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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신을 벗으라 (출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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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신을 벗으라 (출 3:1-12)

오늘은 모세가 소명을 받는 장면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궐에서 40년 동안 왕자로서의 교육을 익히고, 이제 다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서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제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1절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모세가 양무리를 이끌고 광야 서편으로 인도해 옵니다. 중동지역은 사막이 많고, 풀과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양을 친다는 것은 서부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대 평원에다가 양을 풀어놓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풀이 있는 곳으로 물이 있는 곳으로 양을 인도하여 다니며 양을 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도 마찬가지로 40년이라는 시간동안 미디안 광야에서의 생활을 통해 얻어진 경험에 의지하여 풀이 많고, 양을 치기 좋은 곳으로 인도하여 지금 광야 서편에까지 다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자기의 판단대로 길을 인도하여 왔습니다. 그동안의 경력과 직감적인 판단에 의지하여 호렙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세가 행한 모든 걸음과 길을 인도하여 이곳까지 이르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금까지 모세의 인생을 주관하셔서 40년 동안 애굽에서 세상의 모든 학문을 배우게 하시고, 당시의 최고의 문화를 익히게 하신 하나님이 이제 모세에게 소명을 주시려고 호렙산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출 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또한 자녀 된 우리들에게 하셨던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금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시려는 계획을 세우셨으며, 그것을 담당할 종으로 모세를 진작부터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모세 본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을지라도 모세를 통해 백성들을 인도하시고자 계획하신 하나님께서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 일을 진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왕자로서 궁궐에서 지낸 화려했던 40년의 시간은 인생의 모든 것을 누리던 황태자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인생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반대로 도망자의 신분으로 미디안에서 숨어 지낸 40년의 시간은 마음먹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던 모세가 호기롭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려다가 맥없이 실패하여 쓸쓸히 도망친 허망하기 그지없는 실패자의 인생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 보여 지는 그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도 실패한 인생도 아닌, 그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한 백성들의 지도자로 착실히 훈련되어지는 기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의 판단대로만 살아가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부모의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말씀도 잘 듣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간절한 권면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무슨 말을 하기만하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대답이 “왜요?”입니다.

(호 4:16)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출애굽기 13장 21,22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인도방법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다 예정하고 계시며, 그 길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이렇듯 우리의 모든 문제도 하나님이 그 걸음을 인도해 주시고, 열어 주셔야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되 우리에게 최상의 방법을 사용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2. 불꽃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신 나무는 2절에 떨기나무입니다. 일부의 신학자들은 호렙산 중턱에서 가장 많이 나는 나무가 이 떨기나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이 불꽃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는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이 떨기나무는 아카시아 과의 나무, 쉽게 말하면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싯딤나무, 또는 조각목이라고도 합니다. 

(출 25: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바로 하나님의 법궤를 만들었던 나무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카시아 나무에 나타나신 것은 그 지역에 많은 나무여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다음에 가시나무로 법궤를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법궤의 길이는 두 규빗 반으로 작은 어린아이 키만큼 밖에 안 됩니다. 조각목의 특성상 더 크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성소에 모셔진 법궤를 두려우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상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법궤를 백향목 같은 좋은 나무로 거대하고 화려하게 만들게 하지 않으시고 형편없는 건축자재인 조각목으로 겨우 어린아이 키만큼 작게 만들게 하셨을까요? 조각목 법궤는 사실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법궤에는 만나를 담아두던 떡 항아리와 십계명 돌판,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으며 법궤 외부는 황금으로 감싸고 그 위에 속죄소를 두고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서 덮도록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이루어진 신약시대에 성도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시떨기나무 같은 죄인들을 속죄소 어린양의 피로 정결케 하시고 그 속에 말씀 돌판, 곧 태초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으로, 기적으로(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은혜(만나)로 임재하시고, 황금 같은 영광과 존귀로 의의 옷을 입히시고, 그룹천사를 보내어 보호하고 지켜주실 것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이렇듯 떨기나무는 영적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법궤, 이스라엘 백성, 택한 선민을 상징합니다. 또한 그런 떨기나무에 불꽃이 붙었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의 법궤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보다 소중해 하시는 그의 자녀들이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상징입니다. 얼마나 큰 고통인지 쇠 풀무, 불가마라고 했습니다.

(신 4:20)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의 쇠 풀무 가운데서 끌어내셨다“

또한 이 떨기나무는 영적으로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또한 성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택하신 떨기나무들입니다. 그러나 이 떨기나무에 세상의 환란과 고통과 억압과 압제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이 세상의 고통과 압제가 너무 심하여서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고 계신가 하는 생각도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목하십시오. 절대로 이 고통과 고난은 우리만 홀로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불꽃 속에서 하나님도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출 2:24-25)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들으셨고, 언약을 기억하셨고, 권념하셨습니다. 권념(히브리어 ‘야다’)이라는 것은 ”알다“, ”돌아보다“라는 뜻입니다. (NIV.  God was concerned about them-그들을 걱정했다 / KJV. respect unto them-소중히 여기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고통과 근심을 분명히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권능을 더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 믿으시기 바랍니다.

(출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또한 이사야에서는 친히 그 환란에 동참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불꽃같이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그 가운데서 함께 동참하신 것입니다.

(사 63: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참하고 우리의 고통에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다니엘서 3장에 등장하는 다니엘의 세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을 본받길 원합니다. 바벨론의 왕이었던 느브갓네살은 높이 53m, 너비 5,3m의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는 누구든지 나팔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것에 절을 하라고 명령을 하며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다가 느브갓네살 왕 앞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이제라도 절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단 3:14-15)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상황입니까? 하지만 왕에게 그들은 담담히 말하였습니다.

(단 3:16-17)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극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당므과 같은 고백은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신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슨 일을 당하든지, 어떠한 시련이 몰려오던지, 감당하기 버거운 큰 파도가 우리를 삼키려 할지라도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는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탈 수가 없습니다. 2절 하반부에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있기 때문에 환란이 세어지고. 풍파가 많아질 수는 있지만, 결코 태울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이나 애굽의 불 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있었을지라도 절대로 그들을 태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사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환란과 걱정과 핍박이 몰려와도, 그 환란이 불꽃같이 곧 삼킬 것같이 세력이 강성해도 절대로 택하신 백성, 택하신 족속을 태울 수는 없습니다.


3. 호렙산에 이르니

호렙산은 시나이 반도 맨 아랫자락에 위치한 해발 2,290m의 오늘 날의 ‘예벨 무사/Jebel Musa(모세의 산)’으로 시내산과 같은 산입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또한 호렙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출 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그로 말미암아 호렙산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갖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가나안으로 전진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출 40:36-38)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기독교란 호렙산에 이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호렙산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호렙산에 올라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통해 성도로서의 올바른 행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무장되었으면 담대히 주의 군병이 되어 가나안까지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이란 구별된 차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출 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러분! 왜 이 산이 거룩한 땅입니까? 산에 금광이 많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모세에게는 이 땅은 결코 거룩한 땅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죽지 못해 억지로 양무리를 치는 땅입니다. 모세에게는 소망이 없는 땅이요, 저주받은 땅입니다. 수치를 당한 땅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없는 땅을 하나님은 거룩한 땅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호 2: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우리가 서있는 지금 이 자리도 하나님 앞에 보여 드리기에 너무나도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부끄럽고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자리에 임재하시사, 그 곳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 곳에 서 있는 우리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귀하게 쓰임 받을 도구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사 49:2-3)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어떻게 호렙산에 오를 수 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임으로 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호렙산에 오르는 방법은 오직 기도로만 가능합니다. 모세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할 때도,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할 때도, 아말렉 족속과의 힘겨운 전투 때에도 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종이 부르심을 받고, 사명도, 능력도 받고, 결국엔 주와 함께 모든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4. 신을 벗으라

(출 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러분! 신앙의 시작은 신을 벗는 것입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종의 자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만 신을 신을 수 있습니다. 먼저 왕자의 신분으로 모세는 무언가 주의 일을 해 보려고 했으나. 실패를 했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자기가 배운 지식과, 지혜와 학식과 애국정신으로 주의 일을 해보려다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 모세에게 이제 사명을 맡기십니다.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종의 자세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당시 세계에서는 주인만 신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종은 신을 신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출발은 신을 벗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지금까지는 자기였지만 이제부터는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신을 벗는 차원의 신앙적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명령은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에게 모두 하셨던 명령입니다. 여호수아에게도 똑같은 명령을 하셨습니다.

(수 5:15)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모세는 다섯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첫 번째 거절 - (출 3: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두 번째 거절 -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세 번째 거절 - (출 4: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8-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네 번째 거절 - (출 4: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1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다섯 번째 거절 - (출 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이렇듯 자기주장과 고집이 강한 모세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종의 모습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뒤로 물러난 적은 없었는지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앞으로는 내 주장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오직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말씀을 감사로 받아들이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교훈이 있습니다. “낙타는 주인이 짐을 맡길 때 무릎을 꿇는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신자도 하나님께서 맡기실 때 감사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인도하시되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로 승리하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할 만한 믿음으로 성장하셔서 하나님의 종으로 크게 쓰임 받는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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