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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림에서 성취로!

  • 장하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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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기다림에서 성취로! (창41:9-25)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이 기다림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과 희망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기다림을 잘 표현한 노래가 있습니다.

 
"사노라면"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 잠을 잔데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우리는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내일은 해가 뜬다는 이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기다림 속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자녀 얻기를 기다렸고, 욥은 고난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렸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기다린 끝에... 응답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도... 기다려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굳건한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 이것 하나만 잘해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때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고독. 열심히 믿음을 지켜 행해도 더 어려움만 겹치는 처절한 갈등. 육신의 질병을 고쳐 달라고 울부짖어도 점점 건강이 더 악화되는 상황. 정의가 실종되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더 손해보게 되는 환경.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거룩한 삶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도 더 죄악의 길로 빠져들어 반항할 때.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본문은 기다림의 신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끝을 알 수 없는 가운데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꿈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기다림의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으로 팔려가서 애굽이라는 거대제국의 총리가 될 때까지 요셉은 13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13년이라는 시간을 작정하고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루하루 기다리다 보니 13년이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아침안개처럼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요셉은 저절로 기다림의 달인이 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붙잡혀 들어온 술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줄때만 하더라도 그는 이제 기다림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흘 뒤에 이 사람이 감옥에서 나가서 복권이 되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답답함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기다림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누군가 나를 모함하고, 내 처지가 완전히 망가져서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육체적으로 내가 누리던 자유를 빼앗기고, 질병에 걸리고, 척박한 감옥과 같은 억눌림 속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답답해합니다.

여러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요셉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 기다림이 이루어지는 성취의 자리로 요셉을 초청하십니다.

 
역경을 극복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런데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는 것보다 힘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이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시련을 두 번씩이나 극복한 후에 요셉에게 찾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감옥입니다. 시련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영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참담한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기 전에 먼저 낮추시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감옥에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요셉은 2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기간은 인생에서 가장 길게 느껴지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기다렸습니다. 꿈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감옥에 갇혔다고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자신만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시105:17-19) 우리는 이런 기다림의 때를 잘 통과해야 합니다. 기다림의 때를 인내하며 최선을 다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못 느끼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고 있음을 믿고 인내하며 나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요셉을 다시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

프랑스의 시인 마리 로랑생은 자신의 시 '잊혀진 여인'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잊혀진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 사랑받지 못한 애인의 노래 / Chanson du malaime / 로랑생


권태로운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슬픔에 젖은 여인입니다.

슬픔에 젖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불행을 겪고 있는 여인입니다.

불행을 겪고 있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병을 앓는 여인입니다.

병을 앓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버림 받은 여인입니다.

버림 받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쫒겨난 여인입니다.

쫒겨난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죽은 여인입니다.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입니다.

 
잊혀지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 그녀는 죽음보다 더하다고 표현했다.

잊혀진 다는 것은 슬픔입니다. 아픔입니다. 죽음입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잊혀진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수 없는 괴로움입니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일까? 혹시 나의 잘못된 인간관계로 인해 버림받고 잊혀진 불쌍한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기다리고 있던 요셉에게 우리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제일 먼저 하나님이 하신 일은 잊혀진 존재였던 요셉을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기억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요셉은 자기 인생이 잊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형제들로부터 내가 잊혀졌구나! 내게 가정총무를 맡기면서 나의 모든 것을 신임했던 보디발로부터 내가 잊혀졌구나! 꿈을 해석해준 술 맡은 관원장으로부터 잊혀졌구나! 나는 버려진 존재이구나!” 하지만 요셉은 그런 위기 속에서도 계속 기다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바로 사람들이 요셉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부탁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감옥에서 나가 복권된 뒤 이미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자신의 죄를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에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창세기 41:9)

 
술 맡은 관원장이 죄를 기억했다는 것은 요셉을 기억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바로가 꾼 꿈을 듣고 나서야 요셉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요셉은 변함없이 죄인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무려 2년 동안이나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로가 꿈을 꿀 때까지, 바로를 만나게 될 때까지 2년의 세월을 아무 기약 없이 기다리게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만약 요셉이 기다리지 않고 ‘내 인생은 이게 무슨 팔자냐. 내 인생은 되는게 아무것도 없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라고 말하며 자기 인생을 일찍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흔드셨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요셉을 위해 하나님은 또 다른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요셉을 세우시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의 자리까지 흔들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 바로 왕의 삶의 자리까지 흔들어놓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 꿈으로 인해 바로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꾼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나일강가에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등장했는데 갑자기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나와서 이 살진 암소들을 다 잡아 먹었습니다. 또한 줄기가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등장했는데 그 후에 갑자기 가늘고 마른 이삭이 등장해서 그것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이 꿈이 바로에겐 길조가 아닌 흉조로 여겨졌습니다. 바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애굽의 1인자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꿈을 통해 자신의 삶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애굽이라는 거대제국도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권력자 중의 권력자인 바로에게 근심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바로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요? 내 인생이 잘나가기만 했다면,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터전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능력으로 내 인생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독설을 서슴지 않던 이어령 교수가 예수를 믿게 된 간증을 들어보면 이어령 교수의 딸은 미국에서 잘 나가던 검사였습니다. 이 딸이 암에 걸리고, 가정에 우환이 들고, 실명위기가 왔습니다.


그 아픈 딸이 소원 하나가 있다며, 이 교수가 교회에 나가주기를 바랐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그게 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딸의 소원을 들어 준다는 마음으로 평생 처음 교회에 나갔게 되었습니다.

 
이 교수는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하고 계약 하나 하십시다. 만일 우리 딸이 정말 세상을 볼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 제가 가진 모든 능력 즉, 글 쓰는 것과 입담을 하나님을 위해 쓰겠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귀국해서 서울대학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진단 결과는 놀랍게도 눈이 괜찮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딸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새벽기도 하러 가면서 교회 다녀오겠다고 인사하는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딸의 행복을 위해 세례 받기로 결심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어령 교수의 가장 사랑했던 딸의 인생의 터전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딸의 인생이 흔들림으로 이어령 교수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의 삶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은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내일은 해가 뜬다는 이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요셉도 끝을 알 수 없는 역경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는 요셉을 위해 술맡은 관원장으로 하여금 요셉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요셉을 위해 하나님은 바로의 삶의 자리까지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마침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고통 가운데, 질병가운데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마침내 요셉처럼 축복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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