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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하지 않는 이유 (요 9: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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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하지 않는 이유 (요 9:24-34)

 
1. 전도가 부담인가?

우리 교회는 매년 5월마다 <가족초청주일> 행사를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가족초청주일>은 가정의 달을 맞아 우선 여러분의 가족 중에서 믿지 않는 분들을 예배에 초청하는 것이고, 여러분의 친구와 친척과 이웃을 예배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5월에 들어서서 이 초청주일 계획을 들으시면서 ‘아휴, 계절의 여왕 5월이 또 힘들어지겠구나!’ ‘전도하란 말만 안 해도 예수 믿을 만 할 텐데….’ 등의 생각을 혹시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여러분, 이 전도 행사가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는 만큼 제게도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예수 믿는 일, 교회 생활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것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도는 부담을 안고서라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전도라는 것이 강요나 어떤 억지 행사로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라도 전도해야 할까요? 그렇게 전도하는 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전도를 어려워하는 이유’, 혹은 ‘전도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오늘 본문은 궁극적으로 ‘어떻게 하면 전도가 부담이 안 되고 즐거움이 될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전도가, 당장 다음 주일이 여러분에게 부담보다는 즐거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이런 식의 전도는 결코 부담이 아니다!

1) “예수님으로 인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먼저 여러분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CBS의 <새롭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에서 아주 인상적인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날 간증 손님은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한 소녀였습니다. 소녀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부산 송도에 있는 “Light House”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요. 부모는 모두 돌아가셨고, 나머지 형제들마저 모두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가족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Light House”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교회와 목사님의 도움으로 무료개안수술을 해주는 서울 “실로암 안과 병원”에서 몇 차례 수술을 통해 시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앞을 보게 된 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며 소녀는 정말 감사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오빠와 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평생을 살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구걸을 하면서 살아온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니 30년 넘게 오직 어둠 속에서만 살아온 것이죠.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가족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동물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 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먹는 음식과 마시는 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이른 아침 동녘에 해가 떠오른들 그 해를 볼 수 없었으며, 해가 떨어지는 夕陽의 壯觀 역시 볼 수 없었습니다.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한 채, 항상 어둠 속에서만 살았습니다. 그의 세상은 온통 어둠뿐이었습니다. 그의 어둠은 육신적이고 물리적인 어둠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성전 입구에서 구걸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면 그렇게 매일을 하루 종일 차가운 바닥에 앉아 구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소경인 그가 매일 영업(?)을 해야 할 만큼 생활비가 많이 필요했겠습니까? 어쩌면 자신이 구걸한 돈으로 부모나 혹은 그 누군가 조금의 여유를 얻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제법 긴 세월을 성전 입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아왔고, 그러면서 언제부턴가 자신의 이름은 잊혀지고 대신 “앞을 보지 못하는 거지”라는 것이 그의 이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과 함께 사람들의 멸시와 비웃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푼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는 더 비굴해져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든 그에게 더 불쌍하게, 더 간절하게 도움을 호소했던 것이죠.

여러분, 어릴 때부터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의 특징이 어떤지 아십니까?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언어능력, 운동능력, 사회성 등이 떨어지고, 강박관념에 시달리거나, 혹은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나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는 등 여러 가지 성격장애를 가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劣等感, 自虐, 忿怒와 復讐心, 사람에 대한 不信 등을 갖고 있으며, 작은 일에도 괴로워하고, 그리고 쉽게 無力感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타의 육체적인 질병까지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이 사람에게 어느 날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초막절로 여겨지는 이스라엘의 큰 명절,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큰 명절은 구걸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때보다 수입이 훨씬 짭짤했습니다. 안식일이자 명절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날,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성전 입구에서 그 날의 수입을 기대하며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으로 들락거리는 그 자리에 전에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멈춰 서서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것보다 멈춰선 것이 그에게는 더 좋은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됐다! 오늘 제대로 한 건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더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 먼저 들려온 소리는 반가운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이 말은 이제까지 자신이 수도 없이 들어온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부모님도, 친척들이나 이웃들도,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도 다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네가 날 때부터 소경인 것은 네 부모가 죄인이라는 증거다. 그런 죄인 부모를 만나 소경으로 사는 것을 어쩌겠니.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사는 데까지 열심히 살아보렴.” “미안하다. 아들아! 네가 소경으로 난 것은 다 나 같은 죄많은 부모 탓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불행을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부모들은 아들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니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 여겨, 이 아들을 볼 때마다 자신들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아, 아들을 더 멀리하고 그래서 이 아들을 버리다시피 했을 것입니다. 자기 연민, 자기 학대, 자포자기, 그리고 부모와 세상 사람들 원망하면서 살아 온 그의 생애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는 한 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자신의 불행이 자기 때문도 부모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뭔가 하실 일이 있어서 그리되었다는 말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고, 깊고 깊은 어둠 속에 비취는 한 줄기 강한 광선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음성의 주인은 자신을 “내가 …세상의 빛이로라(5)”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소경인 그에게 빛을 줄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이 맹인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전부 새롭고, 그러면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장애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이 장애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는 말씀, 그리고 깊은 어둠 속을 살아온 자신에게 빛이 되신다는 말씀, 그래서 그는 기대했습니다. 자신의 삶에도 빛이 비춰지기를! 

그렇게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때, 그 음성의 주인이 자신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고는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더니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고 했습니다. 실로암 못은 성전에서 가까운 예루살렘 성벽 동남쪽에 있는 연못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씻는 것이나 세수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얼굴이 더럽고 꾀째째할수록 더 어울리는 것이 자신이었으니까요! 설사 씻으려고 한들 누가 다 장성한 자신을 씻겨주겠습니까?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실로암 연못까지 더듬어 찾아가는 것 역시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실로암 연못으로 가라’고 명하는 그 분의 말은 믿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순종하여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실로암 연못까지는 눈 뜬 자에게는 가까운 거리였으나 소경인 자신에게는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겨우 도착해서 연못의 물에 자신의 눈을 씻은 결과, 그에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눈을 씻는 순간, 자신이 씻고 있던 물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연못을 보게 되었습니다.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예루살렘 성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성벽 안쪽에 있는 성전도 보였습니다. 또한 오고가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나무와 집들도 보였습니다. 머리 위에 있는 한 낮의 태양도 보였습니다. 감격과 흥분!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눈을 뜬다는 것, 본다는 것은 이렇게 황홀한 것인가! 저것이 사람이고 나무구나! 아, 저 곳이 내가 그동안 앉아 구걸하던 자리구나! 이것이 그 분이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었던가?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고 내게 이 일을 이루어 주신 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틀림없겠구나!” 이런 감격과 흥분으로 그는 다시 자신이 있었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사람과 사물을 피해가며 이리저리 걸으며 뛰어보기도 했습니다. 지난 30여 년, 육신의 어둠 속에 갇혀 있었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 버림받고 소외되어 친구도 소망도 없던 사람의 어둠 속에 갇혀 있었고, 부모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종교적인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그에게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을 빛이라 하신 그 분으로 인하여!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 계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눈까지 열렸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혼의 빛을 받은 사람들의 변화는 다 이와 같습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罪人살리신”을 작사한 존 뉴턴(J. Newton)은 Africa에 가서 흑인을 생포해 노예로 팔아 그것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어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로, 수많은 고아를 돈 한 푼 없이 성공적으로 양육한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 

여러분, 이 죠지 뮬러가 16세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다는 것, 그가 어릴 때부터 술을 즐기고, 거짓을 일삼고, 방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 굳이 방탕하거나 죄질이 무거운 사람이 아니라도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누구나 변화됩니다. 날 때부터 장애나 병을 가진 사람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도, 부모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도, 미래도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사람도, 남보다 못한 부모, 남보다 못한 환경, 남보다 못한 능력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 맹인이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먼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분명히 여러분 각자에게도 예수님으로 인한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먼저 그것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 내게 일어난 일을 그대로 말하는 것

소경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이 사람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충격 속에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8)?” “그 사람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아니야(9)!”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본인이 “내가 그라”했고, 그 사실에 놀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10)?”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초점이 맞추어 진 것이죠. 그리고 그가 눈 뜬 일로 인하여, 산헤드린공회의 特別 小會議가 소집되었습니다. 小會議는 그를 불러다가 심문했습니다. 심문의 주된 내용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인가, 아니면 그가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으므로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니 그는 안식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죄인”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게 되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이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신기함과 더불어 경외심을 불러 일으킬 만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유대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예수가 죄인이라면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소경이 눈을 뜬 기적을 인정하면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는 것을 인정해야하는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에 곤란하다’, ‘그러니 아예 눈을 뜬 사실 자체를 부인해버리자’, ‘먹고 살기 위하여 맹인 행세를 했다고 말하도록 강요하자’는 등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 사람이 그가 원래 맹인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 부모를 불러 그가 정말 원래부터 소경인지를 심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 소경임이 분명하다는 것은 확인해주었지만, 예수님께서 아들을 고쳐주셨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여 지도자들의 위협을 피해갔습니다.

그러자 산헤드린 공회 특별 소위원회는 두 번째 모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 즉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자”를 두 번째 불러 심문했습니다. 어찌하든지 최근 일어난 각종 문제의 진원지인 예수와 그가 맹인을 눈뜨게 한 사실을 철저히 차단하여 더 이상 소문이 나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 번째 자신들 앞에 선 Mr. “눈뜬 자”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 

이 말의 의도는 ‘예수는 죄인이기 때문에 너의 눈을 뜨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눈을 뜨게 했다 해도 죄인이니 너는 죄인의 편을 들지 말고 그를 定罪하라’는 의도였습니다. 이 말에 대해 Mr. “눈뜬 자”는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것,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사실은 소경이었던 제가 지금 이렇게 본다는 것입니다”(25)라고 말했습니다.

어찌하든지 예수를 대적하고 예수를 부인하여 그를 하나님의 아들도, 인생의 구세주도, 병을 고칠 능력도 없는 사기꾼이자 죄인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억지로 받아내려는 권세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악한 의도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일어난 사실입니다. Paul은 고린도전서 4장 19,20절에서 말로는 ‘예수 잘 믿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신자답게 산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즉 삶으로 입증되는 것이라고 한 것이죠.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이루신 일, 지금도 하시는 일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능력이고 힘입니다. 사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떠한 억지를 동원해서라도 예수가 눈을 뜨게 한 사실, 성도에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들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이러한 태도에 Mr. “눈뜬 자”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미 수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지 않습니까? 분명히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제 눈에 바르셨고 제가 그 진흙을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15). 

곧이 듣지 않고 왜 자꾸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 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27)?” 不學無識이요 거지인 자신에게 이루어진 일을 볼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예수를 부인하고 죄인으로 만들려는 바리새인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나 같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는 일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내신 자만이 하실 수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경건하고 순종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며, 또 창세 이후로 날 때부터 소경인 자가 눈을 뜬 일도 없지 않은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예수가 정말 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내게 예수를 통해 이런 일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30~33, NEB).” 눈 뜬 자의 대답은 예수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요,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통해 자신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신들이 유대 사회와 족보, 가문, 고향에서 따돌림 받고 쫓겨나는 것이 두려워, 아들에게 벌어진 이 엄청난 기적에 대해 입을 닫았습니다. 자신을 잘 아는 이웃사람들도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에게 이루어진 이 엄청난 사건, 이 큰 일, 이 명백한 현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이 “눈 뜬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배운 것이 없고 흔히 말하는 인생의 업보라는 업보, 세상의 짐이라는 모든 짐, 그리고 세상의 모든 상처라고 하는 상처는 모조리 짊어지고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당대의 권력자들과 학자들, 그리고 부모와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일어난 그대로 말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논리나 꾸밈이나 가식이 전혀 없습니다. 꾸밈없고 단순하고 정직한 것이 힘이 있습니다.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이루어진 일을 그대로 고백하는 그것이 그의 힘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똑똑한 학자나 지식인이라도, 아무리 권세가 높은 실력자라도 그를 이겨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는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傳道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과 그의 능력에 대한 경험 부족 때문입니다. 

영화의 고장 할리우드에서는 가끔 배우들과 영화계 종사자들이 함께 아침 식사를 나누는 모임이 있습니다. 식사 전에 먼저 당대 최고 인기 배우나 유명 인사를 초빙하여 간단한 연설을 듣습니다. 한 번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한 여성이 연사로 등단했습니다. 그녀는 미국 최고 미인 열 명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배우였습니다. 그녀가 단에 서자 청중들은 뜨겁게 박수를 쳤습니다. 그녀가 연설을 할 차례였습니다. 그녀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본 후 말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지독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장내는 이상야릇한 흥분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또 하나의 스캔들이 터지나보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도대체 그 행운을 잡은 사나이가 누굽니까?” 여자는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제 영화배우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여배우는 정말 자신의 말대로 할리우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이름 없는 목사의 아내가 되어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할리우드의 명예와 부를 물리치고 예수를 선택한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까?”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할리우드의 스타나 영국 여왕의 자리도 지금의 저와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저에게 이처럼 귀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는데요, 그 예수님이 너무 좋다는데요, 그리고 그 예수님을 어느 누구 앞에서라도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다는데요! 어느 누가 그를 막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도 이렇게 좋은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주님의 역사가 실시간으로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일어난 예수님의 손길, 여러분이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도무지 잠잠할 수 없습니까? 여러분도 주님과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 있게 예수님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 전도!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부목사로 있던 경기도 하남시 제1 가나안농군학교 안에 있던 가나안 교회의 당시 담임 목사님은 故 김용기 장로님의 장남이신 김종일 목사님으로, 제1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을 겸하고 계셨습니다. 이 분은 國內外的으로 상당히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농어촌위원회 위원이었고, 정부 자문기관의 회원이었으며, 각종 집회와 대기업 강사로 꽤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미국을 다녀오시더니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약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명성교회 집사였는데요, 이 집사님이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명성교회와 김삼환 목사님 자랑을 얼마나 했든지 괴로울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자랑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급기야 목사님에게 “명성교회 한 번 와보시라” “김삼환 목사님 설교 한 번 들어보시라”고까지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비록 교회는 작아도 나도 한 교회 담임목사이고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인데 나한테까지 명성교회오라고 권하냐?”고 물었는데, 그래도 그 집사님은 너무나 자신 있고 당당하게 “한 번 와보시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김종일 목사님은 그 명성교회 집사에게 큰 감동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도가 부담스러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도의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성격상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하고, 남들에게 말을 잘 못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삶에 특별한 일들이 일어났다면,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매일 매 순간이 즐겁다면, 교회생활과 교회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그것을 말하고 다니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 질문들 던졌습니다. “예수님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이 정말 놀랍고 즐거운 일이라면, 아무리 여러분의 입을 막고 숨을 못 쉬게 해도 결코 침묵하거나 잠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도가 별 것입니까? 주님 때문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예수님으로 인한 특별한 경험, 그리고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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