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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배우고 교제하며 기도하다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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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교제하며 기도하다 (행 2:42-47)

우리는 학생인 동시에 선생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누군가로부터 배웠고 지금도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학생이면서 동시에 선생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배우는 것이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어떻게 공부를 했습니까? 무언가 격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형식에 맞는 것을 배워나갔습니다. 틀을 먼저 짰고 그 다음에 내용을 채웠습니다. 이것이 모든 교육의 기본적인 가치 체계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안정적인 인물로 키워나갔습니다.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이런 교육방식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창의성과 자율성을 저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의성과 자율성이 많은 사람들은 공부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그것이 그들을 힘들게 하고 때로는 귀찮게 합니다. 

세상적인 틀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일까요?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공부 못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학교에서 몇 등을 하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고 몇 등을 벗어나면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판단합니다. 또 그렇게 스스로가 인정합니다. 

우리는 공부하기 좋았을 때보다 공부하기 싫었을 때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3~4월이 되면 날씨가 추웠다가 따듯해지면서 춘곤증이 몰려옵니다. 그러면 공부하다가 곧 잠이 들고 맙니다. 날씨는 너무 좋고 바깥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러면 나가서 놀고 싶습니다. 공부하는 것 보다는 그것이 훨씬 더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7~8월이 되면 이제 좀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덥습니다. 공부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날씨 탓을 하며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 합니다. 9~10월이 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지금까지 열심히 놀았는데 이제부터 공부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아예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다 11~12월이 가까이 오면 그때부터 다시금 후회가 몰려옵니다. ‘조금만 더 빨리 공부를 시작할걸! 조금 더 일찍 정신을 차릴걸!’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낭비한 것에 대해 허탈해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공부가 잘 되었을 때의 기억도 있으십니까? 4~5월에는 ‘아, 참 공부하기 좋은 날씨구나. 무더워지기 전에 더 열심히 공부하자.’ 이렇게 마음먹습니다. 그러다 7~8월이 되면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집니다. 그때마다 세수를 10번 이상하면서 ‘내가 공부해야지. 잠이 오면 서서라도 책을 읽어야지. 정 참기 힘들면 잠깐 낮잠 자고 다시 공부해야지.’ 이렇게 결심해 봅니다. 

그리고 9~10월이 다가오면 그동안 준비했던 것들에 대해 내가 어떻게 실력 발휘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어쩌면 후자에 더 가까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전자로 기억되는 자신의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창의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 못하는 사람은 정말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그들에게는 능력이 없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 사람에게는 더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한 가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느끼는 공간이 더욱 넓게 열려 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지루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공부에 싫증을 내고 몰입을 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이 체계적인 틀 속에 멈춰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런 학생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고 공부하라고 하면 열을 내기 시작합니다. 밤에 잠도 자지 않고 거기에 몰입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공부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성적위주로 판단하는 우리에게는 공부의 목표가 없습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지,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성적을 올리는 것,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 제도화된 안정판을 향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몰고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 5월 14일자 판에 한국의 교육과 사회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한국 청년들의 창업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꿈을 낮춰 가도록 몰아가는 사회다.” 그러면서 한국의 사회와 교육현장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똑똑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녀의 직업으로 대기업의 사원이나 공무원, 전문직 등 안정된 직업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안정적 직업이 한국 사회에서는 최고의 직업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전합니다. 

또한 이코노미스트는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에는 Facebook을 창업한 마크 주커버그 같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쉬워했다 라고 말합니다. 주커버그라는 사람은 1984년생입니다. 그는 하버드대학을 다닐 때 20세의 나이로 Facebook을 창업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7살의 청년인데 전 세계에 6억~7억 명이 Facebook이라는 최대의 소셜 네트워크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러한 창의적인 사람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맺습니다. “총명하고 정열적인 젊은이들이 문제가 아니다. 숨 막히는 규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최고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낮춰서 가도록 몰아가는 사회가 창업을 막는 진짜 장애물이다.”

규범성과 창의성의 갈등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 교육의 2가지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규범성입니다. 또 하나의 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규범성을 뛰어넘는 창의성입니다. 이 두 가지가 교육 속에서 늘 함께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규범적인 것과 창의적인 것은 너무 빨리 충돌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창의적인 길로 가다가 실패하면 빨리 규범 속으로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규범성과 창의성은 충돌이 아닌, 한 단계 뛰어넘는 갈등을 합니다. 그런데 이 갈등은 창의적인 갈등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모든 성숙의 자리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은 그냥 버려야 될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성숙하려면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 갈등을 느끼지 않는 순간 우리는 멈춰서고 주저하게 됩니다. 과거지향적인 인물이 되고 맙니다. 오히려 이런 규범성과 창의성이 함께 만나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은 단순히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도식과 틀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안정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 넘는 성숙성으로 나아가야 참된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이 곧 공부입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이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저희 부모님은 늘 좋은 대학의 좋은 과를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지, 그 대학에 들어가서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 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교육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라.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만족이다.” 왜 그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왜 그 공부를 해야 하는지, 어떤 꿈과 비전을 갖고 내 인생을 펼쳐나가야 되는지는 우리 자녀들과 전혀 나누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때로는 공부하기가 싫어집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기도 싫어집니다. 잔소리 같이 여겨집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공부하기 싫은 마음이 인생의 모든 의욕까지 끊어버리게 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는 것이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는 것도 공부입니다. 일하는 것도 공부입니다. 쉼을 갖는 것도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잠자는 것도 공부입니다. 인생에서 공부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입시에 떨어져본 기억이 있으십니까? 재수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도 인생의 엄청난 공부였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직장에서 쫓겨난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인생의 얼마나 깊은 공부가 되었습니까? 인생에 어떤 것도 공부가 아닌 것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 2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를 믿으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공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공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공부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인간인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어떻게 시간과 역사의 의미를 깨달아야 되는지, 인간관계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무엇을 통해서 내 삶을 꾸며나가야 되는지, 이 모든 것들을 질문하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서 답을 얻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신앙교육이란 배우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답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교육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로만 하는 교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정의가 함께 포함된 교육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있는 교육입니다. 인격이 성숙되는 교육입니다. 머리의 생각과 마음의 느낌, 몸의 동참이 필요한 교육이 우리의 신앙교육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첫 번째 성도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에 있어 교육을 받고 함께 은혜를 나누었는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행전 2:42) 

초대교회는 배우고 가르치는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가르친 후에는 서로 교제했습니다. 떡을 떼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멋지고 사랑스러운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통해서 역사를 변화시키고 온 인류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도들이 가르쳤다라고 기록합니다. 이 사도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그냥 평범한 직장을 갖고 있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사회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던 보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그들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엇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변화되었을까요?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오늘의 지성인들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감성과 감각이 뛰어난 예술인들에게도 영감을 불어 넣어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가르쳤고 무엇을 보여주었기에 이런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한 가지입니다. 그들이 가르쳐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그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줬고, 그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모든 것들이 들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사람들이 바뀌어졌습니다. “아! 내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되겠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배워야겠구나!” 이것이 기독교의 내용인 것입니다. 

신앙교육은 전체를 아우르는 교육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보여준 신앙교육의 특성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전체를 아우르는 교육이었습니다. 인간의 지성만을 다루는 교육이 아니라, 인간의 머리부터 마음, 그리고 삶 전체에 이르는 인간 전체를 꿰뚫는 교육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합 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통전의 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이성을 동원했습니다. 느끼는 감성을 함께 아울렀습니다. 무엇보다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의 역사를 교육의 커리큘럼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통합되어야 진정한 지혜가 생깁니다. 마음과 몸이 함께 만나야 합니다.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인 칸트는 그의 「순수한 이성의 비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하지 못한다. 감각은 아무것도 사유하지 못한다. 오직 양자의 결합을 통해서만 지식이 태어난다.” 지성만 가지고는 참된 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각적인 것, 감성적인 것이 합쳐질 때 비로소 참된 지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화가였던 오토 피네라는 사람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음은 몸이고 몸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 둘을 별개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담기 위해서 몸을 사용하고 몸을 고향하기 위해서 마음을 사용하는 사람은 시간을 초월해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지만 몸과 마음이 함께 묶여졌을 때 시간을 넘어서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일종의 천상적 현실을 갖게 되며 공간을 자유롭게 활보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면의 천국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는 머리로 생각하고 단순히 외우는 것만으로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뛰어 넘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머리와 감성이 하나가 되어야 새로운 역사를 일구어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교육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교육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학교교육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가정교육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전인적으로 키우고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교육은 더 놀라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감각과 인식을 결합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육은 그것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과 연결할까요? 우리는 하늘의 계시와 땅의 지식들을 연결합니다. 땅과 하늘을 결합하는 교육이 기독교 교육입니다. 

어제와 오늘을 연계하는 교육, 오늘과 내일을 함께 만나게 하는 교육, 그래서 시간의 의미와 역사의 의미, 우리의 삶의 목표를 깨닫게 하는 교육이 기독교 교육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인 하나님의 관계를 연결하는 교육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에 깊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현실에 뛰어넘는 삶에 연결시키는 대담한 도전과 모험을 하는 교육이기도 합니다. 죄 속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는 인간을 향해서 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교육입니다. 그의 삶 전체를 높이 올려주는 교육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로 나아가는 인간을 향해서 부활과 생명의 비전을 주는 교육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 무한한 하늘의 세계가 이 땅에 침투해들어오고 있다는 것, 하늘의 지혜와 역사가 우리를 간섭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 갖는 축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안에서 이성과 감성이 통합됩니다. 그 안에서 현실과 초월이 만납니다. 그 안에서 생각과 경험이 함께 합니다. 그 안에서 사랑과 정의와 역사가 함께 움직이며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교육은 나눔이 있는 사랑의 교육입니다

신앙교육의 두 번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웃을 향하여 삶을 나누는 사랑의 교육입니다. 배우는 것은 사랑하면서 배워야 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배재된 교육은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이기적이 야망만 꿈꾸게 만듭니다. 그런데 나 홀로만의 공부가 아니라 이웃과 나누는 공부로 바뀌어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공부하지 않을 때마다 “얘야, 공부하면 남주냐?” 라고 하며 자녀들을 꾸짖곤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교육은 공부해서 남 주는 교육입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교육입니다. 남에게 혜택을 주는 교육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은 함께 떡을 나누면서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의 넉넉한 것들의 연약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신앙교육의 내용입니다. 

신앙교육은 인격교육입니다

세 번째로 신앙교육은 인격교육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배우게 되고 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의 성숙을 도모하는 교육이 신앙교육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책을 그냥 보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누구를 보아야 합니까? 살아계신 말씀, 성육신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성경교육의 목표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잘못 본 것입니다. 잘못 교육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살아계신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위대한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교육이 기독교 교육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교육은 인격교육이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 주는 교육입니다. 그래서 그 분 앞에 서면 새로워집니다. 그 분 앞에 서면 설렙니다. 그 분 앞에 서면 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배우고 교제하며 기도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해서 기도합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왜 기도합니까? 기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현실에 만족하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 기도합니다. 기도란 현실을 넘어서겠다는 것입니다. 현실보다 더 성숙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주님 앞에 나아가겠다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목표입니다. 

기도를 왜 할까요? 현실에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지상에 있는 나를 연계시키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비밀과 지혜를 내게 주옵소서. 내가 주님을 닮아가면서 나의 성품이 성숙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배움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르치는 신앙교육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늘의 모든 지혜와 영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최고의 스승, 참된 스승,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온 우주의 신비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너무 움츠려 들면서 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주인이자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과 함께 필요하면 도전도 해보고, 필요하면 모험도 해보고, 내게 부족한 게 있으면 열심히 배워도 보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을 마음껏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는 축복입니다. 

누구라도 늦은 분은 없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셔도 됩니다. 다시 성경을 펴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나를 위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하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은 성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는 것은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배움의 축복을 마음 것 누리는 하나님의 귀한 성도님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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