 안타까웠습니다. 지금까지는 교육2부의 지도위원들이 개인적인 후원금으로 많은 부분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지도위원들의 희생에 기댈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보다 많은 청년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훈련을 시켜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가 많은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비전 트립>의 예산을 대폭 늘려가지고는 교회 전체의 예산을 편성하기가 늘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금년부터는 5월 중에 있는 청년주일을 기해 특별헌금을 실시하고 그 헌금으로 이 사역을 지원하기로 당회가 결정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넓은 이해와 적극적인 참여를 간곡히 구합니다. 

청년은 교회의 미래입니다. 청년들이 살아있는 교회에 미래가 있습니다. 교육2부의 여러 가지 행사 가운데 <비전 트립>이 청년들에게 가장 강도 높은 훈련과 진한 감격과 눈에 띄는 신앙의 성장을 기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입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에게 신앙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높고 넓은 비전을 심어줄 이 교육프로그램을 위해 아낌없는 헌금으로 뜨겁게 후원하는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청년들과 청년들을 키우는 교회의 사역 위에 큰 복을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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