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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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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마 3:13-17)


현대 사회에 접어들어서 리더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국가나 교회나 어떤 공동체든지 지도자의 리더십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 리더십에 관한 책 중에 ‘리더와 보스’(사계절 출판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작은 부제로 ‘홍사중의 신지도자론’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홍사중씨는 우리나라의 전근대적인 지도자 상을 ‘보스’라고 표현하고, 현대와 미래에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지도자를 ‘리더’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리더와 보스의 다른 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① 리더는 희망을 준다. 그러나 보스는 겁을 준다.  
② 리더는 ‘가자’고 권한다. 그러나 보스는 ‘가라’고 명령한다.  
③ 리더는 공개적으로 일한다. 그러나 보스는 등 뒤에서 일한다.  
④ 리더는 귀가 여러 개 있다. 그러나 보스는 귀가 없다.  
⑤ 리더는 약점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보스는 약점을 숨긴다.  

⑥ 리더는 앞에서 이끈다. 그러나 보스는 뒤에서 호령한다.  
⑦ 리더는 존경을 모은다. 그러나 보스는 복종을 요구한다.  
⑧ 리더는 남을 믿는다. 그러나 보스는 남을 믿지 않는다.  
⑨ 리더는 사람을 이끌고 간다. 그러나 보스는 그들을 몰고 간다.  
⑩ 리더는 남의 실수를 수정한다. 그러나 보스는 남의 실수를 비난한다.  

⑪ 리더는 선의에 의존한다. 그러나 보스는 권위에 의존한다.  
⑫ 리더는 ‘우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스는 ‘나’라고 말한다. 

리더와 보스의 차이점이 많이 있지만 한마디로 ‘섬기는 자’냐, ‘지배자’냐 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요청하는 지도자(사회, 교회)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지도자의 표상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의 지도자 예수님의 등장을 봅니다. 

1.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첫 번째 행적입니다. 그런데 그 행적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대를 뒤엎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예수님의 겸손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13절)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여기에서 ‘이때에’라고 했는데, 눅3:23에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30세쯤 되신 바로 이때에, 30년 동안의 기다림과 준비를 마치고 때가 되어 첫 공적인 행동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때가 되어서 이제 공적인 일을 행하시기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로 세례 요한에게 거꾸로 세례를 받겠다고 자청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그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신을 들기도 감당키 어려운 자라고 했고, 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마련해놓고 준비해놓은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세례 요한이 예수께 세례를 받아야 마땅한 것임. 그런데 정반대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Baptizo’는 ‘물에 잠긴다’, ‘물로 씻는다’ ‘쇄도하다, 충만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세례란 죄를 씻는 행위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회개의 표로서 죄를 씻어 정결케 하는 것이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례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의 원형은 물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물속에 잠기면서 죄에 붙잡혀 살던 나의 더럽고 추한 옛 생활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다시 나올 때에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계셨습니다. 세례를 받을 사람들은 목사님을 따라 강으로 걸어 들어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강 밖에서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기를 쓰고 오른 손만은 물속에 넣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 오른 손마저 물속에 넣어 버리면 저는 뭘 먹고 삽니까? 오른 손만은 넣으라고 하지 마십시오.” “왜 그래야 합니까?”, “저는 직업이 소매치기거든요” .... 예수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과거의 자기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죽이고 예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2. 세례 받으심의 의의 

그런데 오늘 본문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자기에게 오신다는 사실에 요한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14~15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요청을 거부하며 말합니다. ‘어찌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때 예수께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허락하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 말씀 속에 중요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본래 하나님이셨는데 하나님이심을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죄인으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겸손과 온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모든 사람의 관심이 모아져 있는 인기 절정에서도 그 모든 영광을 예수께 돌리는 겸손한 리더였고, 예수님도 친히 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셨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은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께 세례를 줍니다. 참으로 어렵고 송구스러운 요한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나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이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저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다면 제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참 어려운 시간일 것입니다. 감히 어찌 세례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실 때, 자신이 세례를 베풀 입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하라고 하시니 그대로 행했습니다. 이것이 순종이요 믿음인 것입니다. 


3. 세례 받으심의 결과 

이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의 결과를 봄. 세례를 받으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6~17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 하늘이 열렸습니다. 

(겔1: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이렇게 에스겔서가 시작됩니다. 

행7:56에도 스데반이 순교당하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까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계시는 것을 보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이 교훈하는 것은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세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왜 많은 순교자들이 그렇게 죽을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보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담대하게 성경이 약속한 그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한 세계를 향하여 걸어가며 뛰어가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2)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렸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 위로 건너오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습니다. 여러분, 세례에는 물세례가 있고 불세례가 있습니다. 불세례는 성령세례를 의미합니다. 성령세례는 단순하게 하나의 형식이 아닙니다. 온 몸을 통하여, 온 인격을 통하여, 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해오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세례는 물세례와 더불어 성령체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을 기억합니다. 오순절 날 성도들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처럼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홀연히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성령의 소리를 들었고, 성령의 바람을 맞았고, 성령의 불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례 때 있었던 현상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의 임재와 충만함이 필요했다면 하물며 여러분과 저야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의지와 책임감만으로는 주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17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세례식 후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하늘에서의 확인입니다. 

이 말씀은 시2:7과 사42:1에서 온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임재가 있었고,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성령님의 임재, 하나님의 소리,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었던 이 일들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세례와 구원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의 환상이 아니라 하늘의 환상을, 복음화의 환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1975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학생이었는데, 세례 받기 전에 이미 성령세례를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죄를 대속 받았다는 확신이 있었고 또 당시에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며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할 때였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감동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세례 예식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과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체험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늘의 비전과 환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너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확신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 이러한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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